같은 제상을 놓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말하려는 역사적 진실은 다르다. 먼저 [삼국사기]로 가보자. 박제상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요, 파사왕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이었고,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었다. 파진찬은 신라 귀족의 위로부터 네 번째에 해당하는 고위급이다. 제상은 빛나는 귀족의 후예였던 것이다.
그런 제상이 고구려에 인질로 간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를 데리러 간다. 고구려의 왕에게 신라 왕의 간절한 소망을 말하면서, “만약 대왕이 고맙게도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이는 마치 구우일모(九牛一毛)와 같아 대왕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으나, 우리 임금은 한없이 대왕의 유덕함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맺었다. 상대의 입장을 한껏 치켜세워주면서 실리를 찾는, 영리하기 짝이 없는 논변이다. 이 정도인데 고구려의 왕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제상에게 왕은 일본에 잡혀 간 막내 동생 미사흔마저 데려와 줄 것을 은근히 요구한다. 제상은 왕에게, ‘비록 재주 없고 둔하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까지 왕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라 하고, 부인에게는, ‘왕의 명령을 받들고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만날 기대일랑 하지 말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충신의 모습이다. 사실 [삼국사기]가 박제상을 열전에 넣어 소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전범을 만들고자 했던 김부식의 관점에서 박제상은 너무나 훌륭한 소재였다. 그의 행동 가운데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점을 강조해마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상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미사흔 탈출에 성공하는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그것은 오히려 후일담에 불과하다. 끝내 일본 왕이 제상을 섬으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불로 온 몸을 태운 뒤에 목을 베었다는 처형 소식은, 끔찍하기는 할지언정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다. 소식을 전해 들은 신라의 왕이 ‘애통해 하며 대아찬이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그의 식구들에게 많은 물건을 보내주었다’는 대목이, 자상한 군주의 모습을 그리는 데에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삼국사기]에서 박제상의 이야기는 몸을 버리기까지 충성하는 신하와, 그 충성을 갸륵하고 애통하게 받아들이는 군주의 이중창으로 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