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박제상

문성식 2010. 10. 4. 15:45

 

박제상(朴堤上, 363~419)만한 충신을 어디서 또 찾을까. 우리 역사상의 충신 계보는 박제상에서 출발한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죽는 장소가 될 줄 알면서도 적지에 갔다. [삼국사기]는 그를 박제상으로, [삼국유사]는 김제상으로 적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박제상과 김제상의 차이 이상으로, 두 책이 그린 이 사람의 생애는 다르다. 그러기에 두 책의 이야기를 합해 제상의 온전한 모습을 그릴 필요가 있다.

 

 

박제상인가 김제상인가

박제상은 신라의 충신으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름이 박제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쩐 일인지 [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이라 하여 논란이 되는 그 사람이다.

 

다르기로는 이름만이 아니다. 각각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내물왕(356~401)의 두 아들을 제상이 구해 온다는 것, 구출은 성공하지만 끝내 제상이 일본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큰 줄기만 같을 뿐, 두 아들의 이름 또한 다르고, 볼모로 가고 돌아오는 해도 다르다. 무엇보다 다른 것은 볼모로 간 계기며 구출하는 과정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이렇게 서로 다르게 기록한 까닭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볼모로 잡혀간 이는 내물왕의 둘째와 셋째 아들이다. 큰아들은 눌지왕(417~457)이다. 먼저 두 책의 차이점을 표로 정리해 보자.

 

<둘째 아들>

 

이름

볼모로 간 해

돌아온 해

간 곳

삼국사기

복호

실성왕 11년(412)

눌지왕 2년(418)

고구려

삼국유사

보해

눌지왕 3년(419)

눌지왕 9년(425)

고구려

 

<셋째 아들>

 

이름

볼모로 간 해

돌아온 해

간 곳

삼국사기

미사흔

실성왕 1년(402)

눌지왕 2년(418)

일본

삼국유사

미해

내물왕 36년(391)

눌지왕 9년(425)

일본

 

이 표에서 가장 큰 차이는 두 아들이 잡혀간 해이다. [삼국사기]는 둘 다 실성왕 때라고 하였다. 실성왕(402~416)은 누구인가. 내물왕의 조카로 왕위에 오른 이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삼촌인 내물왕에 대한 해묵은 원한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세자 시절에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는 조카가 되는 내물왕의 두 아들을 볼모로 보내게 된 것이다.

 

 

신라 왕자를 볼모로 보낸 까닭

물론 볼모는 신라가 고구려와 일본 두 나라에게 펼치는 외교관계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내물왕 37년, 왕은 조카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이때 고구려는 광개토왕 2년이다.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에 대해 신라는 매우 조심스럽게 외교정책을 펼쳐야 했다. 실성은 10년 만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 일로 실성이 내물에 대해 앙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실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고 그 증표 삼아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 아울러 10년 뒤에는 고구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복호를 보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신라의 치밀하고도 조금 치욕스러운 외교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그에 비해 [삼국유사]는 볼모의 원인을 다르게 썼다. 우선 이 볼모 사태에서 실성왕은 완전히 빠져 있다. 셋째 아들은 아버지 때인 내물왕 36년에 일본으로, 둘째 아들은 형인 눌지왕 3년에 고구려로 갔다. [삼국유사]의 제상 이야기에 이렇듯 실성왕은 출연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볼모 사태를 전개하는 흐름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실성왕의 앙심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지 않은가. 이 점을 먼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 달라졌을까. 다르다면 [삼국유사]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충성스러운 신하의 전형

같은 제상을 놓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말하려는 역사적 진실은 다르다. 먼저 [삼국사기]로 가보자. 박제상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요, 파사왕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이었고,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었다. 파진찬은 신라 귀족의 위로부터 네 번째에 해당하는 고위급이다. 제상은 빛나는 귀족의 후예였던 것이다.

 

그런 제상이 고구려에 인질로 간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를 데리러 간다. 고구려의 왕에게 신라 왕의 간절한 소망을 말하면서, “만약 대왕이 고맙게도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이는 마치 구우일모(九牛一毛)와 같아 대왕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으나, 우리 임금은 한없이 대왕의 유덕함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맺었다. 상대의 입장을 한껏 치켜세워주면서 실리를 찾는, 영리하기 짝이 없는 논변이다. 이 정도인데 고구려의 왕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제상에게 왕은 일본에 잡혀 간 막내 동생 미사흔마저 데려와 줄 것을 은근히 요구한다. 제상은 왕에게, ‘비록 재주 없고 둔하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까지 왕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라 하고, 부인에게는, ‘왕의 명령을 받들고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만날 기대일랑 하지 말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충신의 모습이다. 사실 [삼국사기]가 박제상을 열전에 넣어 소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전범을 만들고자 했던 김부식의 관점에서 박제상은 너무나 훌륭한 소재였다. 그의 행동 가운데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점을 강조해마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상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미사흔 탈출에 성공하는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그것은 오히려 후일담에 불과하다. 끝내 일본 왕이 제상을 섬으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불로 온 몸을 태운 뒤에 목을 베었다는 처형 소식은, 끔찍하기는 할지언정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다. 소식을 전해 들은 신라의 왕이 ‘애통해 하며 대아찬이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그의 식구들에게 많은 물건을 보내주었다’는 대목이, 자상한 군주의 모습을 그리는 데에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삼국사기]에서 박제상의 이야기는 몸을 버리기까지 충성하는 신하와, 그 충성을 갸륵하고 애통하게 받아들이는 군주의 이중창으로 들린다.

 

 

삼국유사만이 전하는 제상의 처절한 죽음

이에 비해 [삼국유사]에서 김제상의 이야기는 강조하는 점이 다르다. [삼국사기]와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앞서 정리한 대로다. 그 가운데 실성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했었다. 실성왕 없는 이야기이므로 실성왕의 앙심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삼국사기]에서 실성왕이 고구려에 볼모로 간 때는 내물왕 37년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해가 일본으로 가는 것이 이 왕 36년이다. 실성왕과 미해의 출국 연도가 1년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미해만 놓고 보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실성왕 1년 사이에는 10년 이상 벌어져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한두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내물왕 36년을 전후하여 신라는 고구려와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이렇듯 적극적인 볼모 정책을 쓴 것일까. 아니면 [삼국사기]의 실성왕이 고구려에 간 사건을 [삼국유사]는 미해가 일본에 간 사건으로 고쳐놓은 것일까. 후자라면 [삼국유사]가 이 이야기에서 실성왕을 빼놓으려는 적극적인 의도로도 읽힌다.


제상이 고구려와 일본에서 두 왕자를 구출하는 우여곡절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크게 다르지 않다. 신라에 배신하고 도망쳤다는 각본으로 일본 왕을 속이고, 오래지 않아 왕자를 빼돌린 다음, 제상 자신만 체포되는 과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없는, [삼국유사]만이 그리고 있는 제상의 최후가 아연 눈에 띈다.

(일본 왕이)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네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
“저는 신라의 신하요 왜 나라의 신하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려했을 따름이오. 어찌 감히 그대에게 말을 하리요.”
왜나라 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이제 네가 나의 신하가 되었다고 했으면서 신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받아야 하리라. 만약 왜 나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높은 벼슬을 상으로 내리리라.”
“차라리 신라 땅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 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왜나라 왕은 정말 화가 났다. 제상의 발바닥 거죽을 벗겨낸 뒤, 갈대를 잘라놓고 그 위로 걷게 했다. 그러면서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이냐?”
“신라의 신하이다.”
또 뜨거운 철판 위에 세워놓고 물었다. 
“어느 나라의 신하냐?”
“신라의 신하다.” 
왜 나라 왕은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木島)에서 불태워 죽였다.

-[삼국유사]에서-

다시 말하건대 이 대목은 [삼국유사]에만 나온다. 그 가운데 특히 “차라리 신라 땅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 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寧爲鷄林之犬㹠, 不爲倭國之臣子, 寧受鷄林之箠楚, 不受倭國之爵祿)는 구절이 하이라이트이다. 예전에는 이 원문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김제상의 탄생

충성스러운 신하의 눈물겨운 나라 사랑이 절절한 이 대목은 크게 보아 [삼국사기]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장작불로 온 몸을 태운 뒤에 목을 베었다’는 [삼국사기]의 처형 소식을 좀 늘려놓은 데 불과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토록 세밀하게 그리는 [삼국유사] 저자의 의도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해석이 필요할 듯하다.

 

먼저 [삼국유사]의 제상 이야기에 실성왕이 빠졌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실성이 빠지므로 내물왕-실성왕-눌지왕 3대에 걸친 볼모 사태는 왕실 내부의 감정싸움이 될 수 없다. 결국 신라와 주변 나라와의 외교에 얽힌 한 신하의 장렬한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삼국사기]는 그것을 충신의 전형으로 한정하였지만, [삼국유사]는 거기서 나아가 일본의 흉악한 처사에 무게 중심을 이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무렵 고려는 일본 원정을 앞두고 있었다. 원정군을 독려하기 위해 충렬왕은 경주에 내려와 있었고, 일연은 왕의 처소로 불려간다. 고려는 앞서 원 나라와의 전쟁에서 졌고, 일본 원정도 원의 강압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은 치러야 하지만 왕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러므로 왕이 일연을 부른 것은 당대 고승으로서 그에게 심란한 마음의 한쪽을 털어놓고 위로 받자는 목적이었다. 이 일이 끝난 직후, 왕은 일연을 개성까지 동행하여 나라의 스승인 국사에 앉혔다.          

 

일연은 경주 체재를 계기로 박제상을 다시 생각했다. 성이 김(金)인 제상의 다른 이야기도 취재 했으리라. 디데이를 앞둔 병촌(兵村)에서, 애꿎은 군사를 사지(死地)로 보내는 고승이 해야 할 일은 얄궂게도 이들에게 싸워야 할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그 의욕만이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올 길이었다. 전장에서 적개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게 충성스러운 신하만이었던 박제상은 ‘발바닥 거죽을 벗겨낸 뒤 갈대를 잘라놓고 그 위로 걷게’ 해도 끝내 굴복하지 않는 기개의 김제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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