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평 성충(成忠)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리라 예상했고, 육로로 오면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수군이면 기벌포(伎伐浦)를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의자왕에게 간언하였다. 의자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사태가 심각해진 다음에도 신하들 사이에서는 지공과 속공의 지리멸렬한 말싸움만 계속되었다. 마지막으로 판단하자고 유배 간 좌평 흥수(興首)에게 사람을 보내지만 그에게서는 성충의 말과 같다는 짤막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그마저도 듣지 않은 것이 의자왕이었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의자왕은 계백을 불렀다. 이때 그의 계급이 달솔이었다. 16관등 가운데 두 번째인 꽤나 높은 자리였지만 그의 가용병력은 5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말이 좋아 결사대이지, 군사가 있다면야 왜 더 데려가지 않았겠는가. 이 상황에 처한 계백의 육성을 들어보자. 역사서의 지면을 빌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 나라의 힘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겠다.” 출정하기 전 자기의 처자를 죽이며 한 말이다. 앞서 이미 자세히 설명한 대로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계백’에 나온다.
“옛날 월(越) 나라 왕 구천(句踐)은 5천 명의 군사로 오(吳)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5천 결사대를 모아놓고 한 말이다. 역시 [삼국사기] 열전의 ‘계백’에 나온다. 비장한 결의를 보이는 대목이지만, 구천의 5천이니 오의 70만은 한 번에 맞붙어 싸운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다.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후에 기사회생하여 오를 멸망시킨 월이기에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신라를 적대할 수 없겠구나. 소년조차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떠하겠는가.”
관창이 단신으로 쳐들어와 붙잡혔을 때 그의 투구를 벗겨보며 한 말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관창’에 나온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장함 그 자체이다. 그리고 상황은 갈수록 어두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