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지청천

문성식 2010. 10. 4. 15:46

지청천 장군은 배재학당과 한국무관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군사인재였다. 3.1운동 발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이후 일제의 독립군 말살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서로군정서를 지휘하며 일군과의 교전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되면서,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화랑정신 구현한 문무겸전의 참 군인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 1888. 2. 15∼1957. 1. 15)장군은 독립된 조국의 품에서 눈을 감기까지 평생을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생활한 참 군인이었다. 또한 광복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정신까지도 이미 염두에 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화랑도이기도 하였다. 장군은 1888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나 5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랐다. 장군의 어머니는 장군이 8세 때 장군은 일본인에게 30전짜리 동전을 받자, 자기 힘으로 벌지 않고 얻은 돈은 떳떳하지 못하며 더욱이 나라를 침노하는 천한 일본인의 돈은 받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을 만큼 올곧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한다. 후일 장군의 행보에서 보여주는 강직하고 곧은 인품은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장군은 서당을 거쳐 지석영 선생의 영향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고. 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청년회 활동에 관련하면서 점차 민족의식에 눈떠가기 시작한다. 토론회에서 "우리 청년에게 총을 달라"고 토로했을 만큼 혈기 방장했던 장군은 이후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일찍이 자신의 행로를 잡아갔다.


 

그러나 1907년 일제의 한국군대 강제해산을 겪으면서 힘의 부족을 통감한 장군은 훗날 더욱 조직적인 항쟁을 기약하며 신문물을 배운 것을 결심하고 관비(官費)로 일본유학을 떠나게 된다. 일본에서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청도 전투에서 참가하여 실전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실전 경험은 이후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백분 활용할 수 있었으니 일제에게 그대로 갚은 꼴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부임, 독립군 양성을 위해 혼신을 다하다

1919년에 이르러 그 동안 억눌렸던 한민족의 울분이 3·1독립운동의 함성으로 일시에 폭발하자 장군도 드디어 기다리던 조국광복운동의 전선에 나섰다. 그 해 일본군을 탈출, 만주 봉천성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당시까지 사용하던 석교라는 이름도 버리고 새로이 지청천이라고 개명하였으니 이때가 장군이 일생에는 둘도 없는 전환기였다. 한편 봉천성에는 이미 1910년대부터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모여 한족회를 조직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때마침 독립군 양성을 위해 근대적 군사지식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던 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로서는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장군의 합류가 커다란 용기와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장을 거쳐 교장을 맡아 광복투쟁의 간성이 될 독립군의 양성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개교식에서 행한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라는 연설은 당시 독립군 모두의 의지를 대변한 것이었다.

 

앞줄 가운데가 지청천 장군.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엄항섭 선생, 맨 오른쪽 끝이 이범석 장군.

 

 

그러나 독립운동의 전선이 공고해질수록 일제의 탄압도 극심해져 갔다. 일제는 1920년 독립군 탄압을 위해 대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독립군을 압살하려 하였다. 당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축을 이룬 서로군정서군을 이끌던 장군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합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여단장을 맡아 군세력를 통합하였다. 이어서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해 군단을 인솔하며 추격하는 일본군과 여러 차례의 전투를 벌였고, 전투 중 노령에 있는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장군은 독립군 부대를 다시 고려혁명군단으로 개편하는 한편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 교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하고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요에 의한 소련정부의 배신으로 인해 독립군은 소련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장군은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임시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형집행 일보직전에 석방되는 등, 망국군(亡國軍)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중국 동삼성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 혁혁한 전과

구사일생으로 당시 동삼성으로 돌아온 장군은 이후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독립운동세력의 강화에 힘쓰다가 1924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어 국내 진격전을 지휘, 일경주재소를 습격하여 소각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7월에는 동삼성 길림에서 홍진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편성, 총사령관이 되어 동삼성 일대를 누비며 독립전쟁을 계속하였다. 다음해 1931년 9월, 일제는 중국침략의 마수를 뻗쳐 만주사변을 도발하였고, 장군은 중국군과 합세하여 한중연합군을 결성, 쌍성보, 경박호, 동경성, 사도하자, 대전자령 등 만주 각지에서 일제 침략군과 전투를 벌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대전자령전투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와 함께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호쾌한 대첩으로서 일본군 반총(飯塚) 연대를 기습,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하고 군용물자를 20마차 분량이나 노획하는 등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장군은 동녕 전투에서 중국 구국군 군단장인 오의성의 배신으로 일본군에 패하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후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하여 김구 선생의 주선에 의해 낙양군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며 다시금 독립전쟁의 전위에 나설 독립군의 양성에 노력을 경주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활동

김구 주석 입회 하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임명장을 받고 있는 장군.


한편1937년 일제가 다시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무장군대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이에 장군은 임시정부 합류,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를 독립전쟁의 구심체로 엮어내는 데 힘썼으며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고 총사령관을 맡아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되었다. 광복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외에도 대적선전, 포로심문, 선전전단 작성, 암호문 해독 등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약을 벌였다.

 

8·15광복은 결코 우연도 행운도 아니었다. 좌절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독립에의 열망을 실천해간 유명 무명의 수많은 선열들이 이룩한 당연한 결과였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 민족은 한시도 일제에 대한 투쟁을 쉬지 않았고 지청천 장군은 바로 그 투쟁의 선두요 최전선에서 민족의 발걸음을 재촉해 왔다.

 

그러나 광복된 조국의 앞길도 평탄하지만은 않아 남한에 지주한 미군의 반대로 광복군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여야 했고 장군은 1946년 4월 28일, 피와 땀과 고난의 힘으로 이룩한 독립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 할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으로 대동청년단을 결성, 조국재건에 힘쓰다가 1957년 1월 15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운명하기까지도 바로 서지 못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독립을 위해 산화해간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장군의 생애는 오직 민족에 대한 사랑과 충정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지청천 장군의 귀국환영기념 사진. 사진 아래쪽 가운데가 장군.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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