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당채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이 집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키우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 선조 19년(1586)에 지었으며 하회마을 부용대 동쪽 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크게 문간채, 안채, 별당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따로 떨어져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북안(北岸) 부용대(芙蓉臺)의 동하(東下)에 위치한다. 대하(臺下)의 강류(江流)는 여기서 심연(深淵)을 이루어 마을에서는 옥소(玉沼)라 부르기도 한다. 옥연(玉淵)의 유래를 대략 짐작케하는 강류이다.

5171.jpg 이 정(亭)은 일명 정사(精舍)라고도 하는데 역시 서애(西厓) 만년(晩年)의 별서(別墅)인 셈이다. 소전(所傳)에 서애 45세시의 병건이라 하며 밀접하게 지내던 탄홍승(誕弘僧)의 원력(願力)으로 이룩되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서애는 강의 남안에 원지정사(遠志精舍)를 지었고 또 서북안에는 빈연정사(賓淵精舍)를 지은 일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마을에 위치해 있어 마땅치 않았으므로 다시 자리를 옮겨 거듭 삼건(三建)을 한 셈이다.

주위 승구(勝區)와 큰 강으로 마을과 떨어져 있어 정사다운 지형적 요건을 갖춘 곳이라고 하겠다. 이곳 또한 넓은 대(臺)를 이루며 여러채의 집을 지어 앞서 지었던 원지정사나 빈연정사(賓淵精舍)와는 그 큰 규모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동쪽에 6간의 일자대문채를 두었고 바로 一자형 안채를 동향해서 앉혔는데 안채는 부엌을 한가운데에 두고 그 양편에 방을 두어 이 지역에 전래하는 민가의 한 기본형인 도투마리 집과 규모를 같이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서당으로서의 정사는 별당이라 불리는 집 한채와 사랑채라 불리는 또 한채의 집이라고 하겠는데 이들 옥사(屋舍)의 구성을 보면 대략 대문, 안채, 사랑채 그리고 별당을 둔 격이 되었으므로 여염 대가(大家)의 옥사 배치를 재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랑채까지는 많은 출입8400.jpg 자가 있는 것이 상례이므로 서애가 진정 정사답게 이용한 집은 별당채가 아니었을까 한다. 문중 자제의 교육과 내객과의 담론(談論) 등 전체적으로는 서당적 분위기였을 것이나 그 중에 참으로 정사의 위치는 별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채는 4간 ×2간반의 규모로 제일 규모가 큰집이다. 이중 4간은 대청이고 전면에 분합들문을 달았으며 툇마루를 두었다.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2간의 온돌방이 있고 각기 대청을 향하여 4분합들문을 설비하였고 전후에도 띠살분합문호를 내었다. 별당채는 3간 ×2간의 제일 규모가 작은 집이다. 서편에 2간 ×1간반 크기의 온돌을 두고 동쪽에 2간의 청을 두었으며 온돌방 앞에는 전퇴를 두었다. 이들은 모두 납도리, 방주(方柱),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세집사이 정중(庭中)은 방형화단(方形花壇)이고 정변(庭邊)도 역시 장방형화단(長方形花壇)이다.

정변 주위에 노수(老樹)가 울울(鬱鬱)한 것은 원래의 자연이며 정사의 경개(景槪)를 한층 돋우어 주고 있다. 서애(유성룡(柳成龍))가 이곳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다고 하는 소전(所傳)은 이곳이 서애만년의 정사였음을 더욱 확신케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