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문성식 2011. 2. 11. 23:48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6]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지금도 성체대회 마크 보면 감동 살아나
 
 
<사진설명>
"찬미예수!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의도 광장에 마련된 장엄미사 제단에 올라가 한국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85년말, 주교들과 함께 사도좌 정기방문(Ad Limina)차 로마에 갔을 때다. 당시 톰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이 난데없이 세계성체대회 얘기를 꺼냈다.
 
"교황청에서 89년 세계성체대회 개최지를 논의했는데 의견이 서울로 좁혀졌습니다."
"성체대회라뇨? 작년에 200주년 신앙대회를 열었는데 또 무슨 행사를 해요."
"… 아무튼 롯씨 추기경(세계성체대회위원장)이 한번 만나자고 할 겁니다."
 
덜컥 겁부터 났다. 200주년 신앙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밤낮없이 고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주교들에게 성체대회 운을 슬쩍 띄어보았는데 모두 "하느님 은총"이라며 기뻐했다.
 
그래서 "어차피 준비는 서울에서 떠맡는데…. 주교님들이 한번 해보세요. 그게 얼마나 힘든지."라며 볼멘 소리로 불평(?)을 했다.
 
로마에서 롯씨 추기경을 슬금슬금 피해 다녔는데 결국은 마주쳤다. "굳이 아시아 대륙에서 열어야 한다면 싱가포르가 어떻겠느냐?"면서 다른 나라에 짐을 떠넘기려고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서울 개최지 선정 배경은 롯씨 추기경이 전세계 주교회의에 보낸 공문에 잘 나타나 있다.
 
"젊고 활기차고 선교열이 있는 한국교회가 차기 세계성체대회 준비에 임하기로 한 것은 큰 기쁨입니다. 한국 1만명 순교자가 피로써 증거한 그리스도 신앙을 온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사실 '가톨릭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그 나라에 영광이자 축복이다. 특히 한국교회 성장을 보여줄 수 있어 위상도 한결 높아진다.
 
귀국해서 사제와 신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또 한번 희생을 치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희생을 잊지 않으시고 갚아줄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교회봉사라는 게 한번 해본 사람에게 또 돌아가고 고생하는 사람 따로, 티내는 사람 따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체대회 얘기를 듣는 순간 '어이쿠! 또 죽었구나'라고 한숨을 쉰 사람이 여러명 있었을 게다. 특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시피하면서 준비한 실무책임 신부들과 대회 준비에 거액을 희사한 독지가들의 노고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성체대회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로 정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평화'는 남북이 갈라진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가 갈망하는 화두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분이 주시는 참 평화를 얻어 온누리에 전파할 수 있는가? 그 답을 성체의 신비 안에서 깨닫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그렇게 정했다.
 
10월 4일부터 닷새 동안 열린 성체대회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한평생 평화를 위해 헌신한 브라질의 헬더 카라마 대주교님이 오셔서 '참 평화의 길'에 대해 감동적 강연을 해주시고, 타종교인들이 종교의 벽을 허물고 한마음으로 평화를 기원했다. 올림픽공원내 여러 경기장에서 세미나, 참회예절, 철야기도회, 문화공연 등이 잇따라 열렸는데 준비를 잘 한 덕에 모두 순조롭게, 그리고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교황님 방한이었다. 200주년 신앙대회(84년)에 이어 두번째 방한이었는데 교황님은 7일 서울공항에 내려 우리말로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 힘모아 참 평화를 이룩합시다"라는 말로 도착성명을 마치셨다.
 
젊은이들은 교황님을 모시고 성찬제를 열었는데 미사 봉헌물 중에 최루탄과 화염병이 성서 위에 놓인 청동 조형물이 있었다. 갈등과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의지표현이었다. 교황님은 그걸 받아드시고 "매우 훌륭한 봉헌물"이라며 극찬하셨다.
 
8일 여의도 광장에서 봉헌된 장엄미사는 한폭의 그림 같았다. 영성체 시간에는 나도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양산을 받쳐들고 성합을 든 신부들을 따라 신자석으로 흩어지자 제단에서는 "원더풀(Wonderful)" 탄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성체대회 직후 로마에 갔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성체대회가 매우 아름다웠다"는 칭찬이었다. 교황 해외순방 때마다 동행하는 수행팀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교황님을 모시고 수십개국을 다닌 우리가 '아름다운 나라(행사) 베스트 3'를 뽑아 놓았다. 1위는 교황님께서 취임 직후 방문하신 고국 폴란드다. 2위는 84년 한국 200주년 신앙대회, 그 다음은 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대회 정신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에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용어가 있다. '야외에서 열리는 설법의 자리'라는 좋은 의미이다. 성체대회도 가톨릭식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대회 정신을 실천하지 않으면 '시끌벅적한 소란'이라는 뜻의 변질된 야단법석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평화는 내가 남에게 '밥'이 되어줄 때 이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주신 것도 부족해 십자가 죽음을 자처하시면서까지 우리에게 밥이 되어 주셨다.
 
우리가 그분처럼 서로 밥이 되어주는 삶, 먹는 게 아니라 먹히는 삶, 남들에게 내어주기 위해 부숴지고 쪼개지고 나눠지는 빵(성체)과 같은 삶을 살면 평화는 저절로 이뤄진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인 것입니다."(1고린 10, 17)라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이런 성체대회 정신에 따라 태동한 것이 한마음한몸운동이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남에게 밥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들의 정성을 모아 지금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국내외 원조 및 지원액이 지금까지 약 110억원에 달한다.
 
나도 이에 동참하고 싶어 안구(眼球) 각막 기증서에 서명했다. 명동에 헌혈차가 왔길래 헌혈을 하려고 들어가니까 간호사가 "헌혈 이전에 수혈부터해야 겠다"면서 돌려보냈다.
 
요즘도 세계성체대회 마크가 붙어있는 차를 가끔 본다. 그때마다 성체대회의 감동이 살아난다.
 
[평화신문, 제779호(2004년 6월 27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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