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8] 문민정부가 가져다 준 여유
"이젠 정권과 대립하지 않겠구나" 안도 한숨
<사진설명>
1993년 여름휴가를 이용해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고 있는 김 추기경.
1992년 12월말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 인사차 찾아왔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다른 후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다를 바 없습니다."
문민통치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 정말 기뻤다. 선거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아~ 이젠 목소리 높혀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0년~80년대에 시국관련 발언을 자주 해서인지 어떤 사람은 내가 정치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입버릇처럼 중얼거린 말이 "성직자가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라는 것이었다.
모처럼 마음이 홀가분했다. 근심이 깊을 때는 TV도 눈에 안 들어오더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여느 남자들처럼 스포츠 중계방송을 좋아한다. 우리나라 축구팀 승리에 감격한 나머지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따라 부른 적이 있다.
외국에서 열린 축구대회로 기억한다. 꽤늦은 밤에 라디오에서 경기를 중계방송해주었는데 우리나라 대표팀이 막판에 극적으로 승리했다. 경기가 끝났는데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마침 방송종료 애국가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벽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남들 다 자는 그 깊은 밤에 혼자서 무슨 짓(?)이란 말인가. 누가 내 모습을 봤다면 실성한 줄 알고 기겁을 했을 게다.
그런데 내게 스포츠 경기 징크스가 있는 것 같다. 국민적 관심이 쏠린 경기라서 만사를 제쳐두고 TV 앞에 앉아 응원하면 번번이 패한다. 그래서 꼭 이겨야 될 경기일 것 같으면 도중에 TV를 끄기도 했다. 내가 안 보고 있으면 지다가도 이기는 경기가 여러번 있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영화도 좋아하는 편이다. 주교가 된 뒤부터는 TV '주말의 명화'를 주로 보는 편이었지만 신부 시절에는 극장엘 자주 갔다. 난 이상하게 슬플 때는 눈물이 안 나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난다. '주말의 명화'를 보면서도 몇번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특히 성녀 베르나데타(1844~1879)를 다룬 영화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프랑스 루르드 태생인 베르나데타는 성모님 발현을 9번이나 목격한 뒤 수녀가 된 분이다. 루르드 성모님이 그에게 "너는 나를 만났기 때문에 현세에서 많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네가 바라는 행복은 하늘에서 누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때 무척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에 현세에서 고통을 겪는다는 말씀이 무뚝뚝한 나를 울렸다.
'쉰들러 리스트' '포레스트 검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같은 영화도 봤다. 한결같이 감명 깊은 영화였는데 운 좋게도 시사회에 초대받아 공짜로 봤다. 공짜 영화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사람들이 내게 취미를 물어올 때마다 곤혹스럽다. 특별한 취미가 없다. 재주나 잡기(雜技)가 어지간히 없는 사람이다.
짬이 날 때마다 테니스를 하기는 했다. 조금이나마 할 줄 아는 스포츠가 테니스다. 그런데 그나마도 87년 상계동과 양평동 철거민들이 교구청 테니스장 옆 빈터(현 교구청 별관 뒤)로 집단이주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은 그곳에 대형 천막을 치고 반년 가까이 생존권 투쟁을 벌였다.
테니스를 아무리 좋아하기로서니 어떻게 그들 옆에서 테니스를 즐길 수 있겠는가. 철거민들이 새 보금자리를 구해 떠났지만 운동을 다시 하려니까 힘이 들어서 단념했다.
등산에는 제법 재미를 붙였다. 지금은 관절염 때문에 힘들지만 은퇴 전까지 북한산에 자주 올라갔다. 서울 도심에 그런 아름다운 산이 있는 건 축복이다. 설악산 대청봉도 두번 다녀왔는데 한번은 비선대까지 내려오는데 10시간이나 걸렸다. 서울 근교 산에 다니면서 훈련을 한다고 했는데도 무척 힘들었다.
요즘 스포츠 레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나라면 등산을 권하고 싶다. 산은 사람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사람(人)이 산(山)에 오르면 신선(仙)이 되고, 계곡(谷) 아래로 내려오면 속(俗)이 된다고 한다.
산에 가면 가끔 재미난 헤프닝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등산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 쓴 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지나간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라는 표정이다. 어떤 사람은 "김수환 추기경을 많이 닮았네요"라며 말을 건다. 그럴 때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저도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라며 시치미를 뚝 뗀다. 대부분 알아 보기는 하지만 정말 닮은 사람인 줄 알고 그냥 돌아서는 등산객도 있다.
나를 진짜 잘 알아보는 사람은 어느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는 어디서건 내가 눈에 띄기만 하면 달려와서 껴안았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알아 보니까 신부가 되지 못한 내 소신학교 친구의 모친이었다. 아들이 신부가 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는지 신부들, 특히 나를 보면 무작정 껴안는 것이었다. 그걸 안 뒤부터 할머니가 안기면 나도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러면 금방 물러났다.
그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나를 몇십년 동안 따라다닌 할머니가 한분 있었다. 흔히 말하는 '스토커'인데 교구청 신부들은 물론 주교관에 몇번 출입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마리아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하루종일 교구청 1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어딜 가려고 하면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서고, 어딜 갔다가 들어오면 같이 들어가겠다고 조르는 통에 어지간히 애를 먹었다. 마리아 할머니는 정신이상자였는데 겉보기에는 너무나 멀쩡했다. 할머니가 나오지 않은 날이면 주위 사람들이 "오늘은 애인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놀려댔을 정도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내 전임자 윤공희 대주교님과 노기남 대주교님도 똑같이 따라다녔다. 내가 교구장직에 취임해서 눈길도 안주니까 할머니가 "얼굴도 못생긴 게 아는 척도 안한다"고 불평한다고 누군가 내게 전해 주었다.
속으로 '못생겼다고? 옳거니, 잘 됐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자꾸 보니까 잘 생겼는지 주교관에 출근하다시피했다.
[평화신문, 제782호(2004년 7월 18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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