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2] '삭발례' 감동 사제수품 때보다 커
공베르 교수신부님 금경축날 전쟁 터져
<사진설명>
1950년 4월 대신학교 교정에 모인 김수환 추기경의 소신학교 동창들. 앞줄 왼쪽부터 신종호 신부·김정진 신부·최석우 신부, 뒷줄 왼쪽부터 김 추기경, 한사람 건너 김재덕 신부·최석호 신부·김영일 신부·최익철 신부·지학순 신부. 젊은 신부들이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1947년 9월 서울 혜화동 신학교 교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본 유학 기간의 공백 때문에 후배들과 함께 공부해야 했다. 내가 소신학교 5학년때 1학년에 갓 입학한 후배들이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또래도 더러 섞여 있었다.
내 소신학교 입학 동기들은 그 해에 벌써 사제품을 받았다. 동기라 하더라도 신부와 신학생 신분은 천양지차(天壤之差)라 착잡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남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다. 유학과 학병시절에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새 친구들이 모여들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남들에게 얘기를 쉽게 꺼내는 편이었던 것 같다. 10개비가 든 담배 한갑을 다 피워가면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담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바로 그날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담배를 배워보려고 했지만 몇 모금 빨고 나면 머리가 아파 그만두곤 했다. 그런데 전쟁터에 나가있는 학도병에게 들려온 해방 소식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그날 입에 문 담배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명동성당이 조용한 날이 없던 1970년대는 하루에 두갑까지 피웠는데 1984년 교황님이 한국에 다녀가신 그 해 가을에 완전히 끊었다. 요즘 금연열풍이 불어 담배를 끊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100% 확실한 금연비결(?)을 공개하겠다.
심지어 손을 물어 뜯으면서 분심을 쫓는 친구도 있었다. 평양 출신의 서운석 신부는 성체조배하는 모습이 얼마나 경건했던지 마음 속으로 '기도를 가장 잘 하는 신학생'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서 신부와 충남 공세리 출신의 강만수 신부 등 몇 명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신학생들이 성서 다음으로 애독한 것이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n of Christ)이라는 영신지도서였다. 제목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거룩한 모범을 제시한 그 책을 옆에 끼고 살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를 썼다.
신학교 생활 중 삭발례(削髮禮)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삭발례란 세속을 끊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를 깎고 수단을 착용하는 예식인데 성직 입문의 첫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예식이다. 스님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듯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 첫 관문을 통과한 것뿐인데 그날의 기쁨은 사제수품 때보다 오히려 더 컸던 것 같다.
하느님이 그동안 내게 주신 영적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날 예식의 복음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말씀 줄거리는 "야훼 하느님은 나의 유산이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있다 해도 하느님이 계시는 한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내가 차지할 수 있는 몫처럼 느껴졌다.
교정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신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신학교 울타리 밖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치인과 국민들이 좌우로 갈리어 극한 이념대결을 벌이고, 곳곳에서 폭력적 투쟁을 일삼았다.
많은 지식인들이 좌익계열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일본 상지대학 선배들 중에도 적지 않은 수가 좌익단체에서 비중있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함경도 출신의 유학 동기를 서울역 앞에서 만난 일이 있는데 그 친구도 좌익에 가담한 듯했다. 그 혼란스런 이념대결을 지켜보는 동안 내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 신학생이 아니었더라면 좌익쪽으로 기울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우익 성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 입장은 중립이었고, 우리 신학생들 역시 그러했다. 일반 대학교수로 있던 한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학생들이 교수님 입장은 뭐고, 가톨릭 입장은 뭡니까 하고 자주 물어봐.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좌익과 우익 중간에 하느님당(黨)이 있는데 난 그 당원이다. 하느님당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우는 게 아니라 하늘로 곧장 올라간다'고 대답하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답(名答)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가 만일 하느님당 당원이 아니었더라면 이념투쟁의 한복판에서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1950년 6월25일은 신학교 교수인 공 베르(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의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 날이었다. 내가 총급장(총학생회장)인데다 공 신부님은 소신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터라 학생들을 동원해서 금경축 행사를 정성껏 준비했다.
그날 금경축 행사를 다 치를 때까지도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의정부 방면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청량리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느니, 미아리 고개까지 들이닥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조국 광복 5년 만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다니, 그리고 우리 국군이 그토록 힘없이 밀리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국군들이 신학교 뒷편 언덕배기 성터에 포를 설치하는 것을 보고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도 신학생들은 27일 저녁까지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식당에 저녁밥을 준비해 놓았지만 주위가 뒤숭숭해서 어느 누구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수신부님 같은 웃어른으로부터 어떻게 행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지도 않았다. 사태 추이를 종잡을 수 없는 건 신부님이나 신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부터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단 명동성당으로 가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총급장인 내가 학생들을 통솔해야 했으나 나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평화신문, 제735호(2003년 8월 3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