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4] 사제로 태어나다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에 사제품 받아
<사진설명>
사제품을 받고 69세 어머니와 기념촬영을 했다. 주름이 깊게 패인 어머니는 계산동성당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막내아들이 사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셨다.
1951년 9월15일. 함께 공부하던 정하권(현 마산교구 몬시뇰)과 사제수품일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이 날로 잡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잉태해 낳으시고 수난과 부활을 지켜본 성모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걸은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사제의 길 아니겠는가.
사제생활의 모토로 삼고 싶은 성구(聖句)를 골라 쪽상본에 새겨넣어야 했는데 난 고심 끝에 시편 139장에 있는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란 구절을 선택하고 싶었다.
하늘 저 높이 올라가도, 땅밑에 내려가도 거기에 계시는 하느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도 당신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어주시는 분. 내가 그런 하느님을 떠나 어디로 도망칠 것이며, 설사 도망친다 한들 한순간이라도 편히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시인이신 최민순 신부님(1975년 선종)이 마침 대구에 내려오셨길래 내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한편의 아름다운 시같다"며 좋아하셨다.
그러나 홀로 생각에 잠겨있으려니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과연 한 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결국 시편 51장에서 찾아낸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
52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 같은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요즘 선후배 사제들의 임종을 지켜보거나 부고(訃告)를 접할 때마다 '나도 이제 머지않아 하느님 앞에 서겠지'라고 되뇌인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내가 하느님께 가면서 바칠 수 있는 기도는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지극하신 사랑으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 외에 떠오르는 게 없다.
사제서품식이 열린 날은 마침 음력 8월 보름이었다. 대구 계산동성당 마당에서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은 유달리 맑고 높았다. 쪽빛 창공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제품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대구교구 신부님들과 교우들이 서품식장을 가득 메웠다. 서품식 중간쯤 이르러 성인호칭기도가 울려 퍼졌다. 제단 앞 바닥에 엎드려서 하느님께 이렇게 속삭였다.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13살 나이에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되었다.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때로는 갈등과 유혹에 심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린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忍苦)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그때는 사제수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곧바로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막상 성당에 도착해보니 밥 끓여먹을 솥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 한달 전에 떠난 전임 신부님이 빗자루 하나 남겨놓지 않고 비품을 모두 가져가신 것이었다.
임시방편으로 며칠 동안 여관에 묵으면서 신자들이 해다주는 밥을 얻어 먹었다. 그리고 나서 인근 고아원에 부탁해 2달 가량 밥을 대먹었지만 그쪽에서도 힘이 든지 하루 빨리 딴살림을 차리라는 눈치를 줬다. 하는 수 없이 성당 회장님께 얘기했더니 그 분이 이집저집 돌아다니면서 숫가락, 젓가락, 밥그릇 등을 구해다 주었다. 돈을 주고 장만한 살림살이는 냄비 한개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철칙처럼 내려주신 '제1계명'을 첫 임지에서부터 거스르는 일이 발생했다. 신학생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첫째 계명은 "젊은 여자를 식모(요즘의 식복사)로 둬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었는데 회장님이 구해온 식모가 하필이면 젊은 여성이었다. 나는 어머니 핑계를 대가면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회장님은 "그럼 이 사람밖에 없는 걸 어떡하죠? 어머니 뜻이 그러하시더라도 저를 믿고 쓰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돌이켜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그때는 왜 그토록 곤혹스럽던지….
첫 임지에서 주민들의 가난에 관심이 쏠렸다. 갓 태어난 신부이다 보니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열정이 더 뜨거웠는지 모르겠다. 당시 안동은 전화(戰禍)로 인해 성한 집보다 불타버린 집이 더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두해 연속 흉년이 들어 주민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고 있었다.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나무 껍질을 벗겨서 가루를 내어 죽을 끓여먹고 사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교구에서 사제생활비를 보내줘 수중에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해봐야 미사예물인데 그것도 한국 신자들이 바치는 것이 아니고 서양교회 신자들이 미사예물 지향으로 미사 한대당 1달러씩 보내주는 것을 받는 것이었다.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는 주민들을 그 돈으로 돕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
며칠을 궁리한 끝에 묘안이 떠올랐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편지를 들고 부산에 계신 안 제오르지오 주교님(메리놀외방전교회)을 찾아갔다. 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으로 와 계신 그분께 도움을 청하면 하다못해 밀가루라도 얻어갖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대박'이 그곳에서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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