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전쟁의 혼란 속으로

문성식 2011. 2. 11. 03:43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3] 전쟁의 혼란 속으로
 
여권 수속 밟던 로마 유학 '물거품'
 
 
<사진설명>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을 피하기 위해 화물열차 지붕에 오른 피란민들. 신학교 총급장이었던 김 추기경도 소신학생들을 데리고 화물열차 지붕에 매달려 피난했다.
 
 
27일 밤 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밀고 내려왔다. 신학생을 대표하는 총급장으로서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신학생들과 명동성당으로 뛰었다.
 
명동성당도 우왕좌왕하고 대책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난 몇명과 구천우 신부님이 계시는 삼각지성당으로 가서 잠자리를 얻었다.
 
얼마쯤 눈을 붙였을까…. 요란한 폭발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인민군이 시내까지 들어왔다"고 소리쳤다. 부랴부랴 밖에 나가보니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이른 새벽 거리에 피란민들과 차량들이 넘쳐났다. 한강다리는 이미 새벽 2시경에 끊어졌다.
 
공포에 휩싸인 피란민들은 거대한 물결이 출렁이듯 왼쪽으로 밀렸다, 오른쪽으로 밀렸다 하면서 갈팡질팡했다. 북쪽으로 올라간 피란민들은 인민군이 위쪽 강나루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방향을 틀어 다시 내려왔다. 다행히 끊어지지 않은 철교가 하나 남아 있어서 그 다리를 건너 수원으로 갔다.
 
급히 서울을 빠져나온 신학생들은 수원성당에 모여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 다음날 신학생들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본당 신부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 후 나도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혼자 남아 훌쩍이고 있는 소신학생이 보였다. 난 그때 차(次)부제품 시절이라 어린 소신학생들과는 차이가 많이 났다.
 
깜짝 놀라서 "넌 왜 안 갔니? 고향이 어딘데?"라고 물으니 문산이라고 대답했다. 경남 진주에 문산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쪽 방향인 줄 알았더니 이미 인민군 수중에 들어간 경기도 문산이라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에 소신학생 한명을 데리고 다니다가 인파 속에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터라 그 꼬마 손을 꼭잡고 수원역으로 나갔다. 그 꼬마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다.
 
수원역에 도착했더니 뒤쳐진 소신학생 너댓명이 모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남쪽으로 내려가는 화물열차 지붕에 올라탈 수 있었다.
 
"너희들 졸면 큰일난다. 여기서 졸다 떨어지면 죽는단말야. 조는 사람이 있으면 옆 사람이 꼬집어서 깨워야 한다. 알았지!"
"예."
 
소신학생들을 데리고 오른 피란길이라 걱정은 됐지만 다행히 큰 어려움 없이 대전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주머니를 톡톡 털어 밥 한끼씩 사먹은 후 다시 조를 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난 소신학생 최창무와 함께 대구까지 내려갔다.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할 비극이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쓰러지고, 교회도 큰 피해를 당했다. 내 은사인 공베르 신부님을 포함해 서울에 남아있던 상당수 성직자들이 인민군에 체포돼 목숨을 잃었는가하면 외방선교회 소속 서양 신부님들은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끌려갔다.
 
나 역시 소신학교 동기생 4명을 전쟁통에 잃었다. 전남 출신의 신학생 2명은 고향으로 피란을 내려가다 공산당에 부역을 했는지, 아니면 인민재판을 받았는지 돌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동족끼리 총을 쏘고 피를 흘리는 비극이었기에 더 슬프고 참담했다.
 
사실 난 로마유학을 가기 위해 6.25 전쟁 발발 3일전부터 여권수속을 밟고 있었다. 결국 유학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5년 후배지만 대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정하권(현 마산교구 몬시뇰)과 최덕홍 대구교구장님 밑에서 부족한 신학공부를 했다. 아무리 후방이라지만 전쟁통에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을 듣고 있노라면 '이러다 나라가 공산화되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 나라가 공산당 손에 넘어가면 가톨릭교회는 박해를 받다 무너지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미 북한교회가 초토화되고, 많은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그때 내 생각은 '이 전쟁에서 공산당이 이기면 그들 손에 죽느니 차라리 산에 들어가서 게릴라전을 벌이겠다'는데까지 미쳤다. 국가체제보다 민족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그때 내가 품었던 생각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신부 한명을 죽이는 것을 1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얘기가 있었다. 공산혁명 과정에서 가톨릭, 특히 인민들(신자들)의 영적 세계를 관장하는 신부를 위험천만한 반동세력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가톨릭을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생각했던지 스탈린은 1945년 얄타회담 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로마 교황은 도대체 몇개 사단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는 얘기도 있다.
 
부산 피란시절의 고단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영도에 서울교구 소속 신부와 신학생들을 위한 임시거처가 마련되었다. 신부와 수녀들은 혼란 속에서 미국이 보내준 밀가루와 의류품을 갖고 구호사업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몇몇 신부들은 포로수용소에 출입하기도 했다.
 
나도 어느 신부님 일을 잠깐 거드는 동안 범일동에서 부산역 방면으로 나갈 일이 자주 있었는데 차편을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럴 때면 수녀님들을 이용(?)했다.
 
수도복을 입은 수녀들이 부산 시내를 활주하는 미군 차량에게 태워달라고 손짓을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로만칼라를 한 신부들이 태워달라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미군들이 수녀들에게만큼은 최대한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급할 때는 수녀들을 앞세워 차를 세워놓고 우리가 슬쩍 뛰어오르곤 했다.
 
대구교구청 주교관에서 최덕홍 주교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하던 어느날, 주교님께서 나와 정하권을 불렀다.
 
"자네들도 이제 사제품을 받을 준비를 하게. 언제 사제품을 받으면 좋을지 자네들이 상의해서 날짜를 잡아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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