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경기 남양주시***한국 천주교 순교자 聖地 순례ㅡ조안면 능내리ㅡ마재성지, 다산기념관

문성식 2022. 4. 5. 10:28

한국 천주교 순교자 聖地ㅡ조안면 능내리ㅡ마재성지, 다산기념관




▲마재성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 터로 이름난 마재성지는 양수리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3km가다 왼쪽으로 그 입구가 나타난다. 마재의 정다산 성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생가 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지고 그 오른쪽은 약종이 살았으며 묘소가 있던 배알미리(拜謁尾里)가 된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다. 그러나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중 정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목민 심서", "경세 유표", "흠흠 신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 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진 것이다.


이 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불러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 유고(蔓川遺稿)"에서 "한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 중에 잃었던 신심을 되찾는다. 1811년에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정도였다.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 난 지 2-3년 뒤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는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히 들어 있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재성지 위치도


▲마재성지


▲마재성지


▲마재성지


▲마재성지


▲마재성지 내부


▲마재성지 내부


▲마재성지 내부


▲감실과 성모상


▲정약종 상


▲명례방


▲명례방 내부 전시물


▲명례방 내부 전시물


▲야외 제대


▲야외 제대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교리 연구나 가족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하였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


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우구스티노의 열심은 더욱 빛을 발하였다. 인근 지역의 신자들과 자주 교류하였으며, 몇몇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 받아들여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직접 교회 일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의 교리 지식은 교우들 가운데서 아주 뛰어나게 되었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고,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또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주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아우구스티노를 그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0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고향 인근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교회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자의 명단에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특히 박해 초기에 그의 책 상자가 관청에 압수되자, 조정에서는 즉시 그를 체포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체포 이튿 날부터 아우구스티노는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으며, 오로지 천주교 교리가 올바르다는 것만을 설명하는 데 노력하였다. “천주를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입니다.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박해자들은 아우구스티노를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는 오히려 박해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의 사형 선고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지 15일 만에 형장으로 정해진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사형수가 타는 수레에 올라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오.” 형장에 이르자 곧 참수형이 시작되었다.


이때 아우구스티노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천진암 정약종 묘


▲정약종 묘 이장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인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서대문에서 참수 당한후 그의 고향인 마재 가까운 웃배알미 검단산 기슭에 묻혔다가, 나중에 후손들에 의해 선산인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 앞산으로 이장한 뒤, 이 산이 팔리자 다시 그 주변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가 천진암 성역화에 따라 1981년 11월 1일 천진암 한국천주교회 창립성현 제위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사사리는 정약종의 시신이 이장되었던 곳이다. 조선 왕조에서는 "사학(邪擧)의 3대 괴수"라고 지칭했을 정도로 이들의 활동이 뛰어났던 것인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종(아오스딩)을 들 수 있다. 정약종은 실학자 정약용의 형으로 그의 가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문모 신부가 세운 명도회(明道會)의 초대회장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또한 그의 아내, 아들 정하상, 동정녀인 딸 등도 모두 순교하여 시성의 영예를 함께 누리고 있다. 정약종은 1801년 당시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겨레를 위하여 열렬하게 신앙을 증거한 초기 교회의 표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801년 2월 26일(양력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을 당하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그의 향리인 경기도 광주땅 배알미리에 매장되었다 한다. 그리고 정약종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이던 정약용이 사망하게 되자 정약용도 정약종의 묘소 부근에 매장되었다. 두 형제의 무덤과 관련하여서 특이한 구전이 그 마을에 전래되어 내려오고 있다. 즉 언젠가 구름다리형의 무지개가 두개의 묘 사이를 이어 훤한 광채를 오랫동안 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동리 인들은 대대로 이를 영광스러운 사실로 구전을 통하여 보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래 배알미리에 있던 정약종의 산소는 그 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 내곡(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3동 안골)으로 이장되었다.


순교자현양회에서는 1959년 4월 15일과 16일 이틀간에 걸쳐서 정약종의 묘소를 사사리로 이장하였다. 마재에서 거주하던 정약종의 후손들은 대개 박해를 피해 강원도로 피신해 있다가 100여년 전에 다시 조상의 고향 인근인 사사리로 이전하계 되었다(정덕진 신부 증언). 따라서 사사리에는 정약종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으므로. 그의 묘소를 좀더 정성을 들여 돌보기 위해 이곳에 새로운 안주지를 마련해 드리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의 묘소를 이장할 때 약간의 문제점이 있었다. 즉 문중에서 정약종외 묘소라고 하던 묘는 묘 형상을 완전히 갖추어 있기는 하였으나. 이장하기위해 묘를 파헤쳐 보니 그의 유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이와같이 명확한 유해는 나오지 않았으나 정씨 문중인들은 모두 그 묘가 정약종의 산소임을 거듭 말하였었고 또 약간의 흔적도 있었으므로 이를 정약종의 무덤으로 순교자현양회 전문위원들은 확증을 하고 이장하였던 것이다.


정약종의 묘소를 이장할 당시에도 특기할 만한 기상변화가 일어났다 한다. 즉 몇 십년을 두고 보지 못하던 비바람이 온 동리를 휘몰아쳐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만 사실을 본 정씨 문중인들은 정약종이 특별한 인물임을 하느님이 기상변화를 통하여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한다. (金有喆 채집) 그러나 정약종의 묘소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몇가지 문제점이 미해결 상태에 놓여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여러 문제점을 풀기 위하여 좀더 많은 검토 연구가 있어야 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확고한 과학적인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정씨 문중의 증언을 존중하여 사사리에 이장되어 있는 묘소가 정약종의 요소임을 일단은 수긍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장된 정약종의 묘소는 그 산(마을 사람들은 ‘앞산’이라 부름)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게 되자 1973년 5 월 10일 다시 그 부근에 있는 정씨의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참고 : '교회와 역사', 15호, 한국교회사연구소,1977) 마흔 둘 나이로 순교한 정약종의 시신은 마재 가까운 웃배알미 검단산 기슭에 묻혔다가,


나중에 후손들에 의해 선산인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 앞산으로 이장한 뒤, 이 산이 팔리자 다시 그 주변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가 천진암 성역화에 따라 1981년 11월 1일 천진암 한국천주교회 창립성현 제위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천진암으로 이장 되기전 사사리 정약종의 묘


▲천진암으로 이장 되기전 정약종의 묘 (안산시 상록구 사사3동 안골, 사사리)


▲천진암으로 이장 되기전 정약종의 묘 (안산시 상록구 사사3동 안골, 사사리)


▲십자가의 길 동산



▲야외제대 동산


▲야외제대 동산


▲칼 십자가와 성모상


▲칼 십자가


▲칼 십자가


▲성 모자상


▲순교현양, 십자고상


▲예수성심상


▲예수성심상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4 처 (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예수님 발

▲다산 정약용과 천주교


끈질기게 붙어 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다산은 질곡의 삶을 살아 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오늘날의 다산이 있게 된 것이다.


정조사후 중앙의 세도정치라는 혼탁한 정국 속에서 벼슬살이를 계속하였다면, 그저 그런 평범 한 선비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유사옥으로 인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하며 남긴 방대한 <여유당전서>는 그를 주자와 견주는,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 위대한 학자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다산학)는 “한국학의 보고”가 되었다. 다산의 일생은 자의든 타의든 천주교와의 연관성의 한 가 운데에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들 속에서 성장했다. 한국인으로서 북경에 가서 처음으로 서양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다산의 매형이다.


최초의 천주교리연구회장(明道會長) 으로서 순교한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은 다산의 셋째형이다. 진산사건으로 효수 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은 다산의 외사촌 형이고 백서(帛書)사건으로 능지처 참 당한 황사영(黃嗣永)은 정약현의 딸 즉, 다산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그의 고향 마재는 서양학문(西學)에 대한 관심이 서양의 신앙(西敎)으로 발 전하면서 피어린 순교의 역사를 배태한 “자궁”이었다.


◆다산과 광암 이벽과의 만남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다른 종교에 흥미를 갖고 심취하는 계층은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당한 집단이다. 일부가 나중에 배교(背敎)하였지만 당시 천주교를 믿는 중심 계 층은 노론중심의 국정에서 소외된 일부 남인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집단)였다.


1779년 겨울 권철신을 강장(講長)으로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가 열리고 이 중의 일부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1784년에는 한국천주교로 발전한다. 즉 1783년 늦가을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 세례를 받게 하는 동시에 천주교 서 적과 각종 성물을 구해 오도록 했다.


이승훈은 그의 부친 이동욱이 동짓날 중국에 가 는 사신인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데 수행했던 것이다. 이듬해 봄 이승훈이 북경 북당(北堂)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 과 성물을 갖고 귀국하자 이벽은 자신의 수표동 집을 임시 성당으로 정하고 선교활동 에 나선다.


다산도 이 무렵에 포교대상이었을 것이다. 큰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 로 오던 두미협의 배위에서 다산에게 처음으로 천주교를 소개한 사람은 8세 연상인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5)이다. 광암이라면 바로 한국천주교에서 창립성조 (創立聖祖)로 받드는 인물로서 큰형수의 동생이니 다산과는 사적으로 사돈간인 셈이 다.


다산은 그의 둘째형 약전과 함께 “일찍이 이벽을 따랐다(嘗從李壁)”는 기록을 할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냈고 서학과 천주교 서적을 읽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성균관 학생시절 <중용>에 대한 정조의 물음에 이벽과 상의하여 답안을 작성했 는데 정조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신해사옥 이후 다산의 입장


다산은 이벽과의 만남 이후 한동안 천주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여러 기록들을 종 합하면 다산은 젊은 한때 사 · 오년 동안은 마음으로 열중하였지만 1791년 진산사건 (辛亥邪獄) 이후에는 사설(邪說)로 여기고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 정약종이 신유년 옥사에서 1786년에야 비로소 천주교를 배웠다고 자백하였으니 다산도 아마 이 무렵부터 믿지 않았을까 한다.


1797년 정조가 정삼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임명하 자 반대파의 모함을 해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辨謗辭同副承旨疎)에서 처음 에는 서학, 즉 천문(天文) · 역상(歷象) · 수리(數理) · 농정(農政) · 수리(水利) 등에 매 혹을 느끼다 점차 천주교에 마음을 빼앗겨 성심으로 믿어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이라 는 세례명까지 받을 정도였으나 윤지충이 어머니의 죽음에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를 지냈다가 처형당한 신해년(1791년)의 사건이 있은 뒤로 허황되고 괴이하고 망령된 설이라 여기고 “마음을 끊었다.(遂絶意)”고 말하고 있다.


다른 기록에도 이와 같은 사실은 입증되고 있다. 신유년의(1801년)의 천주교 옥사 때 “천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못하면 무엇 하겠냐”고 할 정도로 다산을 죽이고자 혈안이 됐던 반 대파(공서파)로부터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약종의 일기와 서찰 덕분 이었다.


정약종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둘째형과 막내가 함께 배우려 하지 않 아서 한스럽다”는 구절이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 증해 주었다. 끌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제사를 폐하는 부분에 이르러 결국 천 주교에서 마음을 접은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 동안 예학, 특히 상례(喪禮)와 제례(祭 禮)에 대해 깊이 연구한다.


유배지 장기에서 <기해방례변>으로 시작된 그의 “禮”에 대한 연구는 50권의 <상례사전>, 12권의 <상례외편>, 9권의 <사례가식> 등으로 <여 유당전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꼭 읽어야 할 책을 열거하면서 <예기>를 포함시킨다.


뿐만 아니라 예에 관해 열심히 공부할 것을 부탁하며 <독례통고(讀禮通考)>라는 예에 관한 책을 보내주기도 한다. 천주교 때문에 다산이 겪어야 했던 순탄치 않았던 벼슬생활, 일가친척과 친구 들의 죽음, 18년의 유배생활과 17년의 미복권의 굴곡의 삶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오 늘의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게 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역경속에서도 정도를 포기하 지 않는 한 인간에게 역사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새삼 반추하게 된다.


▲다산문화거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는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 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가 여유당, 이백 년 세월의 흐름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다산의 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다산문화관이 있다. 한 걸음이면 뛰어 넘을 것 같은 여유당의 낮은 담장에는 허물없이 백성들의 기쁨 과 아픔을 함께하고자 했던 다산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다. 매년 10월 다산유적지에서 펼쳐지는 다산문화제는 다채로운 시민행사와 공연 등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축제의 한 마당으로 다산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문화적 시각으로 재조명, 우리 문화를 통해 다산 선생을 직접 체험하는 시민문화축제이다.


▲다산 정약용 상


다산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 과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菴), 열수 (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 (門巖逸人)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조 후기의 학자이다.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 경제 · 역리 · 지리 · 문학 · 철학 · 의학 · 교육학 · 군사학 ·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넘겼다. 18세기 후반 시작된 다산의 경학연구는 강진유배기에 본격화되어 1812년까지 육경(六 經)의 연구를 마치고 1814년까지 2년 동안에는 사서(四書)에 대한 저술을 완성한다.


소 학과 심경에 대한 연구가 있었던 1815년에 비로소 경학에 대한 연구를 일단락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경세학 관련 저술을 시작해 일표이서(一表二書)라는 불후의 명저 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지은 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다산 은 『육경과 사서로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함 이었으니 본과 말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다산의 경학 연구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귀향 후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의 이른바 경기학인들과 교유하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834년 이전의 상서에 대한 연구를 수정 · 보완한 <상서고훈>을 완성 한다.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 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한다.


한쪽은 이익과 유형원의 학풍(經世 致用)을 이어받고 다른 한쪽은 박제가 · 유득공 등 북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북 학(이용후생(利用厚生)을 섭취한 다산은 이들의 학문적 성과 위에서 “다산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를 만들어 낸다. 썩어가는 국가의 대들보를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괴는데 평생을 바 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 동안의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모진 고문으로 인 한 육신의 고통과 찾아오는 이 없는 유배지의 쓸쓸함을 밤을 새는 저술 작업으로 극복 한 다산이 가슴속에 붙들고 놓지 않는 말은 “한 사람만이라도 이 책의 값어치를 알아 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법 당시의 어두운 현실은 그를 시기하고 배척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한국학의 바다”로서 새롭게 부활하 고 있다


▲다산 정약용 상


◆고위관료에서 미관말직으로

다산은 평생을 따라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는 비서관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고위관료이던 다산은 천주교 문제 때문에 하루아침에 지방의 미관말 직으로 좌천된다.


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은둔하고 있다가 역시 천주교와 관련 된 옥사에 연루되어 한번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한번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한 개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건만, 다산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 려 책을 놓지 않으며 학문연구에 전념하는 학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성호와 퇴계의 학문 연구

2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고 ,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33세에는 예문관(별칭으로 翰林)과 함께 관리들의 선망의 대상인 옥당(玉堂), 즉 홍문관 교리 및 수찬의 벼슬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뒤이어 경기도 암행어사가 된 데 이어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으며 화성 축조공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거중기 를 발명했다. 이어 정조 19년(1795) 그는 34세의 나이로 벼슬의 꽃인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르며 중앙의 고위관료로서 승승장구 하였다.


하지만 그해 4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여 북악산 아래에서 선교하 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 신자들을 공격하는 서용보 · 이기경 · 홍낙안 등 공서파(攻西派)의 모함을 받아 7월에는 종6품의 충청도 홍주목 소재 금정도찰방(金井 道察訪)으로 좌천당했다.


품계가 한꺼번에 6등급이나 강등되는 수모를 겪고서 잘나가 는 중앙의 고위관료에서 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책으로 쫓겨간 것이다. 열다섯의 어린나이에 호조좌랑이 되어 한양으로 벼슬살이 간 아버지를 따라가 성호의 종손 이가환과 누이의 남편인 매형 이승훈 등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던 이 들을 만나 교유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던 다산은 부임지인 금정역에서 멀지 않은 온양 서암의 봉곡사에서 성호의 종손인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1735~1813), 종증손 이재위(李載威) 등 인근 성호의 후손 및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10일간 공자의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박학한 성호 선생님/ 百世의 스승으로 모시리라”하며 평소 흠모하던 성호 선생의 유고를 교정하였다.


“성호 선생이 남긴 글이 지금에 와 없어지 고 전하여지지 못함은 후학들의 허물입니다”하며 이삼환에게 편지를 보내 유고정리를 제의하고 모임을 주도하여 “다산학”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황의 문집인 <퇴계집>을 열심히 읽고 퇴계 학문의 깊은 이치를 조금 이나마 이해하였다.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은 이때의 공부내용을 기록한 저서이다. 억울한 좌천에 관리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한 채 기생을 옆에 두고 술로 세월을 보냈을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선생의 이런 자세는 지식인으 로서의 참모습이요, 2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에도 관리들의 좋은 귀감이 되 고 있다.


◆세 번의 유배길

다산은 평생에 세 번의 유배길을 떠난다. 하지만 한림(翰林), 즉 예문관의 검열이 되 는 과정에서 생긴 잡음으로 떠난 첫 번째 유배는 일주일이 채 못 되어 끝나기에 유배 라고 할 수도 없다.


천주교를 믿는 이는 역적의 형벌로 다스리겠다는 엄명에 다산의 형 약종이 천주교 관 문서와 물건 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다 발각된 이른바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촉 발된 신유박해에 그의 표현대로 “붉은 옷 죄수들이 길을 메울 정도”로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도 목숨을 겨우 부지한 다산은 “젊은이야 기다리면 만날 날도 있겠지만 노인 네야 누가 앞일을 누가 알겠나”하고 슬퍼하며 경상도 장기(지금의 경북 영일군)로 유 배를 떠난다.


처음에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힘들어 하였 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저술작업에 전념하게 된다. 그 결과 장기에서 다산은 상복문 제로 서인과 남인사이의 기해년의 예송을 다룬<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과 한자 발달 사에 관한 <삼창훈고(三倉訓詁)>, 그리고 한자의 자전류라 할 수 있는 <이아술(爾雅 述 )> 6권을 저술하였다.


의금부에서 받은 모진 고문이 가져다 준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궁벽한 산골에서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유배생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저술들은 불 행하게도 그 해 겨울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받는 경황 중에 분 실되어 오늘에 전하지 않고 있다.


“북쪽바람 눈 휘몰 듯이 나를 몰아 붙여/ 머나먼 남쪽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던졌구료“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음은 겨우 면하였지만 형 약전과 함께 유배길에 올라 1801년 음력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날, 유배지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 서회(客中書懷)”라는 시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뒤로하고 천리 먼 길을 걸어온 유배객을 기다리는 것은 매서운 겨울바람과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이 었다.


큰 독소로 여기고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상대조차 해 주 지 않았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내준 허름한 방 하나에 거처를 정한 다산 은 억울한 유배의 억눌린 심정을 잊고 이제야 학문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에 다산은 누추한 주막의 뒷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고 방대한 육경사 서 에 대한 저서의 시작으로 <예기(禮記)> 연구에 열중한다. “생각이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하게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厚重)하게 해야 하니 후중(厚重)하지 못하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유배지에서의 진정한 성인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고위관료가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궁벽한 곳에 유배오고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여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에서 의로움에 합당하도록 하겠다는 그의 다짐에 절로 고개가 숙여 지고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금욕적으로 살아가겠다 는 다산의 당당한 태도에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된다.


산수를 벗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임금에 대한 흠모 의 정을 노래한 연군가를 부르며 서울로부터의 해배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보통의 유 배객과는 달리 핍박받는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 바탕하여 “수기(修己)”로서의 육경사서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치인(治人)”으로서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라 할 수 있는 <경세유표>와 목민관이 지켜야 할 사항을 적어놓은 <목민심서>등을 저술한다. 죽기 2년 전인 일흔세살의 고령에도 유배시절 저술했던 상서(尙書 , 五經중 하나로 일명 書經)를 개정 · 보완했던 다산에게 우리는 참다운 지식인의 모습을 봇 수 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정말 알아주는 이가 있다 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 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다산 생가 여유당


▲다산 생가 여유당


▲다산 부부 묘


▲다산 부부 묘


▲다산기념관


▲기념관 내부


▲다산이 만든 거중기와 녹로


▲다산이 지은 경세유표



▲목민심서(書)


▲다산문화관


▲다산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