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경기 용인시***한국 천주교 聖地 순례ㅡ양지면 남곡리ㅡ골배마실(김대건 신부 성장지) 성지

문성식 2022. 4. 3. 12:11

한국 천주교 성지ㅡ용인시 양지면 남곡리ㅡ골배마실(김대건 신부 성장지) 성지




▲골배마실 성지


골배마실은 김제준 성인과 성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뫼를 떠나 정착한 골배마실은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1836년 이웃 은이 공소에서 세례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골배마실 성지 야외 제대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으로 알려졌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것은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인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金濟俊, 보명 濟麟, 1796~1839, 이냐시오) 성인과 모친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1739~1814, 비오)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珍山事件)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하였으며, 1805년 다시 붙잡혀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再福)이라는 아명(兒名, 어릴 때 이름)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지내다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金澤鉉, 宗元)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이었다.


한덕골로 내려오기 전에 이보다 더 험준한 인근의 광파리골에 살았고, 그 후 한덕골에서 다시 인접한 굴암(구람)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전해진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 일대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였다. 김대건 안드레아는 1836년 4월 이웃에 있는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1836년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9년 만인 1845년 10월 국내에 잠입한 김 신부는 비로소 자신이 자라던 골배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하였다. 귀국 후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하였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골배마실 성지


경기도 용인시 일대에는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된 성지가 많다. 미리내 성지를 비롯하여 한덕골, 은이공소, 골배마실까지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가 이곳 용인시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시절의 향취가 남아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옛날부터 신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김대건 신부의 집터가 있던 장소로 알려져 왔던 이곳은 1961년 양지 본당 5대 정원진 루가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골배마실 성지위치도


▲골배마실 성지 가는길


▲골배마실 성지 입구


지금 골배마실은 그 흔적이 없다. 다만 김 신부가 살던 집터만이 골프장(양지 컨트리 클럽) 한쪽에 보존돼 그의 석상과 제대, 초가집과 어머니 고씨의 모습을 새긴 부조(浮彫)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김대건이 어릴 적 손길이 닿았다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다른 나무들 사이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골배마실은 양지 골프장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골배마실 성지를 들어가려면 먼저 은이 성지의 사무실에 들러 성지의 열쇠번호(88990)를 알고 가거나 골배마실 성지 입구에 표시되어 있는 은이 성지 전화번호로 연락하여 열쇠번호를 확인한다.


은이 성지와 골배마실 성지는 은이 성지에 상주하는 전담신부가 함께 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성지 순례자들의 미사는 은이 성지에서만 봉헌한다.



▲골배마실 성지 안내문


▲골배마실 성지


▲골배마실 성지 표지석


▲골배마실 성지 표지석


▲김대건 신부 피난지 비석


▲김대건 신부 비석 뒷면 약력


▲골배마실 성지 야외제대


▲골배마실 성지(김대건 신부 생가터)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 생가 터 알림비석


골배마실은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것은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인 솔뫼에서 그는 증조부 김진후, 조부 김택현, 부친 김제준, 모친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에 전념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한다.


1805년 다시 붙잡힌 그는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순교한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성장한다.


그러다가 김진후의 둘째 아들이자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로 가득 찼지만 이는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아편 전쟁 때에는 마닐라로 피했다가 또다시 중국 땅 요동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한만(韓滿) 국경을 전전하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이 9년 만인 1845년이다.


그는 겨우 5개월을 머문 후 상해로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된다. 10월 해로를 택해 국내에 잠입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려서 자라던 골배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한다.


1814년 김진후로부터 시작돼 김대건 신부까지 30여 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올레길 신앙길- 수원교구 은이성지서 미리내성지까지 ‘삼덕’의 길

▲은이 성지서 미리내 성지 까지 순례여정 지도


신덕 · 망덕 · 애덕 고개 넘으며 성 김대건 목숨 건 여정 묵상

[여정] 은이성지 - 신덕고개 - 와우정사 - 망덕고개 - 한덕골 - 애덕고개 - 미리내성지(약 4시간 소요)


◆십자가의 길 14 처 (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