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순교聖地ㅡ이천시 모가면 어농3리ㅡ어농(於農) 순교자 현양성지
어농성지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님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795년 을묘박해 때 순교한 최초의 밀사 윤유일(바오로), 동료 밀사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주문모(야고보)신부님과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야고보), 사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 동정 순교자, 윤운혜(루치아) , 정광수(바르나바) 부부 순교자, 이들과 함께 주 신부님을 도왔던 우리 교회 최초의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한 성지이다.
이 9명의 순교자는 현재 그 성덕을 높이 인정받아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고 교황청 시성성의 인준에 따라 시복 시성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어농 성지는 1987년 고 김남수(안젤로) 주교에 의해 축복된 성지이다.
또 이 곳에서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순교 선조들의 시복 시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오고 있다. 그리고 2002년 8월, 수원교구장 최덕기(바오로) 주교에 의해 “을묘,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선조들을 기리고 현양하기 위한 기념 성지”로 선포되었다
▲어농성지 위치도
▲어농성지 순교자
▲윤유일 바오로 순교 200주년 현양기념비
▲현양 기념비 봉헌자 명단
▲윤유일 바오로 순교 200주년 현양기념비
▲묘역 입구 성모상
▲성지 안내판
▲어농성지 안내도
▲윤유일 바오로, 손에는 구베아 주교로 부터 받은 미사경본 하나와 성작 하나가 쥐어져있다.
윤유일을 포함한 파평 윤씨 온 가족이 박해의 서슬 아래 희생된 후 200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족보도 없고, 또 교회 안에서는 그 후손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서야 후손 중 하나인 윤필용 씨가 나타났고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 안에서 윤 바오로의 조부 사혁과 부친 윤장, 그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윤관수, 그 사촌 누이동생 점혜 아가다와 운혜 루시아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의 가묘를 만들었고 그해 9월 15일 수원 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축성, 성역화됐다.
▲윤유일 바오로 약력 설명판
▲순교자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바오로는 그 후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과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안에 숨긴 후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로부터 조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로부터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바오로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일 때문에 바오로는 그 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해 조선 신자들과의 약속에 따라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바오로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유일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이와 관련된 모든 신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주 신부는 신자들의 재빠른 행동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신부집 주인 최인길은 신부의 피신을 돕기 위해 그 대신 신부 노릇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박해자들은 마침내 신부의 입국 경위를 알게 되었다. 또 신부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의 이름도 알아내고 말았다. 그 결과 그들은 즉시 체포되어 최인길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6세였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윤유일과 포도나무
▲야외제대
▲야외 제대
▲순교자 주문모 신부 묘역과 주문모 신부 상
▲순교자 주문모 신부 상
▲순교자 주문모 신부 상 뒷면
▲순교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1752-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사바)과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가회동과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나게 되었고,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집주인 최인길, 밀사 지황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음력 3월 11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 도착한 뒤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래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즉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순교자 골롬바, 사바, 마티야, 주문모 신부의 묘소
▲주문모 신부 가묘
▲순교자 강완숙 골롬바 (1760-1801년)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1760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완숙 골롬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에 관한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 후 골롬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할 만한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 날 골롬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필립보와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생활하였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골롬바는 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그녀의 인품을 알아차리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골롬바는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 때문이었다. 이 후 그녀는 주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윤점혜(아가다)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골롬바의 집이었다.
골롬바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 머슴, 하녀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골롬바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롬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한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골롬바는 그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즉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골롬바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골롬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골롬바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즉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강완숙 골롬바 묘비 뒷면
▲순교자 지황 사바 (1767-1795)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1789년 이래 조선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다. 그러나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 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이러한 노력은 한 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것은 1793년이었다. 이때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유일(바오로)을 비롯하여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 다음 윤유일은 그곳에 남고, 사바와 요한이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지황 사바는 얼마 안되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사바의 신심에서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훗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로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황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는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유일과 함께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주 신부는 몇 개월 동안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신부는 신자들의 재빠른 행동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집주인 최인길을 비롯하여 신부의 입국을 도운 사바와 윤유일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내 지황 사바와 동료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형벌을 받는 중에도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하였다. 그런 다음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사바의 나이는 29세였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의 밀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사바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순교자 지황 사바 묘비 뒷면
▲순교자 최인길 마티아 (1765-1795)
1765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세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이냐시오)은 그의 동생이다.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후 마티아는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이듬해 초 마티아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마티아는 이때부터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신부는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되어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과 지황(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최인길 마티아와 동료들은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마티아의 나이는 31세였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져 버렸다. 그 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의 밀사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마티아가 보여준 용기와 그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최인길은 이승훈(베드로)이 신앙 전파를 위해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을 증진하는 데 있어 열성과 믿음과 신심이 뛰어난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순교자 최인길 마티아 묘비 뒷면
▲파평 윤씨 순교자 묘역
▲파평 윤씨 순교자 묘역
▲파평 윤씨 순교자 묘역
▲순교자 윤 현 묘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 ( ? -1801년)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 혹은 마르타)는 그의 동생이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 위하여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장을 지어 숨겨둔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사촌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후 아가타는 다시 어머니에게로 갔는데, 가족과 이웃 사람들이 자신을 질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꿋꿋하게 참아냈다. 그리고 1795년 윤유일이 순교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그때부터는 결혼한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나갔다.
또 1797년에는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서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으며, 아가타 성녀와 같이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점혜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동시에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아가타는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훗날 그녀는 아가타에 대해 증언하기를 “윤점혜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하였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에 앞서 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 묘비 뒷면
▲예수 성심상
▲순교자 정광수, 윤운혜 루치아 묘
순교자 정광수 바르나바 ( ? -1801)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는 경기도 여주 부곡(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함으로써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부인이고, 정순매(바르바라)는 그의 여동생이다. 바르나바는 입교 후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양근에 살던 윤운혜와 혼인을 하였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 집안에서는 교리의 가르침을 지킬 수도 없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바르나바는 한양으로 올라가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리고 신부의 명에 따라 김건순(요사팟)에게 편지를 전하였으며, 고향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바르나바의 부모는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그는 1799년 아내와 함께 여주를 떠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집 한편에 교회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곳을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의 여동생 정순매도 그들 부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왔다. 본래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던 바르나바는 교회 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 아내와 함께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이나 묵주 등을 제작하여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주었고, 가까운 교우들과 자주 만나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 모임을 갖곤 하였다.
그들 부부는 자식에게도 일찍부터 교리를 가르쳐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처형 윤점혜(아가타)가 체포되자, 바르나바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박해 초기에 그는 이미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고, 2월에는 그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아내 윤운혜가 체포되었다.
당시 정광수 바르나바는 한양과 지방을 오가면서 이리저리 피신해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졸들이 수사망을 좁혀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의 피신을 단념하고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때가 1801년 9월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바르나바는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명령도 거부하였다. 그런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바르나바가 형조에서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양반의 후손으로, 나라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습니다.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또 천주교 성물을 만들어 곳곳에 배포하였고, 교우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순교자 윤운혜 루치아 ( ? -1801년)
윤운혜(尹雲惠)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아가타)는 그의 언니가 된다.
나이가 찬 후 루치아는 여주에 사는 정광수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 시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그녀는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가 1799년이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필립보),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롬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루치아 부부는 전교에도 힘써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주었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루치아는 자기 부부도 오래지 아니하여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녀는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다 숨겨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운혜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밝혀진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배교도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순교자 정광수, 윤운혜 루치아 묘비 뒷면
▲순교자 윤유일 묘 (1760-1795)
▲순교자 윤유일 묘 (1760-1795)
▲순교자 윤유오 야고보 ( ? -1801년)
윤유오(尹有五)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후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유스티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또 1795년 초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지방 순회에 나서 양근에 도착하였을 때 그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윤유오 야고보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관장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결국 관장은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길 가는 길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4 처 (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성당 가는 길 입구, 순교자 묘역 건너편
▲성모 상
▲성지 성당 사무실
▲성지 성당
▲성모 동굴
▲예수성심상, 돌아온 탕자 상
▲예수성심상, 돌아온 탕자 상
▲예수성심상
▲성당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제대
▲성당내 성모상
성 모자 상
▲성 모자 상
▲입구 쪽 십자가 동산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성당 앞 광장에 전시되어있다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형구(刑具)
▲형구(刑具)
▲형구(刑具)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형구(刑具)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성당 광장 박해 형구 전시물
▲십자가의 길, 순교자 묘역 입구에서 시작하여 성당 지역으로 연결되어있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한국 교회사 안에서 순교자 윤유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
바로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셔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윤유일은 1779년 주어사 강학회를 주도한 권철신의 제자였다. 이승훈이 북경에 들어가 영세하고 돌아와 1784년 한국 교회가 창설됐으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미흡했다. 그래서 성직자가 없었던 당시, 평신도가 성사 집행과 미사 봉헌을 할 수 있는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상 숭배는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제기됐다.
스스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승훈, 권일신 등 교회 지도자들은 1789년 10월 예비자였던 윤유일을 북경의 북당 천주교회로 파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청했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견진까지 받아 돌아왔다.
평신도의 성무 집행은 안 된다는 회답을 구베아 주교에게 받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1790년 9월 재차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해 성사를 집행할 신부를 보내 달라는 간청을 했고 그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791년 신해박해의 회오리가 어느 정도 잦아든 1794년 말 윤유일은 지황(地璜)과 함께 북경으로 길을 떠나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서울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목자가 없던 한국 교회에 첫 사제로 발을 디딘 주 신부는 서울 북촌(北村:지금의 계동)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머물렀고 처음 6개월간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신입 교우인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 신부는 몸을 피해야 했고 윤유일, 지황, 최인길 세 사람은 체포돼 비밀리에 그 날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 날이 1795년 6월 28일, 윤유일의 나이 36세였다. 이처럼 사제가 없어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던 불완전한 한국 교회에 신부를 처음으로 모셔와 완전한 교회로 만들었던 윤유일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한편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양근에서 체포돼 신안 앞바다 먼 섬인 임자도로, 그 숙부 윤현은 강진으로 유배됐고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 안드레아, 그 동생 윤유오 야고보는 순교했다. 윤유일의 사촌 누이동생이자 동정녀로 살았던 윤점혜 아가다와 운혜 루시아는 1801년 양근에서 참수됐다.
이 밖에도 어농 성지에서는 경기도 출신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조용삼(베드로), 최창주(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띠노), 원경도(요한), 심아기(바르바라), 정순매(바르바라), 한덕운(토마스), 그리고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필립보) 등 8위의 시복 시성을 위해서도 기도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초기교회 신자들에게 특별히 존경받아온 5명의 인물
한국 천주교회사 관련 가장 훌륭한 저술로 평가받고 있는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1874년 간행)를 보면 1801년 신유박해 이전 초기교회 신자들에게 특별히 존경받아온 5명의 인물이 눈에 띈다.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1759∼1791)와 권상연(야고보,1751∼1791), 윤유일(바오로,1760∼1795), 최인길(마티아,1765∼1795), 지황(사바, 1767∼1795)이다. 이들이 어떤 이유로 초기교회 신자들에게 존경받아 왔는지 또 그들 생애에서 닮은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선교사없이 평신도들이 서적을 통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임으써 출범한 한국 천주교회는 태생적으로 두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서적을 통해서만 천주교를 이해하고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에 따른 교리이해 부족이라는 '보유론적 한계'와 또 하나는 성직자가 없어 보편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교계론적 한계'였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받고 귀국한 이승훈(베드로)이 서울 수표교 인근 이벽(세자 요한)의 집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한국 천주교회는 이후 10년이 안돼 이 두가지 태생적 한계를 모두 극복했다.
이 태생적 한계를 극복시킨 주인공들이 바로 윤지충과 권상연, 윤유일, 최인길, 지황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가톨릭교회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철폐함으로써 '보유론적 한계'를 극복했고,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은 주문모 신부를 영입함으로써 '교계론적 한계'를 극복했다.
◆ 윤지충과 권상연
전라도 진산의 유명 양반집안 출신인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간으로, 윤지충은 고종사촌인 정약용(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됐고,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입교한 후 권상연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그를 입교시켰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0년 북경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금지령을 내리자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윤지충은 이듬해 여름 어머니(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예절로 장례를 치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까지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이 소식을 들은 둘은 자수해 고문과 배교의 강압 속에서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한 후, 1791년 12월8일 함께 전주 남문 밖에 형장에서 '군문효수'(죄인의 목을 베 군문 앞에 매다는 것)형을 받고 순교했다.
윤지충은 32세였고, 권상연은 40세였다. 윤지충은 권상연보다 먼저 칼을 받아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가 됐다.
◆윤유일·최인길·지황
경기도 여주 양반출신인 윤유일과 중인 집안으로 한양의 역관 출신인 최인길, 한양 궁중악사 집안의 지황은 한국 땅에 성직자 영입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윤유일은 1789년 성직자 영입을 위한 최초의 밀사로 선발돼 북경에서 구베아 주교를 만났다.
이후 그는 지황과 최인길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최인길은 1784년 이벽(세자 요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1790년 윤유일이 북경교회를 방문하고 귀국한 후부터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했다.
성직자 은신처 마련 임무를 맡은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1794년 12월24일 입국한 후 한양 자기 집에서 모셨다. 그러다 배교자의 밀고로 이 사실이 발각되자 주 신부를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이 신부로 위장해 체포됐다.
지황은 1791년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한 후 1793년 윤유일·박요한과 함께 북경에 다녀온 후 1794년 12월 의주 국경에서 주 신부의 입국을 도왔고 한양 최인길의 집까지 안내했다. 그러나 최인길이 체포되면서 윤유일과 지황도 포졸들에게 잡혔고, 조정은 주 신부 입국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1795년 6월28일 밤 이들 셋을 은밀하게 타살시킨 후 시신들을 강물에 버렸다. 윤유일이 35세, 최인길이 30세, 지황이 28세였다.
◆우선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윤유일·최인길·지황, 이 다섯 순교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 순교자들로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을 비롯해 이후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됐다. 교회용어로 '우선 순교자'들인 이들에 대한 초기 한국교회의 공경은 남달랐다.
샤를르 달레는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모범은 조선의 초대 천주교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유명해졌고, 특히 바오로는 오늘까지도 신자들 사이에 큰 존경을 받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주문모 신부도 "윤지충은 주교와 같은 존경을 받았다"고 신문과정에서 진술했고(「징의」참조), 윤유일은 1797년 구베아 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교우들은 수건을 여러장 가져다가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흘리신 피를 그 수건에 적셨습니다.
그런데 사경을 헤매던 몇몇 교우들이 순교자들의 피가 적셔진 그 수건 조각을 만지자마자 금방 병이 나은 게 아니겠습니까.…이런 기적은 흔들리는 교우들의 신앙을 다잡아 주었고, 비신자들에 대한 복음 전파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구베아 주교은 자신의 1797년 서한에서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에 대해 "조선 교회 안에서는 세 순교자들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뛰어난 복음 전파자들이었고, 하느님 영광을 위해 진정으로 노력한 신자들이었습니다. 온갖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선교사를 자기네 나라로 모셔가서 숨겨준 것도 이들었습니다"라고 칭송했다.
◆호교론자
이들 다섯 순교자들은 관리들뿐 아니라 당대 저명한 유학자들과 천주교 교리에 대해 논하며 진리를 밝힌 초기 호교론자로 공경을 받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신주와 같은 나뭇조각을 공경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무익한 일이며, 이를 금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어기기보다는 차라리 형벌과 죽음을 택하겠다"며 순교를 자청했다.
윤유일·최인길·지황도 "저 십자형틀에 묶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가 대신 죄를 지고 가셨으니, 어찌 자식된 자로서 저 큰 부모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교리의 가르침을 어기면서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분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천만번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하며 고문을 달게 받았다.
◆순교를 갈망한 용덕(勇德)
이들 다섯 우선 순교자들의 용덕은 신유박해 순교자들에게도 큰 감화를 주었다는 기록이 달레 교회사 여기저기에 나온다. 정조실록」(권33, 15년 11월7일자)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최인길·지황의 순교 소식을 듣고 쓴 편지(1797년)에서 "그들이 이토록 영광스럽게 순교의 은총을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동안 겪어야만 하였던 위험에 대한 보상일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하느님의 종 124위'의 우리말 약전 저술에 실무를 맡아온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박사는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모범이 된 우선 순교자 5위에 대한 현양과 연구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이라면서 "다섯 우선 순교자들의 용기와 고난, 그리고 최후에 보여준 순교 용덕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삶의 모범으로 다가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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