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서울 중구***한국 천주교 聖地 순례ㅡ신당동 을지로 7가. 光熙門(시구문.屍軀門)) 성지

문성식 2022. 3. 11. 07:52

한국 천주교 聖地ㅡ신당동 을지로 7가. 光熙門(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조선의 사소문(四小門)중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박해당시 치명한 순교자들은 모두 광희문 밖으로 내던져 졌는데, 그때마다 문 밖은 굴러 떨어진 시신이 너무 많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에 의해 남녀 구별에 따라 옷을 달리 입히고, 동여매서 거적으로 싸는 정도로 겨우 매장되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 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을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방인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光熙門(시구문) 성지 위치도


◆박해 당시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내던져 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광희문(시구문.屍軀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가톨릭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처형당했는데, 이 때 친지를 찾지 못한 시신들은 당시 시구문이었던 광희문을 통과해 바깥에 버려졌다.


총 순교자 중 794명의 시신이 광희문을 통해 버려졌는데 그중 54구는 신유박해(1801)에서 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구는 병인박해(1866)에서 기묘박해(1879) 시기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성인 103위중 44위, 복자 124위 중 27위가 여기 묻히고 유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1999년 5월에 현양탑을 설치하고, 2008년 4월에는 제대를 설치하였으며 2014년 8월에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했다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光熙門)은 박해 당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체포된 수많은 교우들이 서울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와서 가혹한 고문과 형벌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던 이름 모를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곳 문밖으로 내던져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 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으며, 그때마다 문밖은 굴러 떨어진 시신이 너무 많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가 남녀 구별에 따라 옷을 달리 입히고, 동여매서 거적으로 싸는 정도로 겨우 매장되었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버려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1846년 병오박해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임이 데레사, 우술임 수산나, 정철염 가타리나 성녀의 시신은 광희문 밖에 버려진 후 신자들이 거두어 매장하였다.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송백돌 베드로의 시신 역시 광희문 밖 성벽 밑에 묻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광희문(시구문.屍軀門) 성지


천주교 순교자 현양관 축복식


서울대교구 광희문 밖 순교성지(담당 한정관 신부) ‘광희문 천주교 순교자 현양관’ 축복식이 2018년 4월 8일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거행됐다.
서울 퇴계로 348 광희문 건너편에 위치한 광희문 순교자 현양관은 좌ㆍ우 포도청과 의금부, 전옥서에서 순교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794위 순교자를 기리는 공간이다. 이들 794위 순교자 가운데 최경환(프란치스코)ㆍ민극가(스테파노)ㆍ현석문(가롤로) 등 성인 20위와 심아기(바르바라)ㆍ김이우(바르바라) 등 복자 5위, 황석지(베드로)ㆍ최영수(필립보)ㆍ이윤일(안토니오) 등 하느님의 종 25위가 포함돼 있다. 이처럼 광희문 밖은 한국 천주교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버려지고 매장된 성지다.
광희문 천주교 순교자 현양관은 연면적 149.83㎡, 지상 4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로 성당과 전시실, 사무실 등을 갖추고 있다. 4층에 마련된 성당에는 제대와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으며 매주 주일과 금ㆍ토요일 오후 3시에 순교자 현양 미사가 봉헌된다.
이날 축복식을 주례한 염수정 추기경은 미사 강론을 통해 “조선 시대 시신을 내보내던 죽음의 문이었던 ‘광희문’(光熙門)이 순교자들을 통해 비로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쁨의 문이 됐다”고 축하했다.
염 추기경은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고 신앙을 나누면서 부활을 살았던 분”이라면서 “광희문 순교자 현양관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온전히 삶을 봉헌한 순교자들의 영성을 배워 우리 각자의 삶과 신앙을 쇄신하는 자리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담당 한정관 신부는 “모든 순교자와 우리 살아 있는 형제자매들이 영적으로 교류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나눌 수 있는, 그리고 순교자들의 깊은 영성을 되새길 수 있는 거룩한 장소로 가꾸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십자가의 길 14처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