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순교聖地ㅡ이촌동 새남터 순교 성지.새남터 기념관
▲새남터 성지 & 새남터 기념 성당
▲새남터 순교터 위치도
새남터는 한국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분 중 11분이 순교하신 곳이며 이 11분 중 8분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분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 순교성지이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 앵베르 성인, ‘기해일기’ 의 현석문 가롤로 성인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9분의 성인유해가 새남터에 모셔져 있다. 새남터의 말뜻은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새나무'는 '풀과 나무'의 뜻이며, ‘새’ 라는 말은 억새의 의미이다.
조선조 초기에 이 곳을 노들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노량진과 배로 왕래했던 나루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새남터를 한자로 음역(音譯) 해서 사남기(沙南基 )라고도 불렀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 곳에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되다 국가에 대하여 중한 죄를 지은 국사범(國事犯)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세조 2년, 1456년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올리려다 처형당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이 곳에서 피를 흘렸다.
▲새남터 성지 & 새남터 기념 성당
1801년부터 1866년까지 한국교회 4대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 특히 사제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에 뿌려져 너무나도 찬란한 신앙의 꽃을 한반도에 피우게 만들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목자없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다.
이에 북경교구는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들어와 교세를 키웠으며 6년 만에 신자수가 6,000여명이나 늘어났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쫓기는 몸이 되었고, 당신을 위해 여러 사람이 희생되자 스스로 의금부를 찾았으며 결국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일로 새남터에 처음으로 순교의 피가 흘렀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831년에는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하여 조선교구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아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를 위하여 설립)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엥베르 주교가 들어와 1년 동안 9,000여명의 신자를 늘리는 등 교세를 키웠으며,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소년을 마카오에 유학을 보내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키웠고,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많을 일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헌종 5년의 일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목숨을 잃었는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간의 시벽파 싸움에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1836년 모방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두 번이나 중국으로 넘나 들며, 수업을 하고 상해의 금가항 신학교에서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1846년 이곳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는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분의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항의로 프랑스 군함 3대가 충청도 외면도에 들어와 조선 조정에 항의문으로 압박을 가하자 9월 16일 김대건 신부를 서둘러 처형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로 헌종 12년이었으며 3일 후 현석문도 처형되었다. 철종이 즉위하자 천주교를 박해하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복돋아 주어 교세가 크게 확장 발전하게 되었다, 새 영세자도 많이 늘어났고, 천주교를 옹호하던 순원왕후가 철종의 정사를 뒤에서 맡아보게 되어 청나라로부터 많은 성직자들이 들어왔다. 이 결과 교우가 1850년에 일만 일천여명, 1855년 일만 사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신학교까지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년 후에는 대원군이 수만 명의 천주교도를 죽이는 대학살의 비극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프랑스, 영국의 동맹을 결성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물리치자고 한 건의가 시기를 놓치고 오해를 발생시켜 1866년 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까지 천주교도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성인과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등 사제성인, 푸르티에 및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성 정의배 마르꼬, 성 우세영 알렉시오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890년부터 이곳 순교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 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새남터 성지는 1950년에 순교기념지로 지정되었고,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 라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복자학교’라는 교육 시설을 운영하다가 1981년에 한강본당으로부터 분가하여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새남터 성지 & 새남터 기념 성당
▲새남터 성지 & 새남터 기념 성당
▲새남터 성지 & 새남터 기념 성당
▲새남터 성지 & 새남터 기념 성당
◆ 조선조의 천주교 박해(迫害)
조선왕조의 천주교 박해는 한국 교회가 창설(1784년 11월경)된 지 약 반년만인 1785년 3월(음)에 벌써 시작되었다. 중인인 역관 김범우는 그의 집에서 종교의 모임을 가졌다 하여 수감되었다가 장형을 당하고 도배(徒配)되었다.
그 후 한국교회는 4대 박해로 불리는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비롯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박해로 신해(1791년), 을묘(1795년), 을해(1815년), 정해(1827년), 경신(1860년)박해 등이 잇달았다.
이중에서 4대 박해는 이른바 조정의 공식적 개입에 의하여 야기되었으나, 기타 박해는 조정의 공식적인 지시 없이, 포도대장이나 일부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박해를 지시하여 비롯된 점에서 구분된다.
○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정조의 뒤를 이은 11세의 순조 때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攝政,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사람)이 되었는데, 대비는 노론벽파에 속하는 여인이었다.
순조 원년(1801년) 1월 11일(음) 대왕대비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고, 전국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세금, 치안 등에서 조정의 통제력을 강화하던 제도)을 세워 빠짐없이 고발케 하여 근절을 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신유박해다.
그 결과 남인의 거두인 이가환(李家煥, 호 錦帶, 貞軒, 1742~1801)과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은 장살당하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과 홍낙민(洪樂敏, 1751~1801, 루카) 등은 순교하였으며,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이 처형되고, 정약전(丁若銓, 자 天全, 1758~1816)·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형제는 유배됨으로써 남인 세력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잠적하였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3월 12일(음) 자현(自現)하여 박해는 재연되고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온 독실한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1761~1801, 골룸바)과 궁녀 등이 순교하고 주 신부는 군문효수 되었다.
9월 29일(음)에는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이 체포되어 대역 부도죄(大逆不道罪)로 순교하였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는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일변시켰다. 위정자들은 그것을 마치 천주교회의 가르침인 양 단정하고, 외세를 불러들이는 매국도당으로 몰아 박해를 합리화시키는 구실로 삼게 된 것이다.
○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
1839년 헌종 5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른바 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된 이 박해는 사학(邪學, 사악한 배움이란 뜻으로 박해자들이 천주교 등을 비판하여 부른 말)인 천주교를 퇴치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꺾으려는 벽파 풍양 조씨들의 책동에서 온 것이었다.
당시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웠으나, 벽파인 풍양 조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그 결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천주교도를 몰아세운 이 박해로 4월 12일(음) 남명혁(南明赫, 1802~1839, 다미아노)과 궁녀 박희순(朴喜順, 1801~1839, 루치아) 등 9명이 순교하고, 6월부터는 유진길(劉進吉, 용심, 1791~1839, 아우구스티노),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조신철(趙信喆,1795~1839, 가롤로) 등 한국 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7월 1일(음)에는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가 수원에서 자현하고, 주교의 권고로 충청도 홍주에서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과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도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래서 8월 14일(음) 3인의 선교사가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았고, 이튿날 유진길과 정하상이 서소문 형장에서, 나흘 후에는 조신철 등 9명이 순교하였다. 이때 정부는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교우들에게만 교수형을 처하였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고문 또는 병들어 죽은 교인이 6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밖에도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등을 참고하면 실제로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순교자들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병오박해(丙午迫害. 1846)
헌종 12년(1846년)에 정부는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천주교에 또 박해를 가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다.
김대건은 선교사들의 입국이 비교적 안전한 해로(海路)를 개척하고자 서해의 등산진(登山鎭)까지 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마침내 7월 26일(음)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강변 사장(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 박해는 김 신부와 관련되어 투옥된 현석문(玄錫文, 1797~1846, 가롤로) 등 남녀 교우 9명이 처형된 외에 다른 희생자는 없었다.
○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
고종 3년(1866년)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 호 石坡) 치하에서 한국 교회사상 최대의가혹한 박해가 또 일어났다. 이것이 병인박해다.
이 박해의 배경이 되는 원인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의 협조를 청해 왔고, 이어 승지인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능히 러시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만족히 여기고, 남종삼에게 한국 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를 만나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황해도에 인편을 보내어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남종삼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은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1866년 1월 31일(음 12월 15일) 남종삼은 주교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다시 대원군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를 맞은 대원군의 태도는 너무나 냉담하였다. 대원군의 태도가 표변한 원인은 얼마 전에 북경에서 조선 사신이 보내온 중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천주교 금령(박해령)이 내려졌다는 서신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혹한 박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등 수많은 저명 인사들이 참수되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1866년부터 1873년 전후까지 광의의 병인박해 기간에 약8천 명에 달하는 교우의 생명을 앗아갔다.
1층로비 순교성인 명단
▲새남터 기념관(2006. 9. 3 축성)
서울 새남터본당(주임 한원식 신부)은 9월 3일 용산 이촌2동 새남터 성지에서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관’ 축복식을 가졌다. 새남터 성당 지하 100여평 공간에 마련된 ‘새남터 기념관’은 4개 공간으로 나눠 꾸며졌다. △‘도입공간’ 및 ‘상징의 장’에는 새남터 성지 역사와 103위 성인 성화 등을 전시했으며 △‘추모의 장’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4인의 흉상과 부조를 설치했다. 또 △‘전시 공간’에는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순교의 과정을 그래픽과 유물 등을 통해 전시하고 있으며 △‘체험 및 교육공간’은 조배실과 다목적 영상실을 설치, 신자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순교 성인에 대해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새남터 기념관
조선시대는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였으며, 때로는 국사범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던 사육신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그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로는 주로 천주교신자들의 순교지가 되었다.
즉,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Imbert, L.M.J.)·모방(Maubant, P.)·샤스탕(Chastan, J.)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첫 한국인 신부이었던 김대건(金大建)과 현석문(玄錫文) 등 신자들이,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Berneux, S.F.)와 도리(Dorie, P.H.) 등 5명의 서양인 신부들과 정의배(丁義培)·우세영(禹世英) 등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이곳에서 군문효수에 처하여졌다.
이렇듯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으므로 한국천주교에서는 1950년새남터로 추정되는 인근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기념지로 지정하는 동시, 1956년 ‘가톨릭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을 세웠고, 1984년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이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이 성전은 종래의 서양식 교회건축양식을 탈피한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전시관·기념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새남터 기념관
▲새남터 기념관
▲새남터 기념관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선교사들이 입었든 상복
▲선교사들이 입었든 상복
▲최양업 신부
▲성인 유해실
새남터에서 순교한 9분(김대건신부, 앵베르 라우렌시오주교, 모방 베드로신부, 사스탕 야고보신부, 야고보신부, 베르뇌 시메온주교, 브르트니에으 유스토신부, 볼리외 루도비코신부, 도리 헨리코신부, 우세영 알렉시오) 과 타 지역에서 순교한 5분(다블뤼 안토니오주교, 황석두 루카,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김성우 안토니오, 이명서 베드로)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인 유해실
▲성인 유해실
▲성인 유해실
▲성인 유해실
▲성인 유해실
▲성인 유해실
▲성인 유해실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14인 순교자 흉상부조
▲14인 순교자 흉상부조
▲14인 순교자 흉상부조
▲주문모 야고보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성 샤스탕 정아백각 야고보 신부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
▲성 현석문 까를로
▲성 엥베르 범세형 라우렌시오 주교
▲성 김대건 안드레시아 신부
▲성 베르뇌 장경일 시메온 주교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성 정의배 마르코
▲성 모방 나 백다록 베드로 신부
▲푸르티에 안토니오 신요안신부(좌), 프티나콜라 미카엘알렉산데르신부
▲새남터 14인 순교자
▲새남터 14인 순교자
▲전시물 ▼
▲신유 박해(1801. 1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한 박해이다. 이 박해로 첫 사목사제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이제 조선교회는 박해가 없어도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한탄 했을 만큼 초대교회가 받은 타격은 컸다.
▲기해 박해(1839. 3월)
기해박해는 1839년 3월(음)에 시작하여 그 해 10월 막을 내린 박해로 이 때 희생된 70위가 103위 한국순교 성인 안에 포함되어 있다. 30여년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새로 등장한 풍양조씨의 정치 세력 다툼과 지방 관리들의 탐욕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로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사제들, 정하상(바오로)과 현석문(가롤로)등이 순교했다. 기해일기에는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사나 장사한 순교자가 60여명이나 된다고 했으며 달레의 한국교회사에는 참수된 신자가 70명이 넘는다고 했다.
▲병오 박해(1846. 6월)
병오박해는 1846년 6월 성 김대건 신부의 피체를 계기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에 끝난 박해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봄 새로운 해로개척을 위해 중국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해로도를 전하려 하다가 6월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외국 선박의 출몰과 국경 침범을 문제삼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김대건과 현석문은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임치백, 남경문 등은 매 맞아 죽는 장사로 순교하였다. 이때의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페레올 주교에 의해 조사되어 1846년 11월3일자 서한인 '병오일기"에 기록되어 시복 시성에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병인 박해(1866. 고종8년)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8년)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된 가장 참혹하고 희생이 큰 박해이다. 흥선대원군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천주교를 배척하는 정치세력들의 공세로 당시 신자수가 약 2만 3천명 중 약 1만 명이 순교할 정도로 참혹한 박해가 계속되었다. 이 중 24명이 한국순교 103위 성인 중에 들어 있으며 이런 박해로 순교신심은 더욱 깊어지고 순교자 현양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더욱 깊은 영성을 지니며 현대교회에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천주교 박해와 시복시성
순교자 약 1만명 중 교회법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성인에 오른 이가 103위이다. 1925년에 시복된 한국의 79위는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자들이며, 1968년에 복자 위에 오른 24위는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이다. 1984년 5월4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 기념 행사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순교자 103위가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천주교 박해와 시복시성
▲천주교 박해와 시복시성
▲조창원 작, 주문모 신부의 순교, 60.5 x 73cm, 2008년
▲전시실
▲전시실. 형구와 고문도구
▲전시실. 형구와 고문도구
▲전시실. 형구와 고문도구
▲형벌장면
▲참수장면
▲용수
▲박해시 사용된 형벌도구
▲박해시 사용된 형벌도구
▲선교사들의 포교활동관
▲선교사들의 포교활동관
◆십자가의 길
▲ 성당내부 십자가의 길 제1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제2처
▲ 성당내부 십자가의 길 제3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제4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제5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제6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제7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제8처
▲ 성당내부 십자가의 길 제9처
▲성당내부 십자가의 길 제11처
▲성당내부 십자가의 길 제12처
▲성당내부 십자가의 길 제13처
▲성당내부 십자가의 길 제14처
◆십자가의 길 14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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