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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시***한국 천주교 순교 聖地 순례ㅡ화성행궁(華城行宮) 순교터 성지

문성식 2022. 3. 20. 12:25

수원 팔달구ㅡ화성행궁(華城行宮) 순교터 성지




수원 성지가 위치한 수원 화성은 조선 제 22대 정조의 명을 받아 설계, 시공한 성으로 1794년(정조 18년) 1월부터 착공하여 2년 9개월 뒤인 1796년(정조 20년) 9월에 완성된 둘레 총길이 5.743km, 직경 평균 1.8km의 성곽이다.


그런데 수원 화성은 정조가 승하하고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피를 흘려 주님을 증거한 거룩한 순교지가 되었다.


▲화성행궁,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수원 화성은 성곽 전체가 거룩한 순교지이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신앙 증거지이다. 1997년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조선시대 실학사상이 집약된 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정조대왕(조선왕조 제22대)은 1794년부터 2년에 걸쳐 수원화성을 지었다. 당쟁에 휘말려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사도세자) 능을 이곳으로 옮긴 데다 수도 남쪽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화성 설계와 시공은 정약용이 맡았다. 수원화성은 이후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 처형지가 됐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당한 신자들이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순교했다. 둘레 5743m에 이르는 성곽 전체가 78명의 순교자와 수천 명의 무명 순교자들을 떠안은 순교지다. 현재까지 화성 내부 13곳 이상이 순교지와 증거지로 확인됐다.


이아(화청관)는 중인 이하 천민 신자들을 심문한 곳이며 정조대왕 처소로 쓰였던 화성행궁은 양반 신자들을 심문했던 곳이다. 지대가 높은 동북각루에는 신자들을 참수해 목은 북암문에 걸어놓고 시신은 성벽 밖으로 던졌다고 전해진다. 또한 성곽 주요 출입문마다 처형당한 신자들 목을 걸어놓았다.


▲화성행궁 위치도


▲화성행궁 신풍루


다산 정약용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한 수원화성은 그 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의 처형지가 되었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당한 신자들이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순교한 곳이다. 둘레 5743m에 이르는 성곽 전체가 78명의 순교자와 수천 명의 무명 순교자들을 떠안은 순교지이다.


현재까지 화성 내부 13곳 이상이 순교지와 증거지로 확인되었다.


수원 화성은 기록에 전해지는 수원의 순교자 최대 78명 중 1817년 샘골에서 친척들에게 살해된 이용빈을 제외하고, 병인박해 당시 77명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처형된 곳이다. 


신앙의 증거지로는 화성 행궁, 이아(화청관), 중영(총리영), 동남각루, 남암문, 형옥, 팔달문 밖 장터, 장안문 밖 장터 등 인데 이밖에도 종로사거리,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사형터, 동장대 등인데, 이곳들은 순교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 유수부 내에서 이루어진 공적 박해의 현장은 현존하는 문서 기록과 구전을 종합해 볼 때 대략 6~7곳으로 압축된다. 우선 천주교 신자들이 수원 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원성 안으로 끌려올 때 대개는 먼저 들르는 곳이 판관이 주재하는 1차 신문 장소인 이아(貳衙, 화청관)이다. 


◆ 이아(貳衙)(화청관)


‘이아’는 행궁의 북쪽에서 동편으로 가까이 있으며,1793년(정조 17년) 12월 수원이 도호부(都護府, 종3품 관아)로부터 유수부(留守府, 정2품 관아로 유수는 外官이 아닌 京官에 속함)로 승격하던 해에 설립되었는데, 유수의 행정사무 대리자였던 종5품 판관(判官)의 관아이다. 대체로 향반(鄕班)이나 중인 이하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서 판관 앞에서 1차 심문을 받던 곳은 ‘이아’에서도 그 동헌에 해당되는 ‘화청관’이었을 것이다. 이아 일대는 현재 말일성도 그리스도교회가 들어서 있다.


▲화성행궁 전도


▲화성행궁 안내도


▲화성행궁 전도


▲화성행궁 현판


▲화성행궁


▲화성행궁  사적 478호 표지석


▲화성행궁 내부 중앙문


▲봉수당(奉壽堂)




▲봉수당(奉壽堂)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 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1789년(정조 13) 8월 19일 상량하여 같은 해 9월 25일 완공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7년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수당(奉壽堂)이라는 건물 이름은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정조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었으며, 뒤에 돈령부지사를 지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편액을 썼다. 1795년(정조 19) 이곳에서 헌경왕후의 회갑연인 진찬례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봉수당(奉壽堂) 내부


▲봉수당(奉壽堂) 내부


▲봉수당(奉壽堂) 내부


▲봉수당(奉壽堂) 내부 안내도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있는 신풍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있는 신풍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있는 신풍교


성곽 내 '종로 사거리'는 공개 처형지였다.


수원 종로사거리


행궁 앞(300미터 전방) 광장 사거리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 중영의 군사들에 의해서 천주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종로 사거리 동북쪽에 중영 자리와 북수동 성당이 있다


▲중영(中營, 摠理營, 토포청)


수원 지역은 특히 서해안 일대에 침입하는 왜구를 방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다른 지역 군사들보다 역량이 뛰어난 군사들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수원 지역은 중앙 오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 : 좌영, 우영, 중영의 3영 체제)의 중영이 설치돼 그 관장인 수원 도호부사(종3품)가 이 지역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 중영은 유수부의 토포청을 겸하던 곳이므로 박해 시기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적, 비공개적 사형을 집행하던 곳이었다. 중영은 성안 종로 네거리에 접한 동북쪽에 위치하며, 그 한 모퉁이가 현재의 북수동 성당터에 겹쳐진다.


▲동남각루 (東南閣樓)


화성의 군사적 방어 체제를 나타내주는 건물로 화성 성벽의 동남쪽 부분에 해당된다. 수원 지역은 중앙 오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 : 좌영, 우영, 중영의 3영 체제)의 중영이 설치돼 그 관장인 수원 도호부사(종3품)가 이 지역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것이 순조 이후 총리영(총리중영)으로 변경되고 그 군사적 실무 책임자인 중군(中軍, 정3품, 토포사를 겸함)에 의해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던 때, 동남각루는 천주교인을 참수하여 그 시신을 성 밖으로 내던진 장소로 알려진다.


▲형옥(刑獄, 형초옥)


6칸의 감옥으로 이곳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투옥되었고 믿음을 시험하면서 그 신앙을 증거하게 하던 처참했던 비극의 장소이다. 이곳에 갇힌 천주교인들은 처형될 날을 기다리면서, 때로 아사형(餓死刑) 또는 장독사를 포함한 병사(病死)로 죽게 방치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곳은 수원성 내 순교지 중의 하나로 지목된다. 현재 이 옥터에는 학원 건물 등이 들어서 있는데 그 위치는 팔달문 동쪽 50m쯤에 있는 시장통에서 아직도 ‘옥거리’로 불리고 있는 좁은 골목길의 끝자락 왼편이다. 현재 삼영약국이 있는 주변이다.


남암문<(南暗門, 시구문)


형옥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건물이 바로 성안의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 屍軀門)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는 사형수의 머리를 그 문루에 매달아 내걸었던 문이라는 뜻에서 수구문(首口門) 등으로 불렀다는 남암문이다.


현재 그 위치는 팔달문 동쪽 시장통이 옥거리와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는 곳으로 형옥터 맞은 편 ‘M명동의류’라는 간판을 내건 상점 자리 앞에 해당한다고 한다. 신유박해 때 참수시킨 천주교인의 머리를 매달았던 곳으로 지금은 형옥과 함께 시장 상가로 되어있다. 남암문은 동남각루에서 처형한 천주교인들의 목을 걸어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암문과 북암문도 같은 기능을 수행했는지는 미상이다.


암문이란 성의 정문이 아닌 사잇문으로 전시에 군수품을 조달할 수 있게 은밀하게 만들어 놓은 비밀문이다. 성에는 서남암문, 서암문, 남암문, 북암문, 동암문 등 5개소가 있었으나 남암문은 현재 시가지화 되었다. 이중 서남암문만이 누각이 있고 용도와 이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서암문은 문 자체가 옆으로 들어앉아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남암문은 동남 각루에서 처형한 천주교인들의 목을 걸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암문은 동장대에서 처형한 천주교인들의 목을 걸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북암문은 서민, 천민, 군인들이 사용하던 비상문으로 천주교인들의 목을 걸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팔달문(남문) 밖 장터


팔달문은 화성의 사대문중 남쪽에 위치한 정문으로 화성 축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문은 화강암으로 홍예를 만들고 위에 2층의 육중한 목조 문루를 세웠다.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 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 팔달문 밖 장터는 천주교인들을 공개적으로 때려죽이는 장살형(杖殺刑)을 집행하던 곳이다.


▲장안문(북문) 밖 장터


하나의 홍예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으로 원형 옹성을 갖추었다. 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5개의 구멍을 갖춘 큰 물통으로,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규모나 구조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서울 남대문과 매우 비슷한, 당당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남대문에 비해 좀 더 새로운 것은 옹성, 적대와 같은 방어 시설을 갖춘 것이 특색이다. 장안문 밖 장터는 팔달문 밖 장터와 마찬가지로 천주교인의 공개적인 장살형 집행 장소였다.


▲사형터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의 사형터이다. 구전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들도 일반 죄수들과 함께 처형된 곳으로 추정된다.



▲동장대(연무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를 말하며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무예를 수련하였기에 연무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기에 좋은 군사 요충지다. 군사 제식 훈련 중에 천주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진 곳으로 전체 시설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용연, 화홍문과 더불어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진 곳으로 전체 시설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용연, 화홍문과 더불러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 4개 누각중 하나인 방화수류정의 서쪽벽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방화수류정 자체도 8각 지붕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하나 더 세워 십자(十)형으로 되어 있다.
팔각정의 기본틀을 변형시켜 서쪽에 벽을 만들어서 서벽 안에 86개의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은 정자인데 이는 당시 천주학이 서양의 학문인 서학이라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서녘 석양이 질 무렵에는 세상 어둠을 쫓는 광명의 상징으로 서벽에 새겨진 십자가들이 빛이 나도록 설계되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화성 축조에 큰 영향을 준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가 문양을 넣은 것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높은 지형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주교인들을 참수한 곳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성벽밖으로 던졌고 목은 북암문에 걸어 놓았을 것이다.


▲창룡문(蒼龍門, 수원성의 동문)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는 동쪽 대문이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은 다른 죄수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궁성의 대문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소문이나 암문 등지로 내보냈던 당시의 관례로 보아 이곳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십자가의 길 14 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