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3)
●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과 그들의 신학사상
▶ 각국 선교사들의 입국
◎ 조선의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 중 1884년 9월 20일에 제물포 항에 도착 - 공식적인 입국신분은 미국공관의 공관의 -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발생 - 개화파 자객의 칼을 일곱 군데나 맞아 혈관이 끊긴 민영익을 치료 - 민영익이 ‘당신이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극찬을 함 -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 광혜원[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 개설 - 4월 26일 제중원으로 개명.
◎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의 입국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입국 - 이들은 자신의 생애 동안에 영광스러운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소망 -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현상 - 1887년 아펜젤러와 함께 성서번역위원회를 발족 - 국내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1886년 7월 11일 알렌의 어학선생이었던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품.
◎ 각 선교회의 입국
1887년 성공회 소속 울프 선교사
1889년 호주장로교 소속 데이비스 남매 - 1890년 4월 6일 데이비스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고 동생 메리는 호주로 돌아감.
1889년 침례교(펜윅)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4명이 입국 -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가 5000달러[두 명의 선교사가 2년간 선교할 수 있는 선교비]를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내 선교사를 파송하게 됨.
1898년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게일[한국어를 한국 사람보다 더 유창하게 한 사람] - 선교회의 후원이 아니라 YMCA의 후원으로 입국.
1898년 러시아 정교회, 1904년 안식일교, 1907년 동양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성결교, 1908년 구세군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국내선교활동 시작.
☞ 한국선교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사실.
1. 거의 같은 시기에 다양한 선교회가 입국하여 한국 개신교 선교를 시작함.
2. 장로교는 네 개의 선교회가, 감리교는 두 개의 선교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입국함으로서 장감선교회가 거의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함.
3. 천주교가 직접적인 선교방법을 택한 반면 개신교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것.
◎ 영아소동사건
1888년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유아들을 유괴해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폭동으로 발전한 사건.
개신교는 천주교와 달리 선교초기부터 고종의 윤허를 받고 왕실의 총애와 보호를 받으며 시작 - 1888년 4월 금교령이 내려짐 - 일차적인 이유는 천주교가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 - 천주교가 현 명동자리에 대성당을 건축하고자 하였는데 이 성당이 궁전보다 높은 곳에 세워질 계획이었으므로 왕실이 휜히 내려다보이는 것을 조정에서 반대함 - 건축 중단을 요구하였으나 천주교가 거부하고 강행함 - 전도금지령으로 악화됨.
이 금교령의 와중에 영아소동사건이 발생(1888년5-9월) -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증폭되면서 터지게 됨 - 외국공관은 아이고기를 먹는 곳으로, 병원은 범죄의 소굴로 지목됨 - 당시 왕실과 가까운 선교사들은 영아소동이 민비를 획책하는 적들이 고의로 일으킨 사건으로 분석하고 있었음 - 왕실이 외국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자 대원군은 위정척사파를 등에 업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외국인에 대한 폭동을 유도하였던 것.
▶ 하나의 조선교회 설립논쟁
1893년 장로교 공의회 조직 -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하자는 목적 - 북,남,호주장로교가 결의 - 1905년 9월 15일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 소속 150여명의 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기독교회를 한국에 설립하려는 목적으로 장감연합공의회를 조직함 - 이미 성서번역과 기독교교육, 문서선교와 의료선교에서 연합사업을 실시하고 있었음 -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장로교 선교회와 김리교 선교회가 함께 발족하여 1900년에 신약을, 1910년에 구약 번역을 완료 - 이것을 구역이라 하고 이를 보완한 1937년의 성경을 개역이라 함 - 장감연합 공회는 1906년 평양숭실 대학을, 1914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을, 1916년에는 연희전문학교를 공동으로 설립해 운영함 - 그러나 장감연합 공회는 본국 선교회의 반대와 각 선교회의 개별 선교사업의 성공으로 인해 무산됨 - 부흥운동을 통해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각자의 사업강화에 열중함 - 1907년 장로교가 독노회 조직하고 7명의 목사를 배출하고 같은 해 감리교는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여 독자적인 틀을 마련함 - 교회가 커갈수록 교파통일은 더욱 멀어짐 - 오늘날 교파와 교단이 난무한 이 시대에 하나의 조선교회 설립 노력을 다시 상기하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 본국선교회가 반대한 이유 3가지
1. 보수적인 장로교와 현대주의 입장을 지지하는 감리교의 신학적 입장의 차이.
2. 총체적인 하나님나라 확장의 관점보다는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교단의 이익을 대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3. 칼빈주의(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체계에 기초한 장로교와 알미니안(구원받은 사람도 행위로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다) 주의에 기초한 감리교가 어떻게 하나의 독립적인 교단을 설립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
▶ 개신교 선교정책
초기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은 의료 및 교육선교, 성경번역, 연합사업, 그리고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대변할 수 있다.
◎ 의료 및 교육선교
장로교 선교사 알렌이 주축이 되었던 광혜원이 장로교 선교사 중심으로 운영되자 스크랜톤이 1894년 감리교 상동병원을 세워 독립함 - 의료 선교는 민중과 정부 양쪽의 마음을 사로잡는 계기가 됨 - 알렌이 미국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1년에 20529명을 치료한 것으로 나타나 있음 - 당시 한양의 인구가 30-50만 명이었으니 이것은 엄청난 숫자.
1885년 배재학당, 1886년 5월에 이화학당 설립 - 고종이 ‘인재를 배양하는 학당’이라는 의미로 배재학당이라 친히 이름을 지어 주었고, 명성황후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어라’는 의미로 이화학당 교명을 지어줌 - 1910년까지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 37개교를 설립함.
◎ 성경번역
초기에 한글성경을 완성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로교인 - 한글 성경에 장로교 색깔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 - 한글 성서 번역이 한글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함.
◎ 선교지 분할
지나치게 불필요한 선교 경쟁을 피하고 선교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한국에 파송된 선교단체는 1893년 교계예양이라는 선교지 분할 협정을 체결함 - 이 체결에 의해 북장로교는 평안도 지역과 경상북도 지역을, 카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지역을, 호주선교회는 경남지역을, 그리고 남장로교는 전라도 지역을 맡음 - 한 지역을 한 선교회가 맡음을 통하여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장점과 더불어 오랫동안 한 선교지에 한 선교회의 신학만이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그 신학을 이데올로기화하는 폐단도 발생하게 됨 - 1930년대의 진보주의자들은 대부분 카나다 선교회가 담당했던 함경도 지역 출신들이었다는 사실 - 또한 선교지 분할정책은 지방색을 가속화시킨 폐단을 낳았고 구세군이나 침례교, 성결교등의 군소 교단이 선교지 분할 정책에서 소외되어 버린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 교계예양의 내용들
1. 5천명 이상의 도시는 공동으로 선교.
2. 5천명 미만의 도시는 이미 선교를 시작한 선교단체가 기득권을 가지며 6개월 동안 공석일 경우 타 선교회가 선교를 시작해도 좋다.
3. 가능하면 선교가 시작되지 않은 지역에 선교를 착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4. 서로 다른 교회를 존중함.
5. 다른 선교 지역으로 교인들이 이동할 경우, 자유의사대로 하되 반드시 목사의 추천서를 받는다.
6. 조사들에 대해서는 선교회가 직접적으로 보조금을 지불하지 말 것.
7. 모든 문서의 규격은 통일한다.
▶ 선교사들의 사상과 삶
진보주의 학자들은 한국의 근본주의 신학이 등장한 것은 1930년대 박형룡 박사의 등장 이후로 보지만, 보수주의 학자들은 선교사들의 신학이 상당히 보수적이었음을 강조한다. 보수주의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신학 사상을 소유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른 것이다.
◎ 선교사들의 출신학교별 분류
1. 맥코믹 신학교
사무엘 마펫 - 평양신학교 초대 학장, 1907년 총노회 설립시 노회장으로 선임 - 그의 아들 마포 삼락은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는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성경의 축자 영감이나 완전무오성을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주장.
스왈론(소안론) -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비롯한 여러 편의 찬송가를 작사
곽안련 - 찰스 알렌 클라크 선교사
2. 유니온 신학교
레이놀즈(이눌서) - 평양신학교 최초의 조직신학 교수
크레인 - 이눌서를 이어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한국에 최초로 무천년설을 가르침.
3. 프린스톤 신학교
로버트(라부열) - 1925년 평양신학교 교장
해밀톤(함일돈)
☞ 장로교 선교 초기에는 맥코믹 출신(부흥운동에 상당히 긍정적)들이, 1924년 라부열 선교사가 평양신학교 교장에 오르면서는 프린스톤 출신들이 기여함.
1837년 미국 장로교는 노예문제와 통합안 문제로 뉴 스쿨과 올드 스쿨로 갈라짐 - 뉴 스쿨은 어번 신학교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를 중심으로 진보적인 입장으로 흐르게 되었고, 올드 스쿨은 프린스톤과 맥코믹 신학교를 중심으로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됨.
▶ 선교 초기 폭발적인 교회성장
1884년 1명에 불과했던 선교사의 수가 1910년 206명, 1927년에는 323명으로 급증.
1907년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이 배출된 후, 1920년에 180명, 1930년에 400명, 1936년에는 524명으로 급증.
교회의 수도 1901년 199개, 1910년 1,157개, 1920년 1,738개, 1930년에 2,335개로 급증.
세례를 받는 교인수도 1890년 40명에서 1900년 1,086명, 1910년 10,082명으로 급증하다 1920년에는 5,603명으로 하강.
전체 세례교인수는 1886년 9명, 1900년 7,500명, 1910년 119,273명, 1920년 144,062명, 1930년 194,678명, 1936년 341,700명으로 급증.
◎ 한국교회의 급성장의 이유들
1. 전통종교들의 타락과 무능이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킴.
2. 리더쉽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과 유순성.
3. 불안한 시대에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4. 국왕의 호의.
5. 여성의 지위향상.
6. 한국인의 애국심이 교회를 통해 표출됨.
7. 신비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갈망이 부흥회를 통해 발산됨.
8. 서양에 대한 동경이 교회를 통해 수용.
9.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채택.
◎ 성경중심의 선교정책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 채택 -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거의 대부분 20대로서 선교경험이 부재 - 언더우드 26세, 아펜젤러 27세, 알렌 27세, 스크랜톤 29세, 게일 25세 등 -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갈망하던 중 중국에서 활동하던 네비우스 선교사가 1890년에 방한하여 2주 동안 세미나를 실시 - 이후 자립, 자치, 자전을 중심으로 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채택됨.
◎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내용들
1.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순회전도를 한다.
2. 모든 선교사역에서 성경이 중심에 되게 한다.
3.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게 한다.
4. 한국인 스스로가 교회를 치리한다.
5. 경제적으로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한다.
6.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한다.
7. 성경적인 권징을 엄격히 실시한다.
8. 다른 선교단체들과 연합하고 협력한다.
9. 법정 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는 간섭하지 않는다.
10 가능한 한 민중의 경제 문제에 도움을 준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부정적인 영향은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1910년대까지는 사회적인 책임과 복음이 균형을 이루었다가 1918년부터 1930년까지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지나친 강조로 사회적인 책임이 소원해지고 내세적인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됨.
◎ 성경중심의 교회교육과 신학교육
성경중심의 교회교육과 신학교육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구현 방법 - 그러나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평양신학교의 결점을 지적하자면 균형 잡힌 신학교육이 부족했다는 점, 지나친 교파주의를 심어주었다는 점,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만들었고 내세적인 종말신앙을 심어주어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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