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4)

문성식 2021. 4. 26. 19:57

 

      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4)

  
 
초기 기독교의 부흥과 수난
 
교회의 애국운동, 사회개혁활동, 항일운동
기독교는 한말 격동기에 안으로는 사회적 개혁이 요청되고 밖으로는 국가의 자주성 유지가 문제되던 시기에 전래됨 - 일반 서민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받기 위하여 입교하였고, 관료들 중에는 개화와 독립을 위하여 입교하게 된 사람들이 많음 - 초기 기독교인의 뚜렷한 의식 3가지 - 반봉건의식, 자주의식, 항일의식.
 
반봉건의식 - 기독교 교육을 통한 구습의 타파, 인간평등을 통한 사회신분 제도 타파, 노동의 신성 강조, 여권의 재인식과 성 차별의 철폐, 인권과 법에 대한 각성 - 감리교에서는 1895년 일부다처주의를 정죄하고 첩을 가진 자는 교인 자격이 없으므로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의함 - 황해도 평산 감바위교회에서는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쓸 것과 한 자리에서 식사할 것을 결정. .
 
자주의식 - 민족문자로서의 한글의 재인식과 그 보급활동 및 한국사에의 깊은 관심 - 국기 게양, 국왕 탄신일등의 애국적 집회개최, 독립협회등의 사회단체의 결성 및 그 참여도에서 확인됨 - 교회조직을 통하여 여론집약, 민중계몽, 정치적 결속을 시도하였다는 의의가 크다.
19019월 선교사들로 구성된 장로교 공의회에서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의 비정치화를 규정한 결의안을 채택함 - 1901-5년 사이 민족의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사회의식이 크게 내면화되고 이 내면화의 결과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등이 드러남.
 
항일의식 - 기독교는 항일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함 - 장로교 경우,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 총회가 조직되는 등 교단조직이 강화됨 - 이 강화된 전국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모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3.1운동도 전국적 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음 - 애국심의 표현으로 주일마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집과 교회에 태극기를 게양 - 위기의 순간마다 기도회를 개최 - 일제는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들을 항일의식을 선도하는 불순분자로 분류하게 됨 - 부정세금 불납운동, 조세저항운동, 일본 상품 불매운동, 국채 보상운동(당시 일본에 진 빚을 갚아야만 자주 독립국가가 가능하다는 취지에서 시작하였고, 운동의 방법은 2천만 전 국민이 3개월 간 금주, 금연을 하고 여인들은 식사 때에 반찬을 줄여 남는 돈을 모으자는 것) 그리고 조만식에 의해 주도된 물산장려운동.
 
통감부의 기독교 정책
정치는 통감이, 정신적 교화는 종교가 맡아야 한다는 정책 - 이등박문과 해리스간의 약속했던 내용 - 이 시기에 미국이 취했던 침략 방조적인 정책 - 1905년의 가쯔라-태프트 밀약등에 의해 지도급 선교사들은 친일, 반한적 태도를 보임.
 
일제는 1910년대부터 줄곧 일선동조론(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이다)과 그것을 정책화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를 강요했고, 조선어와 국문자의 사용 금지, 한국학 연구 중지등을 명했으며, 창씨개명과 태양신(일본 국조신)숭배를 위한 신사참배, 동방요배등을 강요함 - 이러한 민족말살정책에 대해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등은 국어수호운동으로, 남궁억, 안재홍등은 국사수호운동으로 저항함.
 
1907년 부흥운동과 영계 길선주
장님 길선주 목사 - 1869년 출생 - 1907년 최초 일곱 명의 장로교 목사 중 한 사람,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20년간 목회, 장대현교회를 시작으로 1907년 평양부흥운동이 일어남 - 평양 대부흥운동은 단순한 교회성장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회개와 각성운동이었음 - 한국교회에 새벽기도를 시작한 인물이며, 남녀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남녀 좌석 사이에 있던 포장을 철거하기도 함 - 도교에 심취하였던 젊은 시절의 고행으로 인하여 시력이 점점 상실됨 -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중 하나로 2년 간 옥고를 치름 - 부흥회를 인도하다 351118일 소천.
 
지성인의 기독교 비판
3.1독립운동 후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는 경향이 드러남 - 성경중심의 선교를 강조한 나머지, 사회적 책임을 간과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 - 이와 같은 교회의 태도 변화는 처음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협조적이던 지성인들과 사회단체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를 수정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들에 의한 기독교 비판이 거세게 일어남 -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였고, 비판적인 단체는 사회주의였다.
 
이광수의 야소교 비판
19177청춘지에 쓴 글 - 개신교회가 조선에 미친 영향으로 서양의 사정 소개, 도덕의 진흥, 교육의 보급, 여자의 지위 향상, 조혼의 폐지, 한글의 보급, 사상의 자격, 개성의 자각과 개인주의의 자각 등 여덟 가지를 지적.
191711청춘지에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결점이라는 글을 통해 기독교를 강도 높게 비판 - 조선교회는 계급적이고 교회지상주의적[교인 아닌 자는 악인으로 여기며, 세상학문을 천히 여기고, 종교적 이외의 사업을 천히 여김을 지적]이며 교역자가 무식하고 미신적이라는 4가지의 결점을 지적하면서 인류에 복리를 주는 사업은 다 하나님의 일일 것이외다....6일간에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하는 사업이 온통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외다. 차라리 6일간 봉사하다가 일요일에 안식한다함이 지당할 것이외다라고 주장.
1918년 매일신보의 글 - 금일 조선 사상계에 가장 조직적이요, 위대한 세력을 가진 자가 교회이며 유교의 조선이 장차 야소교의 조선이 되지 않을까 의심케 할 만큼 세력이 위대하다.
 
이광수의 비판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1. 기독교를 비판했던 그가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
2. 그의 비판이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 비판의 원인을 교회가 제공.
3.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이전의 태도와 달리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생겨났음을 반영하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
 
사회주의의 등장
조선에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전후의 일 -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주의와 반 기독교 운동을 통해 세력을 확장해 감 - 1927년 양주삼 목사는 코리아 미션 필드지에 교회는 이제 한국에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민족의 일반적인 태도는 전일과 판이하다. 이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충격이다고 토로 - 사회주의 세력들은 기독교가 사회의 변혁에 무관심하고 종교적 측면에만 심취되어 있는 것에 대해 비판을 제기.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 조선 사회당을 창당한 이동휘는 방향 잃고 기울어 가는 조선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대안은 기독교라고 외쳤던 인물이며, 김규식[새문안교회 장로]
과 여운형[평양신학교 출신]도 기독교 지성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 - 105인 사건
기독교인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주시경, 이승만, 신흥우 등이 독립협회 조직.
일제의 105인 사건 조작 - 데라우찌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내용으로 전국의 항일 지도자 700명을 체포, 구속후 122명 기소, 105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림 - 기소자 중 81명이 기독교인.
 
기독교와 3.1운동
1918820일 평양신학교 출신 여운형을 중심으로 신한 청년당이 조직 - 1128일에 파리 평화회의에 새문안교회 장로 김규식이 대표로 파견 - 간도, 일본에서의 독립선언 발표 후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기독교 자체로 계획을 세움 - 천도교측에서 함께 할 것을 요청하여 연합으로 하기로 결정 - 기독교 대표 함태영, 천도교 대표 최린, 불교대표 한용운을 결정 - 191931일 고종의 국장일에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정 - 33인의 대표는 파고다 공원으로 가면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한 연희학교 베이커 교수의 조언에 따라 태화관에서 별도의 모임을 가짐 - 이때부터 학생들과 어른들이 분리되어 독립만세운동을 벌임 - 33인중 기독교 대표가 16명이었고, 태화관에 모인 사람은 29- 양전택, 길선주, 정춘수, 유여대 불참 - 서울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지방의 각 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운동으로 발전 - 3.1.운동으로 인한 수감자 9.059명중 2.032명이 기독교인 - 전체의 22.4% - 일본의 조합교회는 조선총독에게 정부가 더 강력한 무력으로 위압해야 한다고 권고.
 
독립운동 후 교회가 독립운동가의 은신처와 자금 전달 역할을 감당 - 기독 여성들을 중심으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둑립군을 돕다 심한 고초를 당하기도 함 - 3.1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외세종교가 아니라 민족종교로 인정을 받게 됨.
 
3.1운동 후 기독교인의 양분
3.1운동 때 비폭력으로 만세를 불러도 외국에서 도와주지 않아 많은 희생만 발생하게 되자 무기를 들고 독립을 이룩하자는 무장단체들이 결성 - 기독교인들도 여기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전체 교회의 흐름은 조국 독립에 대한 소망을 상실하고, 현실도피주의, 개인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며 교회의 생존에 역점을 두는 경건주의적 비사회참여의 경향이 강화됨 - 이러한 결과로 신비주의 부흥운동이 강화됨 - 교회가 독립운동을 포기하자 이 공백을 사회주의자들이 이끌고 감 -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계속하였고 이후 6.10만세 운동도 주도 - 교회생존에 역점을 두었던 교회는 결국 신사참배결의로까지 나아갔고 교회는 일제의 앞잡이 단체로 전락하게 됨 - 반대로 교회의 타락에 분노하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게 됨 -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에 이동휘가 가입했고, 여운형은 전도사직을 포기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해방정국에서는 최문식 목사가 대구폭동을 주동했고, 이재복 목사는 14연대 반란을 주동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