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5)
● 1920-30년대의 다양한 신학사상
개신교 선교초기부터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와 공존하고 있었음 - 소수의 뉴욕 유니온 출신들과 신학교 출신이 아닌 의료, 교육, 여자 선교사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 - 1910년 미 북장로교 선교부도 현대주의 성경관을 가진 소수의 선교사가 한국 선교지에 있음을 인정함 - 현대주의자들은 과학적 사고와 일치하는 기독교, 이성과 일치하는 합리적인 기독교를 모토로 내검.
◎ 김장호 자유주의 논쟁
한국인 최초로 자유주의적 주장을 한 사람이 김장호 목사 - 자유주의가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 평양신학교 출신이며 가장 일찍 개신교를 받아들인 황해노회 소속인 김장호 목사에 의해 촉발됨으로 한국교계가 주목하게 됨 - 김장호 목사는 1918년 12월 6일 황해노회로부터 이단자로 낙인 찍혀 제명됨 - 그는 모세의 홍해기사를 밀물과 썰물의 간만의 차에서 생긴 자연현상으로 설명하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나눈 나눔의 식사라 주장하며, 성경에서 말세, 재림, 부활이라는 단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 - 현대과학과 일치하는 참된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과 모순되는 초자연적 특성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 - 김장호 목사가 이런 사상을 가지게 된 원인은 현대주의 사상가였던 공위량 선교사 밑에서 조사로 있었기 때문 - 김장호 목사는 제명되기 전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며 민족주의적 조선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조선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만주 길림에 교단신학교 길림신학교를 설립 - 창립목적 2항을 보면 ‘각국 각파의 선교사가 들어와서 제각기 제 교파 세력을 증강시키느라고 분쟁이 벌어져서, 민족을 분열 이간한다. 이 폐단을 막고 우리나라 사람끼리 교파를 세워 민족정신을 통일하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 그러나 출발 당시부터 친일적인 색깔로 가득함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의 주체성을 외쳤던 본래의 취지가 상실됨.
◎ 다양한 신학사상의 등장
1930년대는 새로운 신학이 등장했던 신학적 다원화 시대 - 박형룡의 소위 정통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정경옥의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 시대 - 여기에 이용도의 신비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도 등장 - 1930년대는 신학적 전환의 시대, 혼돈의 시대, 신학적 변천의 시대라 명명됨.
일제는 3.1운동후 문화정책으로 통치방법을 변경 - 소수의 엘리트를 육성시키고, 그들이 한국인들을 일본화 교육시켜 한국을 지배하겠다는 정책 - 이 정책시행 후 일제는 유학을 장려 - 유학의 주요 대상지는 일본과 미국 - 이때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시기가 1930년대 -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에 의해 바르트 사상과 진보 사상이 소개 - 감리교는 일찍부터 최병헌을 중심으로 전통 종교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다 1930년대 정경옥의 영향으로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문구가 강조 - 기독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계시에서 체험으로 바뀜 - 일반고등교육을 통해서도 현대주의가 유입되었고, 특별히 카나다 연합선교회가 현대주의 사상을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함.
◎ 장로교의 신학적 혼란시대
최초의 신학박사며, 최초의 한국인 평양신학교 교수며 신학지남 편집장이었던 남궁혁 박사가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을 특별기고라는 이름으로 신학지남에 글을 쓰게 함 - 1934년에는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감리교에서 아빙돈 주석을 발행하였는데 이때 장로교 소속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목사가 합류했음이 밝혀지면서 총회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됨 - 이 시기에 장로교의 지도적 인물인 김영주 목사가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을 거부했고, 김춘배 목사는 여성을 옹호하는 글을 기독신보에 기재해 논쟁을 일으킴.
◎ 신학지남 논쟁
신학지남이 1930년대 신학논쟁의 불을 지핌.
1. 김재준
일본의 청산학원과 미국 프린스톤, 웨스턴신학교에서 수학 - 1930년대 초부터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교사로 있으면서 신학지남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 - 자신의 사명을 ‘정통주의로 통조림된 한국 장로교회에 어딘가 숨쉴 구멍을 티워주는 것’이라 생각 - 1935년 1월호 권두언에서 일년 전 선교 50주년을 맞아 성대하게 자축하며 기뻐하던 선교사 주도의 한국장로교회를 가리켜 ‘쉰한 살 먹고도 삼촌덕에만 살려는 못난 아들’이라고 평함.
2. 채필근
비교종교학에 관한 글들을 기고 - 1931년 11월호에서 ‘우리는 모든 종교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국제평화의 실현에 관한 것인 한에서 모든 종교는 협력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는 평화선언안을 소개 -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한 치에 관용도 없는 정통주의에 대해 관용을 베풀라는 충고도 주장 - 이후 신사참배를 주도한 일본 앞잡이가 됨.
3. 송창근 - 가장 강도 높은 비판자
조선교회의 가장 큰 문제를 윤리문제로 봄 - 한국교회의 정통주의를 가리켜 ‘위선자요 형식주의자요 이십 세기 바리새인들’이라고 비판 - 일반적으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신조의 지적승인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교회를 향해 믿음은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강조 - 1935년 신학지남 ‘감격의 세월’이라는 교계평론에서 ‘예배당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목사 주택을 지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부흥회를 열어야 겠습니다. 성신이여 강림하사....그대들은 성신이 그대들의 소사인줄 아느냐?’라는 원색적인 비판을 가함.
4. 박형룡
박형룡은 선교사들의 신앙을 그대로 지켜내는 것을 시대적 사명으로 인식 - 신학적으로는 근본주의 -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성과도 결부되어 있던 근본주의 신학은 1900-192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일종의 변형된 정통주의 - 박형룡은 3명의 신학지남 기고에 반대하여 편집위원을 사임하고 반대여론을 불러일으킴 - 그 결과 총회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1935년 5월 송창근과 김재준의 글이, 1935년 9월 채필근의 글이 마지막으로 신학지남에 실림 - 1930년대는 신학적 입장에 따른 전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
김재준의 삶이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편.
박형룡에 대한 다양한 평가 - 전투적인 근본주의자(유동식), 칼빈주의적 근본주의자(신복윤) - 공통점은 ‘근본주의자’ 라는 것 - 박형룡은 현대주의에 대해 전투적 자세를 지닌 근본주의를 기독교 자체로 이해- 특별히 성경의 권위를 변호하는데 집중 - 그가 프린스톤에서 유학하던 1923-26년이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의 논쟁이 미국에서 가장 극심했던 시기 - 메이첸 밑에서 공부한 그는 제2의 메이첸이 되어 한국의 보수주의를 변호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게 됨 - 구 프린스톤의 신학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신학자의 소명이며 그것에서 벗어나는 자야말로 신학을 변질시키는 인물로 이해 - 그의 영향은 한국교회에 반문화주의, 반사회주의를 심화시키게 됨 - 한국의 신학적 보수주의가 신학적 폐쇄주의로 치닫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 - 그는 복음주의 조차도 신복음주의로 매도하면서 자유주의와 같은 맥으로 이해 - 이런 원인 중 하나는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비롯 - 시대가 변해도 박형룡은 늘 1920,30년대 미국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
◎ 아빙돈 단권 주석 논쟁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해 감리교에서 출판한 아빙돈 단권주석에 대해 감리교는 환호했지만, 장로교는 교단적 차원에서 목회자들이 그 주석을 구매하지 말 것을 결정 - 아빙돈 단권 주석은 이 땅에 소개된 최초의 주석 - 이 주석번역시 장로교의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목사가 참여한 것이 문제의 발단 - 아빙돈 단권 주석은 당대의 비평학을 과감하게 수용하였고, 따라서 성경을 오류가 있지만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들임 - 총회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기반한 주석의 번역작업에 참여한 4명의 목사들에게 번역에 참여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을 것과 재판시 자신의 글을 빼겠다는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으나 채필근 목사만 이에 동의하고 나머지 3명은 ‘전체 번역과 편집작업에 관여한 바 없고, 자신들이 번역한 내용에는 문제 될 것이 없으며 다만 자신들의 글로 인하여 교회가 소란해 진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신학지남에 발표함 - 이 주석사건으로 인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입장이 확연하게 드러났으며 장로교 안에서도 동질감이 상실되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게 됨.
◎ 창세기 저작권문제와 여권논쟁
서울의 남대문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영주 목사가 모세의 오경저작권을 부인하고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가 교회내 여권문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 - 여자는 잠잠하라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당대에 한 지방교회에 국한된 바울의 조언이며 따라서 이 시대의 교회는 여성들의 지위를 현실화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 - 이 주장들로 인하여 총회는 1934년 23회 총회 때 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목사면직 등 강경하게 대응함 - 결국 김영주, 김춘배 목사는 총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번복하게 됨.
참고로, 가장 먼저 여성안수를 인정한 교단이 감리교(1931년부터 여성목사 배출) - 그 다음이 기장(1975년), 예장 통합(1996년)이 뒤따름.
◎ 적극신앙단 논쟁
1932년 YMCA총무로 있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적극신앙단 운동은 탈선교사, 탈보수주의, 탈서구화, 탈전통을 내세우며 기독교 토착화를 주장 - 기존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교단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이 단체에 적극 참여 - 신흥우가 속해 있던 감리교에서 먼저 이 운동을 배척하기 시작하였고 장로교는 1935년 총회에서 이 운동이 장로교 교리에 배치되는 위험한 단체이며, 따라서 모든 장로교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이 여기에 가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림 - 이 운동은 신흥우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친일적인 성격으로 결국 실패함 - 주도인물이었던 전필순, 정춘수, 박희도 모두 1943년에 조직된 조선혁신교단에 앞장섰던 친일파였고, 이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음.
◎ 이용도 목사와 이단성 문제
남에게 배우고자 했던 ‘학생심’의 소유자 이용도 목사가 교계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은 그의 사역 말기의 일 - 1932년 가을 입신상태에서 예언을 하던 신학교 여성 유명화를 가리켜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퍼지면서 이용도를 이단으로 의심하기 시작 - 이용도 목사는 이들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예언자들로 믿고 그들의 신탁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됨 - 이용도가 이들 예언자들을 인정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의 생활이 건전했기 때문 - 길선주 목사는 이들의 예언이 성경과 별도로 감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하면서, ‘마귀의 역사’ 라 규정 - 또한 이용도 목사의 소개로 평양 교계에 소개됐던 한준명 목사를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 사기꾼,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로 비판하면서 이용도 목사도 비판하게 됨 - 이용도 목사는 기성 교단의 핍박을 받는다는 이유로 한준명 목사를 수용하여 줌 - 이용도는 ‘99가지의 흠이 있어도 한 가지 좋은 점을 사랑하여 전체를 사랑한 무차별적 사랑의 사람’이었다고 변종호는 변호.
◎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1930년대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와중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준 인물이 바로 김교신 - 일본에서 유학했으면서도 친일로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조선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민족주의자이자 교회의 제도와 가견적인 교회관을 거부하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주창하며 기성교회를 주저하지 않고 공격했던 예리한 비평가 - 일본에서 우찌무라 밑에서 공부하고 동료인 정상훈, 함석헌, 송두용, 류석동, 양인성과 함께 귀국 후 성서조선을 창간 - 1942년 성서조선 158호 권두언 ‘조와: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이 문제가 되어 성서조선이 폐간되고 1945년 45세의 일기로 소천.
성서조선 창간호에서 ‘우리는 오직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고 주장 - 끝까지 창시개명을 거부하고 서양선교사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 - 1936년에는 ‘내가 내촌선생에게서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서의 진리였다’고 고백 - 1927년 7월 창간사에서 ‘그리스도보다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고 기록 - 구원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 무교회주의의 사명으로 봄 - 기성교회가 갖기 쉬운 지나친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고 단순한 예배당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임 자체를 교회의 신성한 본질로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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