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2)
▶ 개신교 선교 이전 서양문화와의 접촉
한국선교를 타진하는 흔적들은 16세기부터 끊임없이 역사속에 등장.
1627년 경주 앞바다에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박연) - 군사훈련을 받고 병자호란에 참전 -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여인과 결혼하여 1남1녀까지 둠 - 최초의 귀화 서양인, 최초의 혼혈아 출생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음 - 배의 난파로 표착하는 외국인들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으로 일하며 조선에서 생활.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 - 군복무 수행 - 1666년 13년만에 하멜과 일행 8명이 여수를 떠나 나가사끼로 탈출 - 표류기를 저술 -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선교후보생들에게 유용한 한국입문서가 됨.
1816년 군함을 이끌고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입국한 영국 해군대령 머리 맥스웰과 바질 홀 - 본국으로 돌아간 후 한국을 유럽전역에 소개.
● 선교사 내한 이전의 개신교와의 접촉과 한국선교의 특징
▶ 한국개신교의 사상적 구분
1] 1930년 이전
한국교회를 주도한 중심세력은 선교사들.
만주 우장에서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하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 - 의주청년들의 선교활동의 밑거름.
2] 1930-1960년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교회로 리더쉽이 전환 - 1919년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은 해외 유학을 장려하게 됨 -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30년대의 한국교회의 리더쉽을 형성 - 박형룡[구 프린스턴의 메이천 밑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구 프린스톤의 변증학적 전통과 반현대주의 사상을 전수받음]의 정통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정경옥의 자유주의, 이용도의 신비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등 다양한 신학조류가 등장하여 신학적 다양화의 시대로 접어듬 - 반선교사, 탈서구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 - 김교신의 성서조선처럼 우리의 기독교를 찾으려는 강한 욕구가 표면화되기 시작.
◎ 감리교
1930년대 이전 한국감리교회는 장로교의 영향, 부흥운동의 영향, 아펜젤러와 같은 복음주의적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복음주의 신앙이 대체로 지배하고 있었음 - 1934년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감리교에서 출판한 아빙돈 단권주석이 자유주의 분위기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 -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라는 두 모토 - 정경옥을 중심으로 이 세상 속에서의 문화적 책임을 강조하는 문화-자유주의의 경향으로 흐르기 시작.
한국의 전통종교인 유교와 기독교를 접목시키려 했던 최병헌의 교회의 토착화는 문화변혁이라는 감리교 신학사상의 중요한 원형을 형성.
◎ 장로교 진보주의
김재준 중심 - 카나다 선교회와 소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상적인 맥을 계승.
1938년의 평양신학교 폐교와 1940년의 조선신학교 설립.
3] 1960년대 이후
교파를 초월해 토착화운동, 근본주의운동,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를 주도함.
1962년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라는 유동식 교수의 논문에서 시작된 토착화 논쟁은 1970년대 윤성범 교수의 성(誠)의신학(기독교와 유교의 진리체계를 접목시킨 신학), 서남동 교수와 안병무 교수의 민중신학과 감신의 변선환 교수의 종교다원주의를 거치면서 한국교회의 한 신학조류로 정착.
근본주의는 토착화 신학을 반기독교적 사상으로 정죄하고, 복음의 적용을 강조하며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운동도 동시에 경계 - 반지성주의, 폐쇄주의, 반사회주의적인 성향, 교권주의, 반문화적 성격.
▶ 개신교 선교준비
한국선교는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이루어진 적기상태에서 시작됨 - 19세기 말엽 한국은 종교적으로 공백기 상태.
◎ 칼 구출라프 선교사
미국의 2차 대부흥운동, 유럽의 경건주의 부흥운동, 영국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으로 19세기 중엽 유럽과 북미 나라들은 선교의 붐이 동시에 일어나 세계선교가 가속화됨 - 그러나 선교사들이 자국의 힘을 바탕으로 선교를 추진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두 사람 - 1832년의 칼 구출라프 선교사, 1866년의 토마스 선교사.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개신교 선교사 구출라프는 충정도 호주만 앞 고대도에 도착하여 국왕에게 통상을 원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냄 - 회신을 기다리면서 주민들에게 감자씨를 주며 파종법과 재배법을 가르쳐 줌 - 주기도문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 - 1달 후 왕실로부터 조선은 중국황제의 허락 없이는 어떤 외국이나 외국인과 통상할 수 없다는 전갈을 받고 떠남.
◎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1866년 미국상선 제너랄 셔먼호에 통역 겸 안내자로 승선하여 조선에 입국 -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국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무역이 금지됨 - 셔먼호는 무역선이면서도 중무장을 하고 있었음 - 물러가라는 명을 어기고 내륙 깊숙이 침투함 - 셔먼호가 조사를 하려고 배에 오른 이현익을 억류하자 상호간에 접전이 벌어짐 - 불에 타 배가 전소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는 물로 뛰어 들어 헤엄쳐 뭍에까지 왔으나 병졸 박춘권에 의해 27세로 죽임을 당함 - 죽임을 당하면서 병졸 박춘권에게 한문성경을 건네주었고 박춘권은 이후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안주교회 영수가 됨 - 토마스가 남긴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넙다리골 예배당이 됨.
◎ 국내 정치 상황
1866년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나서 국내의 최고의 이슈는 개항 - 이 문제와 관련된 3가지 입장, 위정척사파, 동도서기파, 급진개화파가 존재.
1] 위정척사파
대표적 인물로 이항노, 기정진, 김평묵, 최익현 - 보수적인 민족주의 입장 - 개항은 망국의 길 - 기독교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 - 기독교를 위험한 종교로 본 이유는 기독교가 동양의 전통적 위계질서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고 보았기 때문 - 남녀가 평등하다는 기독교 정신이 위계적 구조인 유교사회와 충돌을 일으킴 - 전통문화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었던 위정척사파는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음.
2] 동도서기파
대표적 인물로 김윤식, 김홍집 - 온건한 개화를 주장 - 모델로 삼은 것은 중국 -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음.
3] 급진개화파
대표적 인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 일본을 모델로 하여 급진적 개화를 하자고 주장 - 서구문화의 근간인 기독교를 수용할 것을 주장 - 양반제도 타파를 주장 - 양반의 세력이 피지배층에 비해 너무 많기 때문에 이것이 조선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주장 -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박영효,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 - 박영효가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림 - 오늘날 천주교와 야소교가 왕성한 구미 각국은 그 나라가 가장 강하고 왕성한데 우리의 조선 유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둘 다 쇠퇴하여 이 때문에 국세가 침약하였으므로 한심하고 탄식할 따름이다는 내용 - 불교신자인 김옥균이 서구문명이나 기독교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던 것이나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조선선교를 호소한 것은 기적 같은 일.
◎ 만주에서의 준비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 처남 매부지간 - 로스는 1874년 고려문을 방문 - 고려문은 공식적인 통로로 청나라와 조선이 일년에 네 차례 시장을 열었던 지역 - 거기서 이응찬을 만남 - 이응찬이 로스의 한국어 선생을 하게 됨 -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서 의주 청년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만남 - 1976년 이들 네 명은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 한국 개신교 신자가 된 첫 번째 사건 - 서상륜이 1879년, 김청송이 1883년 세례를 받음 - 이들 6명의 공헌으로 존 로스 번역본이 1882년 누가복음, 요한복음, 1884년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이후 1887년에는 ‘예수성교젼서’즉 신약이 완간됨 - 존 로스역은 서상륜역이라 할만큼 서상륜의 공이 큼 - 한문이 전혀 없는 순 한글로 번역 - 이들은 번역후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권서(성경책을 갖고 다니며 사 보라고 권면하는 사람)와 매서(성경책을 팔고 다니며 전도하던 사람)가 됨.
1] 김청송
고향 집안현으로 돌아와 쪽복음을 동네에 배포 - 1884년 75명이 로스에게서 세례를 받음 - 조선에 공식적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던 해에 이미 75명이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음.
2] 이성하
고향 의주에서 복음증거 - 건강악화로 백홍준이 그의 사역을 계승함 - 백홍준은 로스를 비롯 외국인과의 내통 사실이 드러나 1893년 검거후 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 옥사함 - 최초의 공식적인 개신교 순교자가 됨.
3] 서상륜
황해도 송천리에 자리잡음 - 송천리에 소래교회가 지어짐 - 1885년 60명의 교인이 소래교회에 있었음 - 1887년 최초의 장로교회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당시, 설립 멤버 14명 중 13명이 서상륜과 서경조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었음.
◎ 일본에서의 준비
이수정을 통한 복음의 준비 - 일본의 농업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1882년 일본으로 건너감 - 거기서 율전 박사를 만나 그의 인격에 매료됨 - 율전박사가 안천영이라는 일본 목사를 소개해 주었고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로부터 세례를 받음 - 이후 한문성경에 토를 단 현토성경 ‘신약성서 마가전’을 1884년 11월에 출판 - 1883년 12월호와 1884년 3월호 ‘미션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에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냄 - 언더우드가 한국을 향해 오던 중 요코하마에 들려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옴 - 그 어느 나라도 선교사가 입국할 때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와서 선교를 시작한 경우가 없음 - 갑신정변 후 외국유학생을 소환하는 소환령을 조정이 내림 - 이수정도 1886년 5월 28일에 귀국 - 일본에서의 한국선교 호소로 개화파로 분류된 이수정은 귀국후 바로 처형 - 백낙준은 이수정이 귀국 전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고 주장.
☞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사실.
1. 한국의 선교는 성서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
2.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
3.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
4. 하나님께서 한국선교에 대해 깊이 개입하시고 일하여 오셨다는 사실 - 불교신자 김옥균이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이 기독교라고 외치고,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이 세례를 받고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주인을 위해 활동하겠다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며 일생을 헌신하였던 사실.
5. 한국의 고위층 위정자들이 기독교를 반대했던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 문화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로 인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한다고 믿었기 때문.
6. 한국의 왕실이 공식적인 개신교 선교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개신교 선교를 묵인하고 있었음 - 명절 때 선교사들에게 왕실의 선물이 전달된 사실.
◎ 쇄국정책에서 개항까지
불란서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의 침략 사실과 독일상인 오페르트에 의한 분묘 도굴사건은 조선의 서양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가중시켜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의 결의를 굳히는 계기가 됨 - 대원군(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를 호칭하던 말)의 전제적인 강압정치는 적지 않은 반발을 초래함 - 유생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며 시작된 반대원군 정서로 인하여 대원군 하야 - 대원군의 하야로 열강들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
1876년 2월에 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 -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맺어진 불평등 조약 - 조약 체결 후 20개월 이내에 부산항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할 것[1880년 원산항 개항, 1883년 제물포항 개항], 일본 상인들의 세제와 주거에 대한 편의제공, 일본인들의 해항측량등 제공, 일본인의 범법행위에 대한 재판은 일본공사가 맡는다는 내용.
◎ 일제의 한국침략
1894년 7월 청국군이 한국에 상륙한 것을 빙자하여 1만 여명의 병력이 한국에 상륙 - 8월 1일 청국에 선전포고 -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의 횡포는 더욱 극심해짐 -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 1905년 9월 5일 러일강화조약 체결 - 내용은 ‘일본은 한국에 정치, 경제, 군사의 우월권을 취득한다’는 것.
◎ 친일파와 한일병합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 체결 - 을사5적 -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1906년 2월 조선통감부 설치
1907년 7월 18일 고종황제 강제 퇴위후 아들 순종을 제위에 오르게 함 - 정미 7조약 체결 후 군대 해산, 헌병 해산 등으로 한국을 완전히 장악.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후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격하시키고 조선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승격시킴 -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찌 임명 - 국내 모든 항일단체가 해산되었으나 교회만 현존하게 됨 - 병합당시 기독교는 1,900교회 20만 신자, 755개의 기독교 학교와 3만여 학생, 230명의 교역자가 있었음.
◎ 조미조약과 미국에서의 선교준비
청국의 관리 이홍장에 의해 조선과 미국의 수교가 주선 -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 당사자 조선이 배제되고 청국의 이홍장과 미국의 슈펠트가 체결 - 1882년 6월에 영국 및 독일과 조약 체결, 1884년 6월 러시아, 1886년 불란서와 조약 체결.
1883년 7월 수구파의 거장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 파견 - 서구문명의 발전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음 - 시카고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가우쳐 목사를 만남 - 민영익과의 대화중에 조선에 대한 선교가능성을 확인한 가우쳐 목사가 일본의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보냈고 매클레이 선교사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김옥균의 협력을 얻어 고종으로부터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는 해도 된다는 답신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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