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1)

문성식 2021. 4. 26. 19:44


 

      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1)

 
  
  카톨릭 선교 이전 기독교와의 접촉 가능성
경교의 당나라 전파 - ‘광명의 종교란 의미의 경교(景敎)라 부름 - 왕실의 보호속에 200년간 선교의 영역을 넓히다가 9세기 중엽 열렬한 도교 신자였던 무종이 등극하면서 외래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 - 경교의 역사도 종말을 맞기 시작 - 당나라와의 잦은 교류 과정에서 경교의 신라 유입의 가능성을 추측하기도 함 - 유입의 몇 가지 증거로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마리아의 모습을 닮았다는 관음상, 해남 대흥사에 있는 동십자가 등을 들기도 한다.
 
경교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제3차 전교회회의에서 당시의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 불러야 된다고 주장 - 이단으로 정죄받음 -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인정하고 부르고 있었음 - 알렉산드리아 감독 씨릴이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며 문제를 제기 - 당시 정통적인 기독교도들은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갖춘 분이라는 신인일체사상을을 가지고 있었으나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실체적인 결합보다는 외형적인 결합으로 보면서 예수님을 두 가지 인격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 추방된 이후 피난처를 찾아 각지에 흩어져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들을 파송 - 로마와 페르시아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영토안에서는 그 지역 산물인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채택함 - 중국에 도착한 것이 주후 635년의 일 - 당나라 태종 9- 781년 경정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건립 - 대진은 로마를 가리키며, 로마의 기독교(경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을 기념하는 비라는 뜻.
 
임진왜란과 천주교회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의 일본 선교 - 통치자였던 직전신장의 관대한 종교정책으로 크게 확장 - 그의 휘하 장군 중 소서행장이 아우구스티노라는 영세명을 가진 카톨릭 신자였고 부산에 상륙한 일본 군인 중 10% 가량이 카톨릭 신자였을 정도 - 소서행장의 거느렸던 18,000명의 부대는 천주교부대로 알려짐 - 부대는 소서행장의 요청에 종군 신부로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옴 - 한국에서의 전도 기록은 없으나 당시 노예로 일본에 끌려간 5 만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을 전비 조달을 위해 일본은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는데, 세스페데스가 이 일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고자 하였고, 한국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고, 교리를 가르쳐 2천명의 기독교 신자를 배출하게 됨 - 이들 중 상당수가 천주교 박해시 순교를 당함.
 
중국에서 소현세자의 천주교 접촉
만주 여진족의 추장 누루하치가 1616년 후금을 세운 후, 1636년 국호를 청이라 칭하고 조선을 침략(인조14) - 삼전도에서 치욕스러운 조약을 맺음 - 조선은 청나라의 종자가 되어 조공을 바치고, 명나라와 단교하겠다는 내용 - 정복의 상징으로 소현세자를 비롯한 충신들을 포로로 잡아감 - 거기서 독일인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을 소현세자가 만남 - 전통적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선교전략을 가진 천주교의 입장에서 앞으로 조선의 왕이 될 소현세자의 전도는 큰 사건이었음 -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 신앙이 돈독한 환관5명과 궁녀 몇을 황제가 하사하는 형식으로 달려 보냈으나 귀국한지 70일만에 학질로 34세에 임종 - 세자 죽음이 중국에서 가져 온 비단 때문이라는 소문으로 그가 가져온 서적이나 물품들이 모두 소각되고 달려 온 사람들도 본국으로 소환됨.
 
유학자들의 서학 접촉
기호 지방의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소장 지식인들 중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이벽, 이승훈등을 중심으로 과학 서적과 서구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함 - 이들이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당시로는 혁명적 행위였는데, 유교의 철저한 계급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강조하고, 천주를 모든 것보다 최상의 위치에 두는 것은 절대왕권을 상대화하는 혁명적 사상이었음.
 
 
한국 천주교회의 창시와 수난의 역사
이승훈의 영세
영세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며, 7성례의 시작.
이승훈은 중국에 파견된 동지사 일행으로 함께 가 17842월에 예수회 소속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수세자가 됨 - 영세명은 베드로였고, 그의 나이 27- 국외에서 신부를 찾아가 신앙을 고백하고 영세를 받는 케이스 - 1784년은 개신교 전도가 시작된 1884년보다 100년전의 일.
 
초기 천주교의 태동과 가()성직시대, 그리고 배교의 역사
이벽은 이승훈에게서 영세를 받고 그를 신부로 하여 명동의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 - 1787년에 서품받지 않은 평신도가 성례를 집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북경에 신부를 보내달라고 요구하게 됨 - 최초로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였고, 그 이전에는 사제 없이 계속 비밀예배모임을 가짐 - 비밀예배모임을 갖던 중 관가에 적발 - 양반자제들은 훈방하여 방면하고, 중인인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를 보냄 - 고문 후유증으로 그곳에서 178737세 때 임종 -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함 - 이 사건 후 이승훈, 정약용, 이벽이 배교함 - 고문의 무서움과 난을 피해 은신하던 중 굶주림을 참지 못해 배교한 사례가 많음.
 
신해교난 - 무군부무(無君無父)의 종교로 오해받음
1785년 유하원이 상소를 올림 - 그 내용중 천주교는 왕보다 교황에게 복종하라는 것과 무군무부의 종교라는 비난이 담겨 있었음 - 이것을 입증하는 사건이 발생 -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발생한 진산사건 - 윤지충, 권상연이 이 일로 처형당함.
 
 
기독교와 조상숭배문제
제사를 죽은 부모에 대한 단순한 효성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죽은 영혼을 신격화하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볼 것이냐가 선교초기부터 제기되었던 문제.
기독교가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조상제사문제.
존 로스 선교사는 1888년 런던 세계선교대회의 보고에서 대원군은 만약 백성들에게 옛 조상숭배를 지키는 것을 허용한다면 3년 안에 전 한국이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믿었다고 보고함 - 기독교를 반대한 일차적인 이유가 바로 전통적인 제사제도를 반대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내용.
 
천주교와 제사문제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유교적 지식인들에 의해 전래 - 지식층에 호소력이 있었고, 천주교의 가르침과 유교의 가르침이 상호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이해.
1601년 중국선교를 시작한 천주실의의 저자 마태오 리치는 조상숭배는 천주교의 본래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 - 그러나 후에 중국 선교를 시작한 도미니칸 선교회나 프란시스코 선교회는 이단 행위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반대 - 1715년 교황 클레멘트 11세가 유교적 조상숭배는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내림 -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조상 제사를 인정한 예수회를 해산시키고 소속 선교사들에게 소환령을 내림 - 1790년 한국 천주교는 북경주교 알렉산더 고베아에게 조상제사 문제에 대한 자문에서 조상제사는 미신이므로 금해야 한다는 답을 들음 - 1791년 천주교도인 윤지충이 모친 상때 상례를 갖추지 않고, 친척인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일로 사문난적(유교사상을 어지럽힌 적)이라 하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됨 -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반국가 이적 단체로 낙인 찍힘 - 유교사회를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만드는 반국가적 행위로 이해 - 1791년의 신해박해, 1801(순조1)의 신유박해 - 신유박해시, 주문모 신부도 순교, 100명 처형, 400명 유배 - 이 사건은 정조의 관대한 정책에 의해 급격히 성장한 천주교세에 대한 종교탄압이자, 노론등 집권보수 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탄압하기 위한 권력다툼의 일환 - 천주교 전래 100년간 제사문제로 인한 순교자만 만 명에 이름 - 1791년의 사건으로 천주교인들은 참수형에 처한다는 것이 국법으로 인식됨 - 1936128일 로마 교황청은 조상제사를 선조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민간의식으로 선언하고, 신사참배도 단순한 국가의 예라고 선포 - 2차 세계대전시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이탈리아의 로마 교황청이 정치적인 이유로 신사참배와 제사문제를 허락한 것 - 오늘날 천주교는 11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전 세계가 죽은 자를 위해 미사를 올리고 있음 - 정월 초하루, 한식날, 추석등 전통적으로 조상제사를 드리는 날에 교회에서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올리고 있음 - 연옥설을 믿기에 죽은 자를 위한 기도나 미사를 허용.
 
개신교와 제사문제
개신교 초기 세례문답 가운데 첫 번째 문항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영들을 숭배하는 것과 높이는 것을 미워하시므로 조상의 영을 숭배하는 것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겠습니다였음 - 조상을 잘 섬겨야 후손이 잘된다는 민간 신앙이 조상제사의 저변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간파했던 것 - 철저하게 반대입장을 견지 - 1904년 중국 개신교는 추도식으로 조상제사를 대치하기로 합의 - 한국에도 자연스럽게 정착됨 -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교리적으로 용납되지 않음 - 조상의 교훈을 기억하고 그들의 신앙과 경건한 삶의 모습을 추모하는 것은 신앙과 배치되지 않음.
 
황사영의 백서사건 - 선교방법론의 문제
비단에 쓰여졌기에 백서(帛書)라 부름 - 신유박해시 토굴에 피신하면서 편지를 씀 -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의 무력과 청나라의 압력을 요구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붙잡힘 - ‘비록 이 나라는 전멸한들 성교의 겉모양에 해로울 것이 없고’ - 물리적 힘을 기반으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선교방법론 요구 - 1801년 대역모반의 죄로 죽임을 당함.
 
 
조선교구의 창설과 계속되는 박해
조선에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교황청에 알려진 것이 179010- 이전까지 북경주교의 관리하에 있던 조선교회는 18319월 독자적인 교구로 확정케 됨 - 그러나 막상 신부 브루기에르가 들어올려고 하자 서양인이 조선에 입국하면 틀림없이 박해와 재난이 일어날 것이므로 그의 입국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의 신부 유방제의 말에 따라 브루기에르가 들어오려고 하자 조선 교회가 입국을 가로막아 자신들이 기다리던 신부를 스스로 거절한 사건이 발생함.
 
계속되는 박해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안동 김씨 세력에 맞서 풍양 조씨 세력이 부상 - 조씨의 요구에 따라 18394월에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 반포 - 이것이 기해교난의 시작 - 이 박해로 신부와 수 많은 신도들이 죽자 정하상은 상재상서(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조정에 올림 - 최초의 호교문 - 황사영의 백서가 전교의 자유를 위해 국외의 물리적 힘에 호소하고 있었다면, 정하상의 상재상서는 자국 안에서 진리를 일깨움으로써 조정이 스스로 박해를 거두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음.
 
한국인 최초의 신부로 서품을 받은 자는 김대건(안드레) - 1821년 출생한 그는 16세때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남 - 근대 해외 유학의 효시 - 거기에 조선신학교가 세워짐 - 비록 외국에 설립된 것이지만 조선 최초의 신학교 - 1845년 신부 서품을 받음 - 조선교회가 창설된 지 60년만의 일 - 1846725세의 나이로 순교 - 병오년에 일어났으므로 병오박해라 함.
 
1844년 철종이 왕으로 등극 - 철종은 천주교 박해로 목숨을 잃은 은언군의 손자 - 천주교에 대해 동정적인 안동 김씨 세력의 부상으로 1865년에는 신도가 23천명으로 급증 - 그러나 철종이 자녀 없이 죽자, 생존을 위해 광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던 흥선군의 아들이 고종으로 등극하게 되고,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섭정을 하면서 천주교에 엄청난 탄압이 다시 시작됨 -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매일 기도문을 암송하고, 고종이 등극하자 감사의 미사를 드려 달라고 베르뉘 주교에게 부탁할 정도로 천주교의 관심을 가졌음 - 고종의 유모 박씨도 마르다라는 영세명을 가진 열렬한 신도 - 이때 러시아 남진정책으로 괴로워하던 대원군을 남종삼이 만나 조,,3국 동맹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막자고 건의를 올림 - 시간이 흘러도 답변이 없고, 러시아의 세력의 위협도 점점 가시게 되고, 청에서 서양인을 살해하고 있다는 내용을 듣게 되자 대원군은 수구적 유학 계층과 함께 천주교 탄압의 길에 나서게 됨 - 1866년부터 1873년까지 적게는 8, 많게는 2만명이 순교를 당함 - 제국주의 국가들의 강압적인 통상요구 압력등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반역자, 조국을 배반한 자, 외국인 지지자로 몰려 추방, 재산몰수, 생매장까지 당하였음.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
대원군의 박해가 너무 심하자 대원군의 부친의 묘를 파내어 그곳에 있는 유골을 담보로 하여 대원군과 협상을 해 보자는 생각에 페롱 신부는 독일계 유대인 오페르트라는 상인에게 이 일을 부탁 - 왕실의 묘에 온갖 보물이 들어있다는 생각에 오페르트가 적극 동참 - 1868년의 이 일로 천주교는 또 한번 탄압을 받음 - 1871년 미국 극동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을 끌고와 조선군과 교전후(신미양요),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함.
 
천주교회의 한글 보급 공헌
각종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 출판 - 1906년 순 한글 신문인 경향신문(카톨릭 재단에서 창간하였닥 지금은 독립지가 됨) 발간 - 한글 번역등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함으로 개신교 선교에 필수적인 성경번역과 각종 서적 출판에 기여함

1998년 말 현재 천주교회는 신도 3,804,094명으로 전체 국민의 8.2%, 성직자는 추기경 1, 대주교 2, 주교18, 신부 2,800, 남자 수도사 930, 여자 수녀 7,209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