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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광무황제의 승하로 촉발된 근황주의 운동이었다

문성식 2018. 12. 24. 08:57

 

   3.1운동은 광무황제의 승하로 촉발된 근황주의 운동이었다
 
 현재까지 연구된 3.1만세항쟁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 점은 바로 그 당시로서는 정치적,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핵심정치체인 황실이 제외된 연구만이 이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사교과서를 통해, 3.1만세항쟁은 광무황제의 장례일인 인산날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알고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3.1 만세항쟁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선 최소한 광무황제가 승하하는 일시를 연구의 기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광무황제가 갑자기 붕어하였고, 실제로 이에 대해서 그 당시 백성들이 커다란 의구심을 품었다는것도 사실인데, 기존의 연구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원인과 과정은 제껴놓고, 오로지 결과부터 연구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3.1 만세운동이 그토록 거족적, 거국적으로 촉발되게 만든 변인은 바로 광무황제의 독살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존황사상(尊皇思想)이 자리잡고 있던 그 당시 백성들에겐 치를 떨만한 커다란 분노였으며 결국 이 분노는 전국적인 3.1 만세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일제의 침략에 분노가 쌓일대로 쌓인 조선백성들에게 광무황제의 독살은 그토록 커다란 항쟁을 낳게 만드는 견인차 구실을 한것 이라 할 수 있으며, 백성들이 폭약이었다면 광무황제의 붕어는 불씨 또는 뇌관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여러 증언들을 통해서 밝혀졌듯이, 왜 일제는 광무황제를 독살해야만 했을까요? 일제의 입장에서도 비록 모든 힘을 빼앗긴 조선의 상징적 군주였다고는 해도 조선의 황제를, 그것도 백성들이 등을 돌리지 않은 황제를 독살하는 일은 엄청난 무리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광무황제가 일제의 침략에 고분고분하였고 침략일제의 의도를 그대로 들었다면 굳이 일제가 무리수를 써가면서까지 광무황제를 독살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살려두어 그들 정책의 합리화와 정당성 획득을 위한 꼭두각시로 이용해 먹는것이 더욱 큰 이익이었을 겁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다시말해 광무황제는 일제가 그들의 야욕을 이루는데 있어서, 눈에 가시같은 존재, 또는 위험한 존재로 비추어졌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광무황제가 일제에 저항하고자 취한 대표적 행동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헤이그 비밀특사의 파견입니다. 비록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으나, 이것은 일제에게 심대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이로 인해 일제는 남산에 대포까지 설치하여 결국 광무황제를 강제퇴위하게 한 것입니다.  

 

 둘째, 광무황제는 자신의 주변에 친일부역배를 비롯한, 자신을 감시하는 무리들로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과 기회가 닿는대로 전국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암암리에 교지를 내려보내 전국적으로 의병들의 항쟁이 일어나도록 하는 촉발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셋째, 광무황제는 국내에서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운신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자 목숨을 건 만주로의 망명을 추진하였습니다.  비록 광무황제의 망명계획 수립은 탄로가 나버렸지만 당시 일제는 이 일로 인해 헤이그특사 파견에 버금가는 충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천황 주재하의 긴급 어전회의를 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상의 대표적인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 광무황제의 항일은 목숨을 건 철저한 항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조직적 저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것입니다. 이는 일제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었던 것이고 결국 광무황제를 헤이그 특사파견을 빌미로 서둘러 퇴위시키게 되었던 것이며, 퇴위후에도 광무황제가 파리 강화회의에 '일제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는 명백한 불법'이라는 주장을 전달하려 하는 등 계속해서 일제의 지배에 대항하려 하자 일제는 무리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광무황제를 독살하게 된 것입니다.

 

 전통적 가치가 중시되던 그 당시의 백성들에게 광무황제는 비록 일제에 의해 힘을 빼앗긴 군주였으나 여전히 조선백성들에겐 나랏님으로 인식이 되어있었던 상황이었고, 따라서 광무황제의 독살은 3.1 만세항쟁이 그토록 거족적 거국적으로 촉발될 수 있었던 기폭제 구실을 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될 것입니다. 모든 사회운동이 구심점이 있어야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듯, 그 당시 백성들에겐 공통된 사실, 즉 광무황제가 독살로 시해되었다는 공통된 분노야 말로 백성들을 하나로 응집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였던 것입니다.

 

 즉, 3.1 항쟁의 거국적 촉발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광무황제의 갑작스런 붕어.

2. 백성들의 독살설에 대한 분노 증폭.

3. 광무황제의 차남 의왕(義王), 독살시해임을 직접 확인.

4. 천도교 신자 의왕, 자신과 깊은 교분을 맺고있는 손병희에게 광무제 독살 시해 알림.

5. 손병희 천도교 조직망을 이용, 전국적으로 광무황제 독살시해사실과 만세항쟁의 계획전파.

6.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 3.1 만세 항쟁의 시작.
 
 3.1 만세항쟁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천도교와 천도교의 巨頭 손병희가 내세웠던 4대 강령이 첫째가 '황실존중 독립기초견고' 였고 둘째가 정부정치개선, 셋째가 인민의 생명재산보호, 넷째가 군정재정정비 이었으며, 4대 강령 중 첫번째에 황실존중 사상을 놓았다는 것은 그 당시 백성들과 단체들이 여전히 존황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말해 3.1 만세항쟁에서 광무황제의 독살을 제외하고서 단순히 "광무황제의 인산날에 국민들이 애통하여 모인 그날에 만세항쟁이 폭발했다." 라는 서술은 알맹이가 빠진 서술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일제저항운동의 효시로 여기고 있는 3.1운동은 다름아닌 우리 대한황실로 인하여 촉발한 운동이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