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2절 중국불교
5. 불교사상의 융합 쇠퇴기 (2)
중국에서의 마지막 번역활동은 10세기 말에 일어났는데,
인도의 승려와 중국의 보조원으로 구성된 공식적인 번역관이 이 작업을 맡았다.
당나라시대의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시도하였지만,
신심에 바탕을 두지 않은 시도여서 번역작업의 위대한 전통은 종말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불교의 교의적인 불모 상태는
수와 당의 시대에 발전했던 종파 중 선종과 정토신앙을 제외하고
대부분 소멸한 데서 보다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종파도 절충되어 그 특색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3교 통합’이라는 과거의 관념이 크게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특히 명과 청의 치하에서는 그러한 절충주의적 이론을
재가 신도들이 발전시킨 경우가 많았다.
교단의 역할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재가 신도의 역할이 보다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무수한 종교적 집단이나 모임이 있었고,
승려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의식을 집전하고
기우제를 지내거나 악령을 내쫓는 일도 맡음으로써,
불교는 가정생활과 밀착하게 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축일 중의 하나로 음력 7월 보름날에 행하는 백중(百中)이 있다.
이 날은 승려와 재가 신도가 함께 행사를 통하여 얻은 공덕을
고통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구하는 데로 돌리는 의식이었다.
그렇게 건전한 행위는 다른 생물에게도 확대되었는데,
생물을 사서 자유롭게 풀어주는 방생(放生)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많은 대사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못을 갖추기도 하였다.
중국에서의 종교정책이 언제나 변함없이 견지했던 특징은
임의적인 통제와 후원을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었다.
몽고족의 치하에서는 예외가 있었지만,
대규모의 박해는 더 이상 자행되지 않았으며,
간혹 주술적으로 보호받겠다는 생각과 결부된 황제의 후원도
결코 과도한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티베트의 라마교가 몽고에 전해졌는데,
원과 명, 청 등의 세 왕조는 정치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한결같이 라마교를 광범위하게 후원하였다.
이 시기의 전반에 걸쳐서 몇몇 종파들은 비밀스럽고 파괴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유명한 백련사(白蓮社)가 이에 해당한다.
구세적 성격을 지니고 12세기에 성립된 백련사는
원나라 말기의 반몽고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몇 세기에 걸쳐 온갖 분야의 비밀결사로 분파하였는데,
그 중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존재한다.
명과 청시대에는 그러한 운동의 종교적 성격이 훨씬 더 두드러졌다.
용감하고 영웅적인 승려들이 비밀결사를 주제로 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고,
투쟁하는 승려가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즐겨 다루어졌던 것은
전혀 근거 없는 허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하남(河南)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의 승려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권법(拳法)이라 불리는 독특한 유형의 무예를 수련하였으며,
아직까지도 전수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예화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도 불교의 구세주의에 영향을 받은 폭동들이 명과 청 왕조를 괴롭혔다.
19세기의 전반에 있었던 대규모의 반란들은 실제로 백련교의 모반이라는
대중봉기로 출범하여 청 왕조를 거의 와해시킬 정도로 거셌다.
정부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이러한 현상들은 불교가 사원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 속에서 실천적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청나라시대의 말기에는 불교가 흡수, 변형된 마지막 단계를 보여 준다.
이는 성인(聖人)들과 그들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중국인들이 전형적으로 발전시킨 몇몇 표현 속에서 가장 여실히 나타난다.
무시무시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불교의 지옥은
통속적인 종교가 즐겨 찾는 주제가 되었고,
불교의 신화에서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염라대왕은
자연스럽게 청나라시대 전형적인 관리의 모자와 옷을 입은
중국인 치안판사의 모습을 취했다.
본래 아미타불의 보처보살인 관세음보살은
여성의 모습을 취하여 일종의 불교적 여신처럼 끝없이 대중화되어 갔다.
즉 온갖 종류의 재앙과 위험과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식을 갖게 하여 후손을 번창케 해 주리라고 믿었다.
또한 불교적 구세주인 미륵은 놀라운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대중들의 인상 속에서는 미륵이 ‘포대(布袋)’라 불리는 10세기의 괴짜 승려와 동일시되었다.
당시 몇몇 괴짜승들은 자신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그 결과 초기의 많은 조각상에서 표현된 홀쭉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
포대를 옆에 차고 누구에게나 호감 있게 싱글거리면서 친숙하게 웃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경우에 성인들은 전형적으로 중국인의 모습을 취했다.
그러나 이국적 성격이 강조된 다른 형상도 있었다.
중국에 선을 전한 인도 출신의 달마는
검은 피부에 무서운 얼굴을 지닌 이방의 선사로,
커다란 눈을 굴리는 사나운 표정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나한전(羅漢殿)에서 보듯이,
중국 사람들은 종교의 수호자라고 믿은 부처님의 주요 제자들에 대해
이국풍의 모습을 더욱더 강조하였다.
나한들의 활약상과 관련하여 그들에 대한 신앙이 발전하여
나한신앙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선종은 보다 현학적인 수준에서 나아갔지만,
이 역시 교의와 제도의 양면에서 많이 변하였다.
송나라시대 이후 선은 더욱더 형식화되었고 성문화되었다.
역설적으로, 무언(無言)의 교의가 거대하고 고도로 전문화된 문헌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시와 회화에 깊이 영향을 끼쳤던 심미화 된 구두선(口頭禪)이다.
선종사원은 수백 명의 승려들이 거주하고
복잡한 승단 내의 계급을 갖춘 커다란 기구가 된 예도 종종 있다.
선방(禪房)을 중심에 배치한 그러한 사원들에는
정신집중을 위해 완전히 형식화된 기술로서 선이 실수(實修)되었다.
그리고 이 기술에는 온갖 세부사항이 정확히 규정되었다.
즉 선사와 수행자가 나누는 질의응답, 신체의 자세와 동작,
일상의 활동 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는 식사도 완전히 의식화(儀式化)되어 있다.
또 북, 종, 목탁, 운판 등의 소리를 통한 신호법으로 이들을 규정하였다.
사회적 행위의 기준으로서 예(禮)는 극히 의례화 된 행동규범 속에
외면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정기적인 수계는 장엄하고 집합적인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는 보통 ‘계단(戒壇)’에서 사원의 원장과 전문화된 다른 행정승들에 의해 집전되었다.
전통적으로 전해 온 250계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정식 승려가 된 후,
당사자들은 흔히 대승의 이념에 따라 모든 중생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자신들의 결심을 상징하는 보살의 원(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의식에 참석한 경건한 재가 신도들도 이러한 서원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수계를 통해 정식 승려가 되면, 당사자는 인쇄된 수계증을 받았다.
이 절차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실시되어 왔다.
그런데 이는 본래 교단을 보다 잘 통제하기 위해, 관료제도에 의해 강요되어 온 것이었다.
승려들은 일종의 승려증으로 이 문서를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 문서는 정식 승려가 되도록 자신을 이끌어 준 은사의 이름과
자신이 속하는 정신적 계위를 나타내는 다른 특기 사항을 기재함으로써,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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