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2절 중국불교 - 4. 수,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3)

문성식 2016. 11. 26.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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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2절 중국불교 4. 수,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3)
        문화의 분야에서 불교가 중국문화, 그리고 실제로 세계의 문화에 끼친 물질적 공헌은 보다 지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그것은 불교권에서 불화나 부적 같은 것을 값싸고 효과적으로 재생하는 방법으로 개발하여 급기야는 완전한 경전을 재생하게 되었다. 이 기술은 8세기 혹은 그 이전에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현존하는 인쇄본으로서 가장 오래된 868년의 『금강경(金剛經)』은 인쇄술의 완성된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개발된 결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972년에는 황제의 명령으로 불교의 문헌 전체가 인쇄되었다. 그 무렵 이 인쇄술은 일상적인 목적으로도 이용되기 시작했다. 사회에 대해 이처럼 위대하고 긍정적인 불교교단의 역할은 사실상 쉽게 경제활동과 분리될 수는 없었다. 대사원의 부는 항상 증진되고 있었다. 그 부는 기본적으로 토지라는 부동산과 사찰의 경작지에 딸린 소작인의 인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중의 일부는 정부가 할당하거나 기부한 것으로서 합법적으로 확보되었다. 그러나 사원의 부는 다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즉 부유한 지주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순전히 형식적인 복전(福田)을 기부함으로써 수익이 생겼고, 당나라 초기의 법규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거래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매입하여 사원의 장원으로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부를 증대했다. 대사원은 소위 ‘무진장(無盡藏)’이라는 형태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무진장이란 일종의 집합적으로 소유된 자본인데, 이는 대부나 전당포업과 같은 세속적인 목적에 이용되었고, 뿐만 아니라 물레방앗간이나 기름 압착업을 개발하는 등의 다양한 종류의 상업체를 운영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특히 전당포업과 관련하여, 사원은 중국의 금융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동과 귀금속을 종교적인 조상(彫像)이나 의식의 집전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매점(買占)한 것이었다. 결국 715년, 정부는 모든 동상과 청동상을 몰수하고 현금으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8세기 중엽, 당나라는 민란 등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국가는 곤궁에 시달렸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국고를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9세기경 정부와 불교교단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후기로 접어든 당나라는 지적인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중국 전통의 근본을 회복하자는 경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는 관직에 등용하는 가장 신빙성 있는 방법으로써 유교적 시험제도가 강화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근원이 이방국이라는 낡은 논쟁이 재연되었다. 무종(武宗, 841~847년 재위)의 치하에서 결국 문제가 발생했다. 이 때 취한 조치의 성격을 살펴보면 그 주요 동기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그 조치는 불교사원의 힘을 분쇄하고 그 부를 몰수하려는 급진적인 시도였다. 박해는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지속적으로 취해졌는데, 842년에 시작되어 이후 3년 동안 극에 달했다. 이것이 불교의 문헌에서는 ‘제3 법난’이라고 알려져 있다. 845년에는 불교의 모든 설비를 파괴하고, 모든 승려를 환속시키며, 약 150,0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사찰에 딸린 모든 노비들을 해방하고, 사찰의 모든 토지와 교단의 다른 유형재산도 몰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적어도 중부지방에서는 이 칙령이 엄격히 집행되었다. 842년에서 845년까지의 억압은 조직화된 승단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재가 신도로부터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어느 시대에도 불교가 그처럼 금지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종의 계승자는 반불교의 칙령을 폐지하였고, 교단은 다시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박해로 교단은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물질적 파괴의 결과와는 별도로 9세기 후반 이후 불교의 일반적 쇠퇴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원인도 지니고 있었다. 그 원인들은 그 당시 힘을 얻기 시작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흐름들이 중세 중국사회의 구조와 제도를 점진적으로 변형시켰다. 그러한 변화 이전에 극도로 번창했던 당시 불교교단은 중국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당연히 영향을 받았다. 수와 당의 치하에서 발전했던 불교는 너무 강대했으므로, 황제의 법령에 의해 일격으로 분쇄될 수는 없었고 점진적인 쇠퇴가 진행되었다. 힘이 다하여 서서히 그 지적 활력과 창조력, 그리고 그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여 갔다. 교육을 받은 지식층은 점점 불교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우수한 인재들은 사원보다는 과거시험을 통한 세속적 출세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