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2절 중국불교 - 5. 불교사상의 융합 쇠퇴기 (1)

문성식 2016. 11. 26. 12:39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불교의 역사】
      제2절 중국불교 5. 불교사상의 융합 쇠퇴기 (1)
        10세기경 중국에서는 귀족이 지배하던 준(準)봉건 제도는 쇠퇴하고 점차 관료제도가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관료제도에서 정부의 관직은 경쟁이 극심한 시험제도를 통해 모집된 보다 큰 집단의 구성원인 문관들로 채워졌다. 이 새로운 상류계급은 생활방식이나 문화적 표현에 있어서 매우 세련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에 경제의 중심은 건조하고 전쟁으로 신음하는 북부로부터 쌀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중부와 남동부지역으로 점차 옮겨 갔다. 거대한 도시들은 문관과 부유한 상인들로 이루어진 지식층이 공유하는 독특한 도시문화의 발전을 맞이하였다. 그 도시문화는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표현이었으며, 상류계급이 관심을 쏟아 추구한 것은 평화를 표현하는 문학과 예술이었다. 말의 등에 올라탄 당나라 초기의 호전적인 귀족과 후기 중국의 우아하지만 다소 냉혹한 문관학자는 매우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교적인 문관은 문헌연구와 관료적 야망과 도덕적 격률의 자기 세계에 빠져, 책에 둘러싸인 채 꼬치꼬치 캐내길 좋아하고 있었다. 유교의 가치와 태도는 전보다 훨씬 더 우세한 지위를 확보했던 것이다. 11세기와 12세기는 강력한 신(新)유교의 부흥기였다. 여기서는 도덕적, 정치적 사상에 대한 과거의 제도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학문적 교의로서 최고의 이론이 되었으며, 14세기에는 공식적으로 정통이 되었다. 가족제도와 씨족제도는 유교의 행동규범과 더불어 대중 속에 널리 퍼졌으며, 중국사회는 철저히 유교화 되었다. 이 시기의 중국의 전반적인 모습은 특히 정치적 제도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지속과 안정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절정에 이르렀던 독재와 절대주의의 경향과는 달리 정부의 기본 구조는 전 시대에 걸쳐 유지되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몽고족이 지배했던 원나라 때(1267~1368년)는 약간 틀에서 벗어난 시기가 있었지만, 법개념과 정당한 절차는 동일하게 유지되었고, 과거제도는 전보다 더욱 강화된 형태로 1905년까지 존속되었다. 중국이 영토를 확장한 시기는 이국 출신의 왕조가 중국을 지배한 시기와 일치한다. 송(宋) 왕조(960~1279년)는 나약하고 방어적이었으므로, 결국은 중국의 북부를 정복자들에게 내 주어야 했다. 그 이후의 송은 남송(南宋, 1126~1279년)이라 불린다. 몽고족 치하에서 위대한 칸이라 불리는 몽고족의 통치자는 북경(北京)을 거처로 정했다. 그는 명목상으로 몽고세계제국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최고 주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쿠빌라이도 더 멀리 정복하려는 야심적인 정책을 착수하였다. 명(明) 왕조(1368~1644년) 치하에서는 다시 중국 본토로 거의 축소되었다. 반면에 북동으로부터 내려온 만주족 정복자들이 세운 마지막 왕조 청(淸, 1644~1912년)은 다시 그 위력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로 확장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초원지대는 오래 전부터 이슬람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의 치하에서는 중국이 티베트와 몽고 부족의 대부분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함으로써, 라마교가 지배하던 곳까지 결국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침체와 인구의 극적 팽창 등의 이유로 쇠퇴의 길로 접어든 중국은, 19세기에 들어서자 만연된 타락과 반란이 갈수록 심화되어 불안정한 국가가 되었다. 중국이 서구의 확장에 의한 충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러한 내적인 위기 상황 때문이었다. 그와 결부된 압박 아래서 과거의 질서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전반에 걸쳐 불교는 끊임없이 기울어져 가고, 보편적 교의로서 유교가 부활되고 체계화되면서 상류계급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신유교의 정통은 과거제도의 기반이 되었고, 문관의 표준적 이념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전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고조된 것이 불교가 쇠퇴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신유교의 체계화는 불교의 영향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중국불교의 다양한 종파들 속에서 전개된 가장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일부는 그 형태가 사회화되고 정치화되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유교 속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유교는 단순히 인계된 것이 아니라, 그 경쟁 상대인 불교가 취한 가장 강력한 입장의 일부를 소화함으로써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의 가장 큰 공헌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의 문화를 지배하게 될 신유교의 이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불교의 전반적인 쇠퇴가 양적인 면에서 곧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통속종교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번성하였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갈라져 나간 종파들은 때때로 매우 활동적이었다. 이들 중에는 간혹 질적인 면에서 선동적인 유형이 있었고, 이런 유형은 몽고족의 지배를 전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 종교적 모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교단의 규모는 좀처럼 축소되지 않았고, 사찰과 사원은 계속 설립되었다. 대규모의 사찰이나 사원에 대한 황실의 후원이 끊기는 예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불교의 쇠락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식인 계층에서 비롯 되었다. 지식인 계층과 승단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의 하락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공식적인 포고문이나 이보다 약한 차원의 가훈과 씨족의 규율에서 불교를 폄하하고, 대중적인 책에서는 흔히 승려들을 탐욕스럽고 무지한 인물로, 사원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세 가지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 지식인 계층이 승려가 된 예는 극히 드물었고, 교단의 지위는 하락하였다. 둘째, 교단은 더욱더 교양 없는 대중의 요구에 따라 변질되었다. 셋째, 진지한 경전연구와 학문 활동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요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소멸한 것이었다. 이로써 중국에서의 외국 전법사의 활동도 종식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