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吾人)은 40년의 예속과 36년의 질곡 밑에 전민족이 초계급적(超階級的)으로 굴욕과 피착취의 대상이 되었었다. 이제 또 전민족이 초계급적으로 해방되었나니, 초계급적인 통합민족국가를 건설하여 전민족의 해방 및 독립의 완성을 도(圖)함이 역사의 명제이다.
-선생이 저술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의 내용 중에서-
신학문을 바탕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다
안재홍(安在鴻, 1891.12.30~1965.3.1) 선생은 1891년 12월 30일(음 11월 30일) 경기도 진위군 (현 평택군) 고덕면 두릉리에서, 순흥 안씨(順興安氏) 윤섭(允燮)과 남양 홍씨(南陽洪氏) 사이의 8남매 가운데 2남으로 출생하였다. 1897년부터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한학은 선생의 삶에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1907년부터는 이른바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 해에 서울의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당시 YMCA는 월남 이상재, 한서 남궁억, 좌옹 윤치호 등이 출입하던 곳이었으므로, 선생은 긍지를 가지고 여기서 3년간 신학문을 배웠다. 이때 역사학자이자 항일지사로서 늘 존경하고 흠모하였던 11세 연상의 단재 신채호를 만났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20세의 선생은 구국의 뜻을 품고 9월 일본 유학에 올랐다.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어학 준비를 끝낸 뒤 1911년 9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고, 10월에는 도쿄에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 전체를 통괄하는 중추기관으로서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21살 되던 이 해에 선생은 장대한 기개와 포부를 드러내 ‘민중의 세상’이라는 뜻의 ‘민세’(民世)라는 아호(雅號)를 지어 평생 삶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1914년 여름 선생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선생은 1915년 3월 자작자급(自作自給)으로 민족자본을 육성할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 일반 계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3월 이 단체가 보안법 위반의 혐의로 임원과 회원이 구속당할 때 최남선, 유근, 김두봉, 김성수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 해 5월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서울에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선생은 여기에 참여하여 총무로 활동하였는데, 11월 이 단체가 대구에서 발각되면서 피체되어 1921년 5월 징역 3년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2년 출옥한 선생은 옥고로 피폐해진 몸을 추스른 뒤 1924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하였다. 당시 선생은 산업구조상 일본자본에 비하여 조선인 공업생산이 다소 우세한 분야였던 직물업, 제지업, 요업, 화학공업 등 중소공업과 가내공업 분야 등에서 중소자본의 육성과 토산장려(土産獎勵)를 내세웠다. 동아일보계의 물산장려 논리와는 전혀 달리 선생은 일본 독점자본주의라는 외래 자본이 침투하는 현실에 대응하여, 민족자본·민족경제의 독자성을 전제로 하는 조선인 자본의 육성을 강조하였다.
조선일보 주필로, 시대의 학자로
그해 5월 선생은 <시대일보>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언론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 주필 겸 이사로 전직하여 1932년 퇴사하기까지, “평균 10일에 7편 꼴의 사설과 시평을 집필하는 경이적인 정력으로” 말 그대로 ‘종횡무진’ 필봉을 휘둘렀다. 확인된 것만 조간의 사설 약 980편, 석간의 시평 약 470편이다. 특히 1925년 4월 선생은 조선기자대회에서 부의장에 피선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언론계의 중추로 떠올랐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이 주선하여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 구파의 권동진, 이종린 등 민족주의자 7명이 함께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민족협동전선 문제를 토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자치운동을 추진하려는 세력에 대항하는 비타협 민족운동세력의 협동전선이 구체화되었다. 선생은 이전부터 민족해방을 위하여 사회주의자들과 협동해야 한다는 협동론자였다.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재직할 당시의 안재홍 선생(1929) <출처: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민세안재홍선집] 1, 지식산업사, 1981>
한편 이 해 9월 동아일보계의 송진우, 김성수와 천도교 신파의 최린은 1923년부터 추진하였던 자치운동 단체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하려고 다시 움직였다. 이른바 자치운동의 논리는 현재 조선민족의 능력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므로 독립할 기회에 대비하는 준비가 필요하며, 독립에 도달하는 한 단계로서 자치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선생은 자치운동을 일제와 연락, 호응하여 민족운동의 전선을 분열시키는 ‘관제적 타협운동’이라 규정하고 이를 절대 배격하였다.
1926년 10월 선생은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에 연정회 재조직 계획을 알려 이를 무산시켰다. 이는 ‘민족주의’라고 뭉뚱그려 부르던 정치세력이 비타협 민족주의와 민족개량주의로 뚜렷이 갈리는 분기점이 되었다. 선생은 ‘자치운동 = 타협 = 우경(우익)’, ‘절대독립론 = 비타협 = 좌경(좌익)’이라 규정하고, 스스로 ‘좌익’을 자처하며 1927년 1월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으로서 신간회(新幹會)를 발기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해 2월 15일 신간회를 결성하여 조사연구부의 간사로 선임되었다.
신간회는 자치운동에 대항하여 절대독립을 추구하던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자치운동을 분쇄하고 민중의 정치·경제의 각성을 촉진하고, 전 민족의 단결을 꾀하고자 조직한 단체였다. 중국국민당 형태의 협동전선을 추구하던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므로 신간회는 민족협동전선체로 발전하였다.
1928년 1월 선생은 <조선일보>에 사설 ‘보석 지연의 희생’을 발간한 책임으로 구속되어 금고 4개월을 당하였다. 그 해 5월에는 <조선일보>에 사설 ‘제남(濟南) 사건의 벽상관(壁上觀)’을 집필하여 <조선일보> 발행인에서 물러나는 한편 금고 8개월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월 출옥하였지만, 그 해 12월 광주학생운동의 진상보고를 위하여 신간회가 주도한 민중대회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0년 1월 선생은 ‘조선상고사관견’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좁은 소견이란 뜻으로 ‘관견’(管見)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선생의 역사가로서 진면목이 드러나는 고심작들이었다. 이때 쓴 글들은 1937년부터 집필하고 8․15해방 뒤에 간행된 [조선상고사감] 상·하(1947, 1948)와 [조선통사]의 기초가 되었다. 선생이 고대사 연구에 관심을 집중한 까닭은, 고대가 한민족의 형성과 영토의 확장 등 민족의 번영기를 구가하던 때였으므로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이 가장 심하게 왜곡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단군’이라는 말을 꺼내는 일조차 불온시되었던 시기에, 단군을 말살한 식민주의사학을 비판하며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등 선생의 민족주의사학은 바로 민족해방운동의 한 갈래였다.
역사 저술을 통해 민족 정신을 알리다
1931년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를 해소하려 하자, 선생은 해소론에 맞서 해소반대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끝내 신간회가 해소되자 1932년 1월 민족의 역량을 결집한 표현단체(또는 표면단체, 합법단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선생은 민족단체통제협의회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선생은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만주동포 구호 의연금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됨으로써 옥중에서 사장직을 사임하고 징역 8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경군관학교 생도사건' 보도기사, <매일신보> 1936년 6월 4일자. 종로서에서 취조중인 '남경군관학교 생도사건'에 선생도 소환되어 취조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1932년 11월 출옥하였지만 선생이 활동할 공간이 전혀 없었다. 신간회와 같은 합법운동 단체도 없었고, <조선일보>도 사주와 발행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 간 상태였다. 일제는 만주침략을 도발하였고, 전 세계에 파시즘이 대두하는 분위기에서 일본제국주의 파쇼체제도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체의 정치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에 낙담하지 않고, 민족해방을 위한 ‘차선’의 활동으로 “국사를 연찬하여 민족정기를 불후에 남기는 사명”을 자각하였다.
선생은 1934년 들어 위당 정인보와 함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기 시작하면서 다산 정약용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학운동을 한국사학사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8․15해방 후 식민주의사학을 극복하는 한 갈래의 작업으로 실학 연구가 본격화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놓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조선학’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최남선이었지만, 선생은 ‘조선학’의 의미를 ‘한국학’, ‘국학’ 따위의 학문의 영역으로만 한계를 짓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은 민족운동의 새로운 이념을 ‘조선적’ 영역에서 도출하고, 더 나아가 현 단계 세계사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길고 커다란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시각에서 선생은 조선학운동의 과제로 “민족으로 세계에, 세계로 민족에, 교호되고 조합되는 민족적 국제주의―국제적 민족주의를 형성”하자는 ‘민세주의’(民世主義)를 제창하였다.선생은 자신의 호의 의미를 ‘민중의 세계’에서 민족의 독자성과 세계사의 보편성을 함께 지향하는 과제로 확대, 발전시키면서 조선학운동, 나아가 한국사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였다. 민세주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변증법으로 지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선생이 정약용을 ‘국가적 사회민주주의자’로 규정하고, ‘산업적 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 ‘경제균등’이라는 말로써 설명하는 데에서도 이미 신민족주의 사상의 뼈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1936년 선생은 군관학교 학생사건으로 검거되어 2심 재판에서 2년 징역형을 받았고, 1937년 보석으로 출감해서는 고향 두릉리에서 한국상고사와 관련한 저술을 시작하였다. 1938년 5월 선생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거되어 3개월만에 석방되었으나, 군관학교 학생사건이 징역 2년으로 확정됨에 따라 이 해 다시 수감되고 말았다. 1939년 출옥해서는 다시 두릉리에서 한국상고사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1941년 [조선통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1943년 3월에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16명 가운데 이윤재, 한징 두 분이 옥사한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일제는 피검된 사람들을 아주 모질게 고문하였다. 선생 또한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콘크리트 감방에서 100여 일 동안을 서서 지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그로 인해 위장병이 발병하여 옛날의 면모를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모두 9차례 걸쳐 7년 3개월의 옥고로 이어진 이 마지막 고통은 너무도 감내하기 어려웠다. 선생은 철창 안에서 국가와 연결시켜 한시를 짓고 “이것을 절명시(絶命詩)로 남겨 두고 적당한 때에 한 많은 고국을 떠나리라고 그윽이 별러 보았다.”
새로운 시대의 건국에 앞장서다
1944년 8월에서 12월 무렵, 선생은 여운형에게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부하였다. 여운형의 구상과 달리 선생은 일제가 패망한 뒤의 정치현실에 대비하여 민족주의자가 해방 정국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진영을 주류 역량(主流力量)으로 삼는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1944년 가을 무렵 선생은 당시 민족주의자의 한 ‘중진’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 ‘중진’은 선생이 제안하는 바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민족주의 계열은 아무런 조직체도 준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여운형이 제의한 바를 거절하였지만, 선생은 여운형과 식민지 시기 끝무렵 시국에 대처하는 방안을 긴밀하게 협의하였다. 두 사람의 공동 보조는 8·15 해방 당일 여운형을 위원장, 선생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출발시키는 힘이 되었다. 물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건국동맹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선생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도 스스로 지을 만큼 건국준비위원회가 ‘다음 단계의 정부 수립을 기하는 준비기관’으로서 최선의 구실을 다하도록 노력하였다. 8월 16일 선생은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해내·해외의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을 방송하였는데, 이는 “흡사 신정부 수립의 정책 발표와 같은” 건국 방침이었다.
안재홍 선생이 집필한 [조선상고사감](좌)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우)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주된 목적은 중경 임시정부가 환국하기 전, 그리고 독립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과도적 기구’를 구성함으로써 임시정부가 환국하여 정부로 행세할 수 있는 기반을 삼으려는 데 있었다. 선생은 민족주의 세력이 표면에서 건국을 주도하고, 공산주의자는 이를 제2선에서 지지하는 ‘초계급적 협동전선’을 지향하였다. 따라서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 안에서 주력하였던 문제도 공산주의 세력의 득세를 막고 민족주의 세력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의도와 달리 건국준비위원회 안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독주하여 좌경화하였다고 판단한 선생은 8월 말경 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해야겠다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좌익 세력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9월 10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여(余)의 처지’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건국정부 수립 방안을 제시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완전히 탈퇴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는 선생은 정식정부를 수립하는 길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영립 보강(迎立補强)함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믿었다. 선생이 주장하는 ‘중경임정 영립보강론’은, 중경 임정을 중심으로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모든 혁명역량을 집결함으로써 중경 임정을 보강하여 신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정식 정부를 수립하자는 내용이었다. 선생은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기 전까지 이를 실천에 옮겼다.
1946년 5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열렸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파열음을 냄으로써 조선임시정부 수립과 그를 통한 정식정부의 수립이 마냥 지체되는 현실에서 선생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크게 수정하였다. 선생은 한국의 독립과 진정한 해방이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성취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냉정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미소공위를 결렬시킨 한 원인이 되었던 반탁노선에서 완전히 돌아섰고, 또 ‘중경임정 영립보강론’도 거두어들였다. 1946년 5월 여운형, 김규식 사이에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열라고 촉구하며 구체화되기 시작한 좌우합작운동은 7월에 들어 정식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좌우 측의 공식대표를 선정하였다. 선생은 우측 대표 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어,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타결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좌우합작운동의 타당성과 방향, 목표 등을 제시하였다.
선생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 현실의 동기, 의도는 좌우합작으로써 국내 정치세력을 통일한 자주력을 가지고 남한의 미군정으로부터 자주행정권을 획득하려는 ‘자율통일정부수립론’에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북한의 인민위원회와 협상하여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였다. 선생은 반탁노선에 서서 미군정과 불화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미군정과 협조하여야 하며, 미소협조가 한국독립의 전제가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좌우의 정치세력이 대립을 넘어서 통일·합작해야만 민족 통합·통일이라는 한민족의 대의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안에서나마 미소대립의 실마리를 제거하여 미소협동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다급한 현실성을 강조하였다.
때문에 선생은 좌우합작운동의 의의를 통합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하는 한민족 내부의 과제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좌우합작운동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라는 현단계 세계사의 모순을 지양하는 새로운 이념·주의를 창안하여 새로운 정치체제를 인류에게 제시하는 사명을 띤 막중한 실험이며 지향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6년 12월 발족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좌우합작의 부산물로 인식하여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1947년 2월 허울뿐인 민정장관에 취임한 것도 미군정이라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자율통일정부수립’을 관철시키려는 좌우합작운동의 연장이었다.
이후 1950년 5월 선생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곧 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9월 북한군 보위부에 연행되어 납북되었고, 1965년 3월 1일 75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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