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김광제(金光濟, 1866.7.1~1920.7.24)

문성식 2015. 9. 8. 23:20

김광제 “조국이 예속 굴레 벗는데 내가 금연 못하겠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다. 

선생은 대구의 출판사 광문사 사장으로 계몽도서를 펴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부패 탄핵 상소를 올린 관료, 교육자와 출판인의 길로 나가

김광제 이미지 1

김광제(金光濟, 1866.7.1~1920.7.24) 선생은 충남 보령시 웅천면 평리에서 출생하였다.(생몰일은 제작부 근거)초명은 홍제(弘濟, 또는 洪濟), 호는 동양자(東洋子), 시호는 석람(石藍)이었다. 선생은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23세인 1888년 관계에 진출한 이래 훈련원 첨정, 비서원승,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905년 배일 및 내정부패 탄핵상소로 고군산도로 유배 당하여 2개월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선생은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1월 대구광문사 사장에 취임한 이래 2월에는 대구광문회가 설립한 사립보통학교 교장과 달명의숙(達明義塾) 부교장․강사로서 활약하였다.

 

대구․경북지역 지식인․자산가․관료 등의 지원을 받은 광문사는 실학자 저술 발간과 신학문을 도입하여 자강의식을 일깨우는데 앞장선 출판사였다. 또한 도내 각 학교에 사용될 교과서와 월남망국사 등 각국 망국사도 편찬하였다. 이는 국채가 망국의 근원이라는 인식을 널리 보급하기 위함이었다.

 

대동광문회 부회장에 취임한 선생은 경북도내 사립학교설립운동을 주도하는 신교육운동을 펼쳤다. 소식을 접한 광무황제는 특별하사금 1,000원과 함께 「교육칙유」를 내렸다. 선생은 대구민의소 소장,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총무, 대한협회 호남지역 시찰원, 교남교육회 평의원․도서부찬술원 등도 지냈다. 대구민의소는 지방자치제 실시를 목표로 조직되었다. 선생은 지방자치를 위한 선행 조건은 근대교육에 의한 민지 계발로 인식하였다. 이는 1906년 8월 26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기사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국권 확립은 민기(民氣)를 진작함에 있고, 국정을 선명하게 함은 민지를 계발하는데 있다. 민지계발은 학문을 강구하는데 있으며, 민기를 진작하는 책략은 단결에 있다. 따라서 동서 여러 문명국의 국민은 각기 자치자강(自治自强) 책략을 도모하며 혹은 민의소를 설립하여 역장(役長)을 두거나 회두(會頭)를 선발한다. 촌․정․현․시(村町縣市)에도 연단을 설치하여 명예인으로 편성하고 마음으로 맹세함으로써 애국정신과 산업진흥을 강론하는 한편 격렬한 토론은 능히 사람의 마음을 감동․분발시킨다. 총명하고 밝은 사리는 능히 사람들의 미혹한 생각을 밝게 깨닫게 하여 사람마다 각기 국민 된 의무를 중하게 여기니 가히 남의 압제와 모멸을 스스로 면하여 민력을 심어 국권을 달성하거늘, 어찌하여 우리 동포는 옛 습속에 안주하여 스스로 포기하는가. … 고로 우리가 공인을 이어 받아 민역소를 설치할 취지를 밝힌즉 노소존비를 가리지 말고 일성(一省)이 규합하여 백성에 관계되는 모든 일을 한 마음으로 서로 보호하여 자치권을 도모하고자 한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하고, 전국화시켜. 선생은 금연 후 담뱃값 내놓아

김광제 선생의 상소문(1905.12). 을사늑약 직후 올린 상소문으로 외세 배격과 자주권 회복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음력 1906년 12월 16일) 대구의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 문회(文會)를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에서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의 발의로 시작되었다. 대동광문회 회원인 서상돈은 국채 1,300만원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는 취지를 발의하였다. 그는 즉석에서 의연금으로 800원을 내놓았다. 참석한 회원 200여 명은 이러한 제안을 만장일치로 찬성하였다. 이어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金光濟) 선생이 발기 연설을 마친 후 즉각적인 실행을 촉구하고 나섰다. 동시에 자신의 담뱃대․담뱃갑을 버리고 3개월치 담뱃값 60전과 의연금 10원도 함께 내놓았다. 다른 회원들도 즉석에서 경쟁적으로 의연금 대열에 참여하는 상황이었다. 이리하여 당일 모금된 금액만도 2,000여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2월 초순 발기인인 김광제 선생과 부사장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朴海齡)을 비롯한 회원들은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김광제 선생과 서상돈의 공동명의로 발표하였다. 이들은 취지서를 국내 언론사와 계몽단체는 물론 국외 일본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 발송하는 등 전국민적인 동참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는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를 게재함으로써 자립경제운동의 시작을 널리 알렸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곧바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갔다.

 

선생은 1907년 3월 1일 대한자강회 임시평의회에 국채보상에 관한 의안을 제출하였다. 본회는 《대한자강회월보》 9호 논설란에 「단연상채문제(斷煙償債問題)」와 잡록란에 국채보상운동 발기 경위와 전국 각지에 조직된 국채보상단체 취지서 7건을 게재하였다. 이는 회원이나 지회원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였다.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가 개최되었던 북후정 터. (현재 대구시민회관)
사진출처=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대구·경북 독립운동사적지Ⅰ』, 2010.

 

선생은 이어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호남지역 시찰원으로 임실․부안․김제․금구․함열․광주․목포 등지를 순회하면서 대중강연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선생의 강연에 감화된 지회원들은 각지에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지계발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은 경북 김천․개령 등 영남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주요 내용은 국채보상운동 필요성, 근대교육 중요성, 국제정세, 경제문제 등이었다. 선생의 강연은 1909년 9월 광동서관에서 ‘강연집(동양 선생 김광제 강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3․1운동 전후로 귀국하여 국내 민족해방운동을 도모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대한매일신보》1907년 2월 21일자). 김광제·서상돈 선생을 중심으로 발표된 취지서로 국채보상운동에 전국민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선생은 3․1운동을 전후로 귀국하였다. 목적은 국내 민족해방운동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마침 이달(李達)은 1919년 2월 동경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후 이듬해 1월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하여 국내로 잠입․활동하고 있었다. 선생도 동경유학생 이달․김영만(金榮萬)과 대구유지 홍천갑(洪千甲)․백의수(白義洙) 등과 함께 동참하였다. 이들은 ‘제2의 3․1운동’을 위하여 격문과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제2의 3·1운동을 준비하러 국내로 복귀. 조선노동대회 주도하며 노동 활동에 나서

한편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각종 사회단체 결성과 더불어 부문별 민족운동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19년 박중화(朴重華)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노동연구회는 이듬해 2월 7일 해체되었다. 선생은 2월 16일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선노동대회 발기회를 주도하는 등 노동자 권익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25일에는 「노동단취지서」 발표와 함께 단장에 취임하였다. 4월 11일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직후 그의 주도로 노동대회도 조직되었다. 선생은 조선노동대회 전국연합회장과 경성본부장으로 전국 순회강연에 나서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그 해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형목 | 독립기념관 연구원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김광제 선생 근영 사진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발행2012.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