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참여했던 나이는 불과 18세. 십대의 나이에 안중근 거사의 준비를 도왔고 거사 후 공범으로 체포되었던 선생은, 출옥 후에도 사회주의 혁명군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짧은 생애를 바쳤다.
청년 유동하, 안중근을 만나다
유동하(劉東夏, 1892.1.5〜1918) 선생은 1892(고종 29)년 1월 5일 함경남도 원산 길명(吉明)에서 경집 유승렬과 함흥군수의 딸로 알려진 강씨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안중근 의거 심문 조서에 유강로(柳江露)로 기록되어 있지만 후일 ‘유동하’가 본명임이 밝혀졌다. 유강로라는 이름은 선생이 하얼빈에서 러시아 병사에게 체포되었을 때, 순간적으로 지어낸 이름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재판과정에서 안중근 등 선생의 동지들은 선생을 유관오(劉寬五)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선생의 부친 유승렬은 민족운동계에서는 유경집(劉敬緝)으로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 이름은 ‘유 게이슈’이다. 유경집은 1897년에 원산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하여 동의건재 약방을 경영하였다. 선생은 3년간 부친과 소식이 끊어졌다가 1902년 백부인 유태열의 가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면서 다시 부친과 합류하였다. 이후에 러시아, 만주의 국경지대인 포브라니치나야에서 8리 정도 떨어진 한인 마을 코로지포에 정착하였다. 당시 포브라니치나야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20여 명 정도로 주로 담배가게, 세탁업 등에 종사하면서 근근이 살아간 데 비해, 선생의 부친은 약종상을 경영하고 한의사로도 활동하면서 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 활약하는 항일운동가들을 지원하였다. 안중근은 선생의 집을 방문하여 며칠을 묵으며 유경집과 시국을 담론하고 했는데, 그 때가 1907년경이었다. 1909년, 선생이 18세의 약관의 나이로 안중근 의거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의 부친 유경집이 안중근과 가까운 사이였고 이미 항일운동에 관련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포브라니치나야에서 70여 리 떨어진 모구 하촌에 살고 있던 허희명(許熙明)의 딸과 결혼하였다. 부친을 도와 약종상에 종사하던 중 1909년 3월 부친의 집을 방문한 안중근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러시아에 능통한 선생을 안중근의 수행원으로 보내 의거가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등은 어린 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선생이 의거 계획을 몰랐던 것으로 진술하였다. 선생도 일체 사전 계획을 모의한 사실이 없다고 시정 진술했으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선생은 처음부터 의거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즉 안중근 의거는 여러 변수를 계산하고 참여자 각자가 역할 분담을 통해 철저히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단행한 것이었다.
18세의 나이로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동참하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이 러시아 주재 교민단체신문인 <대동공보>에 보도되면서 이강과 정재관 등 국민회 원동위원들과<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서 백발백중의 명사수이며 애국심이 출중한 자로 알려진 안중근이 추천되었다. 이강은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냈고 편지를 받은 안중근은 바로 달려와 의거에 대한 구체적 의논에 들어갔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연추에서 일제 요인과 친일파들을 제거할 것을 왼쪽 무명지를 잘라 피로써 맹세하고 12명의 동지들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한 바 있는데, 1909년 10월에는 선생의 부친 유경집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구국혁신을 맹서하고 연서(連書)한 뒤 ‘7인 동맹(同盟)’을 조직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안중근과 우덕순이 하얼빈까지 무사하게 도착하도록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여 의거를 결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였다.
미주에서 발굴된 국민회 자료에서 나온 공립협회 원동지회의 명단에 의하면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에는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 조도선, 그리고 선생의 부친 유경집 등이 모두 가입해 있다. 그리고 국민회로 개편된 이후에 최재형, 안명근 등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이들 외에 한인 유력자들이 공립협회와 국민회에 가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선생과 일행이 하얼빈에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인 김성백은 국민회 하얼빈 만주지방총회를 설립한 인물이다. 그리고 안중근의 가족을 하얼빈으로 데려온 정대호 역시 국민회 회원이었다.
<대동공보>의 주역들은 안중근 의거를 성공시키고자 여러 지원을 약속하였다. 의거에 사용될 총과 탄알은 이강이 준비하였고 의거에 필요한 경비는 <대동공보> 발행인인 유진률이 마련했다. 그리고 의거 실행을 위해 안중근과 우덕순이 선정되었고 통역과 연락담당으로 조도선과 선생이 선정되었다.
하얼빈 의거 3일 전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안중근·우덕순·유동하 선생이다. <출처: 윤병석 편역, [안중근 문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안중근은 크라스키노를 출발하여 포시에트를 경유하여 10월 20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하였다. 안중근은 이곳에서 1박을 한 후 21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오전 8시 50분발 하얼빈역으로 향하는 우편열차에 몸을 실었다. 의거에 함께 참여하기로 한 동지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다음 정거장인 포시에트에서 2등 차표를 사서 기차에 올라 안중근과 합류하였다. 포시에트 다음 정거장에서는 유진률과 이강이 기다렸다가 기차에 올라타 ‘두루스케’라 부르는 외투 2벌을 전달하였다. 너무 초라한 차림이 혹여 환영회 식장에서 의심받을 것을 우려하여 준비된 것이었다. 이강과 유진률이 장도에 오르는 이들을 환송하면서 “지금 삼천리 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 하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고 우덕순은 회고하였다. 기차는 저녁 무렵 만주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수분하(스이펜호)에 있는 포브라니치나야역에 다다랐다. 열차가 1시간 9분간 역에 정차하는 동안 안중근은 포브라니치나야역 가까이에 위치한 유경집의 집을 찾았다고 하나 선생의 누이동생 유동선은 유경집이 역까지 마중 나와 선생을 이들과 합류시킨 것으로 증언한다.
선생을 대동한 안중근은 발차 시간에 맞추어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안중근과 우덕순, 그리고 선생이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타면서 거사의 장도가 시작되었다.
거사 직후 체포되어 옥살이를 견디다
선생과 안중근, 우덕순이 하얼빈역에 도착한 때는 22일 저녁 9시 15분이었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일행은 선생의 안내를 받아 마차를 타고 김성백의 집에 도착하였다. 1909년 당시 32세의 김성백은 일찍이 러시아에 귀화하여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었던 인물로, 건축청부업에 종사하며 일찍이 동청철도가 건설될 당시 건설에 참여하여 하얼빈의 러시아 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선생과 일행은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신문을 통해 이토가 언제 하얼빈에 오는지 탐색하였다. 하얼빈에 도착한 날 거리에서 입수한 중문판의 <원동보 遠東報>에서는 “전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동청 철도 총국의 특별 열차 편으로 25일 관성자(장춘)역을 출발하여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브체프를 만나려고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기사를 보며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시간을 계산하고 하루 밤을 자고 일어난 일행은 23일 아침에 이발소에서 머리를 단장하고 하얼빈 공원(현재 조린공원)에서 의거계획을 꼼꼼히 점검하였다. 그리고 공원 남문 밖 중국인의 사진관에서 의거의 장도에 오르기 전 의식을 치르듯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하였다. 이 날 오후 안중근과 우덕순은 김성백의 안내를 받아 동흥학교를 방문하여 <대동공보> 하얼빈지국의 일을 맡고 있던 김형재를 만났다. 안중근은 이강의 소개편지를 그에게 보여주었고 김형재는 안중근과 우덕순을 김성옥의 집으로 안내하여 그곳에서 조도선을 만났다. 이렇게 하여 23일날 저녁 어린 선생을 대신해 통역을 할 조도선이 합류하게 되었다.
다시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더 묵은 일행은 24일 아침 하얼빈 정거장으로 나갔으며 선생이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3인의 삼협하(三峽河)행 차표 3장을 구입했다. 선생은 계속 하얼빈에 남아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고 3인만 삼협하행 열차를 탔는데 도중 채가구에서 내렸다. 채가구는 삼협하에서 한 정거장 못 미치는 곳에 위치한 역으로, 하얼빈에서 가장 가까운 남청열차가 교차하는 정거장이었다. 이곳에서 거사할 것을 결심한 일행은 이곳 저곳을 답사하며 거사장소를 점검하였다. 그날 밤 안중근 일행은 러시아 철도총국의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지나 관성자로 가는 것을 확인하였다. 조도선은 역사무원으로부터 26일 아침 6시에 채가구역을 지났던 그 열차가 관성자에서 다시 출발하여 채가구에 도착한다는 사실까지 확인하였다.
당시 <원동보> 등 신문에서는 이토의 방문 날짜가 25일 혹은 27일까지 엇갈린 보도를 하고 있었기에 안중근 일행은 좀 더 분명한 정보를 필요로 하였다. 이 상태에서 모두 채가구에서 이토를 기다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였고, 안중근은 열차가 아침 6시에 채가구역에 도착한다면 너무 이른 시간이라 이토가 열차에서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우덕순은 채가구에서,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대기하고 상황을 보아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에 있는 선생에게 별다른 언급 없이 “우리는 여기 이르러 하차하였다. 만일 그곳에 긴급한 일이 있거든 전보를 쳐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선생에게서 온 회신에서는 “내일 아침에 도착한다”라고만 언급되어 있었다. 이 전보의 내용만으로는 이토의 도착시간을 알 수 없었던 안중근은 채가구역 구내에 있는 세미요로프라는 러시아인 다방에서 우덕순에게 5~6개의 탄환을 건네주고 자신은 오후 2시 북행열차를 타고 하얼빈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26일 아침 9시경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아침 9시 30분경 안중근이 쏜 3발의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제1탄과 제2탄은 오른쪽 팔과 가슴 부분에, 제3탄은 위팔의 가운데 부분을 관통하였다. 의거에 성공한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미치오클로프라는 러시아병사에게 체포되었다. 이토는 러시아 장교들과 수행원들의 손으로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30분 후에 절명하였다.
여순 고등법원에서 공개재판 받는 장면. 왼쪽부터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이다. <출처: 독립기념관>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대에 포박된 안중근은 하얼빈 역 헌병대 분파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심문을 마친 후 저녁 8~9시경에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이송되어 두 차례 심문을 더 받았고, 28일에 일본 관동도독부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가 담당검사로서 여순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였다. 한편 의거가 있은 지 1〜2시간이 지난 후인 11시경에 채가구 구내 다방에 갇혀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러시아 헌병의 검문을 받았고, 그들의 몸에서 실탄이 장전된 권총과 탄환이 나오자 바로 검거되었다. 선생도 의거 당일 체포되었고 그 외에 15명의 한인이 의거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하얼빈 일본영사관으로 인계되었다.
안중근의 취조가 일단 끝나자 10월 31일부터는 선생을 비롯한 연루자 15명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11월 1일 선생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을 비롯하여 김성옥, 김태식, 장수명, 탁공규, 김성화, 홍청담, 김형재 등은 일본 헌병들의 감시하에 하얼빈역에서 오전 11시 25분에 발차하는 기차를 타고 11월 3일에 여순에 도착하여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1910년 2월 7일부터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공판을 시작하여 6차례 재판을 받았다.
최후 판결은 2월 14일 오전 10시 반에 러시아 법학사 야부친스키의 부처와 한국변호사 안병찬과 러시아 변호사 미하아로프 및 그 동행 러시아영사관원과 안중근의 동생 정근, 공근과 종제 명근이 참석한 가운데, 재판장이 4인에 대한 판결주문을 선고하였다.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3년, 조도선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고, 선생은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일시를 전보로 타전해 살인을 방조한 죄목으로 형법 제 199조 제 62,63조에 해당되나 제68조에 따라 정상을 참작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이 판결에 대해 불복하면 5일 이내에 공소하라고 했을 때 우덕순과 조도선은 판결에 대해 이론이 없다고 했고 선생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요”라고 말했다.
혁명군으로 투쟁하다 시베리아에서 숨을 거두다
하얼빈 지방회 회장 김성백이 북미지방총회 회장 문양목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선생은 형기만료로 1911년 8월 15일에 조도선과 여순감옥에서 석방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8월 22일 아침 9시에 출옥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하얼빈지방총회에서는 장연(藏煙)청년회와 연합해 8월 22일 오후 9시에 선생과 조도선의 석방을 축하하는 환영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그 해 8월 29일에는 망국 제1주년 기념식이 선생과 조도선의 석방을 축하하는 이들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선생은 각지의 시베리아 동포사회를 심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애국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1910년 4월 16일자 영국 <The Graphic>에 게재된 공개재판 기사. 유동하 선생을 비롯한 안중근, 조도선, 우덕순의 사진 등과 함께 공개재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12년 2월 초 선생과 그의 부친은 톰스크로 이동하여 그곳에 약국을 차렸다. 유경집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안창호가 북만주 일대를 돌아볼 때 안내를 맡았으며 안중근의 가족을 돌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경집은 안중근 모친과 아내, 맏딸, 큰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동생 안정근과 그의 처와 안공근 등 여덟 식구를 코로지포로 오게 하고 후일 목릉에 안착하도록 도왔다.
1917년 봄, 선생은 부친과 함께 남러시아의 싸말리아로 들어갔고 가족은 김성백이 있는 이르크츠크로 이주하였다.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시베리아까지 혁명의 여파가 미치면서 1918년 4월 28일 하바로브스크에서는 망명 독립운동가들과 재러 한인들에 의해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한인사회당이 탄생하였다. 한인의 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애국청년들은 볼셰비키 혁명군에 열렬히 가담하여 백군과의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도 볼셰비키 사상을 받아들이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혁명군에 가담하였다. 선생이 혁명세력과의 연대투쟁에 참여했던 것은 혁명의 성공이 한국의 독립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국제간섭군 중 최대의 병력을 연해주와 흑룡주에 파견하여 시베리아 일대를 장악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선생의 죽음의 경위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1918년 가을, 선생은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11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피체되어 싸말리아 강가로 끌려가서 교두에서 총살을 당했다고 전한다. 총살을 앞두고 교두에서 뛰어내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김용괄이라는 청년에 의해 선생의 죽음의 순간이 밝혀질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우진수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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