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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단종(端宗) - 장릉(莊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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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21
사 적 : 제 196 호
莊陵의 특징 : 단종(이홍위(李弘暐) : 1441-1457, 재위 3년)의 장릉은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습니다. 영월로의 유배생활에서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단종은 영월 야산에 암매장되었던 것을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封墳)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뒤 240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단종(端宗)으로 묘호(廟號)를 붙이고 종묘(宗廟)에 부묘하고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습니다.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무인석(武人石)은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 또한 가장 간단하게 조성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습니다.
端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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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53 |
1년 |
1월, 문종실록(文宗實錄)찬수 시작 |
1454 |
2년 |
3월, 춘추관 '세종실록' 163권 완성 |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 발생 |
6월, 단종 수양대군에게 왕위 선위 |
뒷 이야기 : 문종의 외아들로 태어난[세종 23년] 단종은 8세 때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문종이 승하하자 1452년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어린 단종을 보위했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성삼문, 박팽년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궁중의 역사(力士)였던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죄명으로 단종을 보위했던 충신들을 제거하는 일대 거사를 일으킨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사변(事變)을 일으킵니다. 곧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를 하고 상왕(上王)으로 2년여를 지내다가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復位) 사건이 터지자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또한 단종의 실록 역시 처음에는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불려지다가 숙종 때 복위되면서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명칭을 되찾게 됩니다. 결국 권력에 대한 수양대군의 야심으로 단종의 폐위와 사망. 17살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마감한 단종에 대한 비애는 그가 유배(流配)되었던 영월의 '청령포(淸冷浦)'나 '금표비(禁標碑)' 등지에서 가슴에 느껴집니다. 또한 영흥리의 '자규루(子規樓)'에서 자규시(子規詩)를 읊조리던 어린 단종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질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왕위의 선위(禪位)에서 유배 생활과 사약(賜藥)을 받고 승하할 때까지의 단종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권력의 비애를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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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 사릉(思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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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
사 적 : 제 209 호
思陵의 특징 :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 1440-1521)의 사릉(思陵)은 한 많은 비운의 왕비 송씨의 불우한 일생을 대변하듯이 다소 초라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단종의 장릉이 멀리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지만 사릉은 경기도 남양주에 승하 당시(중종 16년) 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상태이었기에 부인의 묘로 초라하게 조성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복(追復)되어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역시 추봉된 능이었기에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없이 봉분만 조성하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도 한 쌍씩만 주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비공개 능입니다.
정순왕후의 약사(略史) : 여산송씨(礪山宋氏)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인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1453년(단종 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1457년(세조 3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어 열 여덟 어린 나이에 홀로되어 82세(1521년, 중종 16년)로 승하할 때까지 한 많은 일생을 보내야했습니다. 궁궐에서 추방된 후 여막에서 동냥으로 끼니를 이었고, 염색업으로 여생을 보내면서도 세조(世祖)의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는 청빈한 생활을 했습니다. * 21대 영조(英祖)의 계비(繼妃)도 정순왕후(貞純王后)입니다. |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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