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신숙[申肅, 1885.12.29(음력)~1967.11.22]

문성식 2015. 9. 8. 23:20

신숙 천도교 이념으로 독립전쟁 복무한 한국독립군 참모장 

한국의 민족적 독립운동은 모름지기 통일된 혁명적 전선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 유력한 혁명적 중추로 유일한 민족적 혁명당의 형체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국민위원회는 ‘한국독립당’이라는 명명하에 당규 및 당의 현시 착수할 사업방침을 정했다. (중략) 한국의 독립운동은 평화적 운동 및 타협적 수단 혹은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외교로는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선생이 중심이 된 한국국민위원회의 한국독립당 조직안 중에서(1924.6.7)-

인쇄국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문창학교 세우고 교감 맡아

신숙 이미지 1

신숙[申肅, 1885.12.29(음력)~1967.11.22] 선생은 1885년 12월 29일(음)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京畿道 加平郡 郡內面 鄕校里)에서 신석범(申錫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연길(連吉)이고, 열 두살에는 태봉(泰鳳), 스물 한 살 때에는 태련(泰鍊)으로 바꾸었다. 신숙(申肅)이란 이름은 1920년 4월 국외로 탈출하면서부터 사용하였다. 호는 강재(剛齋)․시정(是丁)․치정(癡丁) 등이 있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린 선생은 12세에 이규봉(李圭鳳)에게 사사하면서 14세까지 한학을 공부했으며 16세에 가평군 군내면 약정대리(約正代理), 17세에는 북면, 18세에는 외서면 약정(約正; 지금의 면장)을 거쳐 가평군 서기로 근무했다. 19세 되던 1903년 4월 강원도 양구군 청송리의 의병장 최도환(崔道煥)의 둘째 딸 최백경(崔百卿)과 혼인하였다. 이해 12월 1일 동학에 입교하였다. 어릴 때부터 고독을 느끼며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정치사상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당시 동학을 이끌던 손병희 교주가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한국 독립의 공고화와 백만 교도의 단결을 주창하자 동학에 입교한 것이다.

 

뒤늦게 동학에 입교한 것을 안 선생의 부친은 백방으로 탈교(脫敎)하도록 하였으며 바깥출입까지 감시하였다. 1904년 동학교단에서 진보회를 중심으로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하자 선생은 1905년 봄 상경하는 즉시 단발을 하였다.

 

선생은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경무청의 순검(巡檢)에 응시, 합격하여 몇 달을 근무하였지만 구시대의 부조리에 염증을 느끼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국민일보(國民日報)》 기자로 들어갔으나 역시 친일매국 행각에 입사 반년만에 사표를 내던지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1907년 봄 천도교인 민영순(閔泳純)의 소개로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들어가 약 4년간 근무하였다. 이 시기 애국적 지식인들은 민중 계몽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선생도 여기에 동참하여 인쇄국에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김남규(金南奎) 등과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교감을 맡아 육영사업에 진력하면서 애국단체를 찾아가 강연을 하는 등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과 독립선언서를 교정 본 인생. 천도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문 당해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선생은 동지인 정한교(鄭漢敎)와 함께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제거하는 것이 조선독립의 첩경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이재명(李在明) 의사의 이완용(李完用) 저격사건으로 당국의 경계가 강화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한국이 일제에 강점됨에 따라 인쇄국에 강제 구류되어 조약문과 융희황제의 칙유문을 교정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천도교종학강습소 강사, 천도교중앙총부 도사실 서계원을 거쳐 1914년에는 천도교 대구대교구장, 1917년에는 다시 중앙총부 대종사 종법원 겸 의사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들어 천도교와 기독교․불교계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추진하자 선생은 2월 27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李鍾一)의 지휘 아래 김영륜(金永倫)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맡기도 하였다. 3․1운동 직후 선생은 의친왕 이강(李剛)․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 등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일시 구금된 적도 있었다. 이어 국내외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에서 천도교측 연락 임무를 띠고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5월 1일 이인숙(李仁淑)․정광조(鄭廣朝) 등 천도교 간부 28명과 함께 경성헌병사령부에 체포되어 갖은 악형과 고문으로 수개월을 보내고 석방된 뒤 국외망명을 결심하였다.

상해로 망명하여 천도교 이념에 입각한 통일당을 조직, 총재로서 일해

마침 1920년 봄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천도교중앙총부에 천도교 대표 한 사람을 파견하여 달라는 요청이 있자 선생은 선천교구장 이군오(李君五)와 의주대교구장 최석련(崔碩連) 등을 만나 상의했다. 이들은 이미 최동오(崔東午)․김의종(金義宗)․이민창(李民昌) 등을 만주로 보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선생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출국하여 활동하라”는 권유를 받고 극비리에 4월 23일 신상태(申相泰)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비밀연락장소인 삼산상회(三山商會)에서 박승환(朴承煥)․한명하(韓明河)․홍종하(洪鍾夏) 등을 만나 이들의 주선으로 중국인 집에 은신하는 동안 상해에서 온 장경순(張敬順)의 안내로 영국인이 경영하는 상선을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 받았으나 일단 이를 유보하고 도산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만주지방에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개척회사 설립을 제의하였다. 도산이 이를 승낙하자 선생은 자금 2백원을 염출하기 위해 몇몇 동지를 국내와 대련으로 각각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련에서 미곡상을 가장하고 활동하던 동지가 체포되어 선생의 망명 첫 사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상해에는 선생보다 먼저 천도교에서 파견한 최동오․김의종․김홍선(金弘善)․장경순․이민창 등 교인이 프랑스조계 하비로 보강리 20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과 합류하여 이곳에 천도교상해전교실(天道敎上海傳敎室)을 설치하는 한편, 『천도교사실(天道敎事實)』이란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포교활동에도 진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선생은 천도교의 이념에 입각한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였다.

 

국민대표대회 기간 중 거행된 3·1절 기념식 광경 보도기사(《독립신문》1923년 3월 7일자). 국민대표회의에서는 대표 일동이 당일 오전 9시부터 회의장에 모여 의장 김동삼의 사회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신숙 선생은 여운형과 함께 기념사를 낭독하였다.

 

통일당의 강령은 “첫째, 국민의 마음과 힘을 통일시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신시대 신이상에 기초한 신국가를 건설한다. 둘째, 인본주의를 창명하여 구천지 구사회를 신천지 신사회로 개조하고 조선적 신문화를 세계에 건설한다. 셋째, 전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강권을 배제하고 세계의 대동을 실현한다. 넷째, 산업 및 교육의 새로운 설비를 도모하고 인류공동생활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내용이다. 통일당은 총리에 신숙, 정치부장에 최동오, 경제부장에 김의종, 문화부장에 이민창을 각각 선임하였다. 이즈음 만주 각처에 무수한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서로 알력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선생은 이들 독립단체와 독립군을 일원화하여 체계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토록 하기 위해 1920년 9월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 선생은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과 더불어 군사통일촉성회를 발기하였다. 그 결과 1921년 4월 노령․북만주․하와이 및 국내 등지에서 8개 단체의 대표가 북경에 모여 서직문(西直門) 밖 삼패자화원(三牌子花園)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통일당 대표로 참석한 선생은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박용만․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군정부(軍政府) 구성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신성모(申性模)․황학수(黃學秀) 등과 함께 통일당의 대표자격으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그 동안 추진해오던 국민대표회의가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선생은 국민대표회의 주최 순국선현추모행사 준비위원과 회규기초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리고 1월 31일 오후 상해 삼일당에서 개최한 국민대표회의 개막식에서 선생은 안창호․김마리아 등과 함께 연설하였으며, 의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3월 1일 개최된 3․1운동 기념식에서는 여운형과 함께 기념사를 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기간 동안 선생은 창조파의 중심인물로서 임정을 대신할 새로운 독립운동의 영도기관 건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의장단이 사퇴하는 등 5개월 여에 걸쳐 갑론을박하다가 와해의 위기에 빠졌다. 그리하여 다시 의장단을 선출한 결과 의장에 윤해, 부의장에 선생이 선임되었으나 임시정부 문제를 타결 짓지 못한 채 국민대표회의는 6월 2일 파국을 맞이하였다. 다음날 6월 3일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발족시켰다. 선생은 외무위원장 김규식, 군무위원장 지청천, 재무위원장 윤덕보, 경제위원장 김응섭과 더불어 내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실천하기 위해 1923년 8월 20일 김규식․이청천․윤해․원세훈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코민테른 동양부장 대리인 파인블크를 비롯 한명세 등과 여러 차례 협상 끝에 원조를 약속 받았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독일혁명의 실패와 1924년 레닌의 사망 등 정치적 변동으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선생은 1925년 3월초 아무 성과 없이 만주 길림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만주의 상황은 정의부․신민부․참의부로 정립되어 있었고 국제공산당과 교섭도 원활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일차적으로 천도교의 포교사업에 전념하였다. 이때 이름을 숙(肅)에서 태치(泰癡)로 고친 선생은 액목현 교하(蛟河)에 정착하여 천도교 납법구종리원(拉法溝宗理院)을 설립하고 새로운 운동방략을 모색하였다.

한국독립당에게 민본정치, 노본경제, 인본문화의 3대 강령 제시.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활약.

이듬해 선생은 부친을 비롯한 가족들과 고국을 떠난 지 6년 만에 하얼빈에서 재회하였다. 이후 가족들과 하얼빈, 이도하자 등의 중국인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1927년 2월 이도하자 부근의 송봉산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신창학교(新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현지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당시 석두하자에 본거지를 둔 신민부의 민정위원장 최호(崔顥)가 찾아와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통합을 위해 신민부의 전권대표로 활동해 줄 것을 요청하여 왔다. 선생은 이를 수락하고 신민부 민정위원 자격으로 삼부통합운동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중동선 위하현에서 신민부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에 입각한 독립운동 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선생은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 등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신숙 선생이 참모로 복무했던 시절의 한국독립군 활동 보도기사(《동아일보》1933년 7월 31일자)." 당시 군총사령 이청천이 풍옥상동맹군에 가담했다는 제목이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 점령한 후 1932년 3월 부의(溥儀)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이처럼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자 한국독립당은 중국군과 항일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선생은 한국독립당 및 한국독립군 대표자격으로, 남대관(南大觀)과 함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호로군연합사령부(護路軍聯合司令部)와 접촉하여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합의하였다.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군 중로연합군(中路聯合軍) 제3군 독립영으로 편제되었고, 선생은 참모직을 맡았다. 이어 한국독립군은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보병 제8여단 23단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토일연합군(中韓討日聯合軍)을 결성하고 경박호․팔도하자․동경성․양모림․대전자령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만주군의 대공세와 한인사회의 와해, 그리고 동북항일의용군 일부부대와의 갈등으로 한국독립군은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은 끝까지 남기를 원하는 4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오상현 사하자의 자치단장 심경산(沈慶山)의 도움으로 한인 농촌에 분산 주둔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여기서 선생은 독립군을 유지하는 방법은 중국 국민당 정부 및 반만 항일세력의 지원과 김구 등 한인세력과의 연합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중국정부 고위층과 면담을 추진하였다.

 

1933년 2월 선생은 김상덕(金尙德)과 함께 남호두를 출발, 4월 초 장춘을 거쳐 봉천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선생은 국내로 잠입하여 천도교 중앙총부의 동지들로부터 재정 후원을 받아 안동․대련․천진을 거쳐 5월 말경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신한독립당의 윤기섭(尹琦燮)․신익희(申翼熙) 등과 만나 한국독립당과 합당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이들의 협조로 20여 명의 기자를 초청하여 한국독립군의 활동상황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蔣介石) 군사위원장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주배덕(朱培德)으로부터 면담통지를 받은 선생은 남경으로 가 중국정부의 후원을 요청하였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실의에 빠졌던 선생은 마점산(馬占山)․소병문(蘇炳文)․왕덕림(王德林) 등 군벌들이 유럽을 순방하고 상해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선생은 이범석(李範奭)을 통해 왕덕림 부대의 부대장 공헌영과 면담하였으며 그로부터 6백원의 후원금을 받았다. 아울러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온 김규식에게 ‘한국독립군 지원자금’이란 명목으로 5백원을 지원 받아 이를 8월 초순 북경으로 가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에게 전달하였다.

 

1933년 11월 선생은 북경에서 차남 화균(化均) 등 가족과 합류하였고, 여기에서 1935년경에 이르기까지 거주하였다. 그럴 즈음 만주에서 선생을 찾아온 장남 원균(元均)으로부터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로 가다가 12월 4일 영구(營口)에서 일본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이후 보름 동안 취조를 받고 길림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인계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선생은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 연금생활을 계속해야만 하였다.

일본 패망 후 동북한국교민회 총회장으로 중국내 한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애써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았지만 19일부터 소련군이 만주에 진주하면서 치안은 극도로 혼란하였다. 이때까지 중동선 이도하자에 머물고 있던 선생은 만주의 불안한 치안상황에서 한인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이들의 귀국을 돕는 일을 적극 추진하였다. 나아가 만주 일대에서 곤경에 처한 교포들의 문제를 처리해 달라는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길림성 동영학교(同榮學校)에서 개최된 길림조선인회 결성대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소련군정 하에서 밀려드는 피난민의 수습과 귀국 희망자의 알선, 그리고 소련군의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하여 항의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등 민심안정에 전력하였다. 나아가 장춘에서 남북만주 지역 한인들이 교포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한인통일기관이라 할 수 있는 동북한국민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회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전체 교포에게 보내는 담화문을 발표, 합심해서 난국을 타개해 나갈 것을 호소했다. 또한 1946년 8월 봉천에서 개최된 동북한국교민회총회에서 선생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선생은 남경과 북경 등지의 중국정부 기관을 오가며 한인의 귀국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와 함께 선생은 천진의 미군정 출장소를 방문, 한인의 귀국문제를 논의하여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천도교보국연맹 위원장, 동학회 위원장으로 천도교 이념에 바탕한 정치 구현에 애써

1946년 12월 선생은 미군정 출장소로부터 마지막으로 연내에 귀국하는 난민수송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을 통해 귀국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상대로 중국에 남아있는 한인들의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 3월 동북한인교민대표 자격으로 ‘재만 동포의 구출 및 재산반환 교섭’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과도입법의원에 제출하였다. 이해 4월 선생은 김규식의 권유로 입법의원이 된 후에도 조사단을 구성하는 등 한인동포 귀환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6월 선생은 천도교보국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 3월에는 민족자주연맹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4월 11일에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연락원 자격으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까지 다녀오는 등 남북분단 저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천도교중앙총부 도사로 추대된 선생은 만화회(萬化會)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서 종교활동에 진력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국토가 폐허화되자 선생은 피난지 부산에서 천도교보국연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월남교인 수습과 조직 발전을 위해 각 지방에 지부를 조직하여 천도교 발전에 노력하였다. 선생은 1957년 보국연맹과 청년회가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동학회가 조직되자 고문으로, 1960년에는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3월 천도교 이념에 입각한 정당으로 동학당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 대표책임위원으로 추대되어 정당활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신숙 선생의 별세를 보도한 기사(《동아일보》1967년 11월 23일자)

 

자유당 시절 선생은 민주혁신당 중앙위원장,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대표지도위원, 광복동지회 부회장으로 독재정권과 투쟁하였다. 1960년 4․19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과도내각이 들어서면서 실시된 7․29총선에서 철원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선생은 갑작스런 중풍으로 쓰러져 약 1년간 치료 끝에 약간 호전되었으나 끝내 완치되지 못하고, 1967년 11월 22일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2.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