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심훈(沈熏, 1901.9.12〜1936.9.16)

문성식 2015. 9. 8. 23:19

심훈 해방이 오면 이 내 몸 가죽 벗겨 기쁨 울리는 북을 만들리라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민족독립)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나이 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워하여 하소연해 본 적이 없습니다.
- 선생이 어머님에게 올린 옥중편지 중에서(1919) –

경성고보 입학…이범석 윤극영 박헌영 박열과 같이 학교 다녀

심훈 이미지 1

심훈(沈熏, 1901.9.12〜1936.9.16) 선생은 1901년 9월 12일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에서 출생하였다. 심상정(沈相珽)과 해평(海平) 윤씨 사이의 3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이었다.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금강생(金剛生)․백랑(白浪) 등이 있다. 선생의 원래 이름은 대섭(大燮)이나, 훈(熏)이란 필명이 널리 알려졌다. 훈이란 이름은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할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계속 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막내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 남달리 머리가 영민하였기 때문에 부모를 비롯한 주위의 기대 또한 매우 컸다. 선생의 성장과정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1915년 서울 교동(校洞)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들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합격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철기 이범석이 재학하고 있었고, 같이 입학한 동기생들로는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로 이름 높은 박열,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가로 유명한 박헌영 등이 있었다.

 

감수성이 누구보다 예민했던 선생이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하에서 이들과 같이 학창생활을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학창생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들과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에 분노하면서 항일 독립운동 의지를 굳혀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침내 선생의 울분은 분출되었다. 경성고보 3학년 때인 1917년 일본인 수학선생과의 알력으로 백지 답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선생은 수학 과목의 낙제로 유급을 당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시위운동에 앞장섰다. 그러한 사실은 선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도 잘 나타나있다.

 

심대섭(심훈) 외 60명은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그 시위운동을 개시함을 듣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많은 군중과 함께 불온 행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려고 기도하여 1919년 3월 1일 경성부 파고다 공원에서 위의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수천인의 군중에 참가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경성부내의 각 곳을 광분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

3.1 만세운동에 참여, 8개월간 옥고. 그러나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독립의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민족 대표들이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파고다)공원에서는 수 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대회를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선생은 바로 이러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 민중대회에 참여하였고, 이어 서울 각지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선생은 서울에서 각급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만세시위 운동 과정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3·1만세운동으로 피체되어 재판을 받은 심훈 선생의 판결문(1919.11.06, 경성지방법원)

 

3․1운동 기간 중,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 규모의 시위운동이 바로 남대문역 만세시위운동이다. 이 만세시위운동은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과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등이 주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대부분과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지방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종로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웠던 것이다.

 

선생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맘껏 분출하다가 조남천․손덕기․최강윤 등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선생은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 결정을 거쳐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에 따라 석방되었지만, 선생은 이미 미결기간까지 포함하여 약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였다. 옥중에서도 선생의 민족 독립을 향한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이 투옥 중, 어머니를 위로하고 조국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진 다음과 같은 옥중편지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조국)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조국 독립에 대한 이 같은 열정이 있었기에 선생은 출옥하자 곧 해외로 망명하여 유학하기로 결심하였다. 3․1운동 참여로 경성고보에서 퇴학당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리하여 그 해 겨울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났고, 그 분들의 영향으로 민족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의 사정은 다음과 같은 선생의 회고에 잘 표현되어 있다.

 

기미년(1919) 겨울 옥고를 치르고 난 나는(심훈) 어색한 청복(淸服)으로 변장을 하고 봉천을 거쳐 북경으로 탈주하였다. 몇 달 동안 그곳에서 두류(逗留)하며 연골(軟骨)에 견디기 어려운 풍상을 겪다가 수삼차 단재(신채호)를 만나 그의 우거(寓居)에서 며칠 저녁 발치 잠을 자면서 가까이 그의 모습을 접하였다. 감명 깊은 그의 말씀도 여기서는 약(畧)할 수밖에 없다. … 북경(北京)서 지내던 때의 추억을 더듬자니 나의 한평생 잊히지 못할 또 한 분의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그는 수년 전 대련(大連)서 칠십 노구로 쇠창살에 갇히어 이미 고인이 된 우당(이회영) 선생이다. 나는 맨 처음 그 어른에게로 소개를 받아서 북경으로 갔었다. 부모의 슬하를 떠나 보지 못하던 19세의 소년은 우당장(友堂丈)과 그 어른의 영식인 규룡(圭龍)씨의 친절한 접대를 받으며 월여(月餘)를 묵었다. 조석으로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북만에서 고생하시던 이야기며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는 소식을 거기서 들었는데, 선생은 나를 막내아들만치나 귀여워해 주셨다.

만주로 건너가 신채호 이회영 선생 집에서 묵으며 항일 예술의 젖줄이 될 체험 겪어

3․1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가진 선생이 신채호와 이회영을 만난 것이다. 이 시기 신채호와 이회영은 일제와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거부하는 절대독립론, 독립운동 방략으로 무장투쟁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임시정부에서 나와 북경에서 《천고(天鼓)》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임정의 외교 독립운동노선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분들과의 만남은 선생에게 절대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시금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이 일제와의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민족독립을 부르짖는 주옥과 같은 항일 문학작품을 남겼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선생은 상해, 남경 등을 거쳐 절강성 항주(杭州)의 지강(芝江)대학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학하였다. 지강대학 유학 중, 특이한 점은 연극에 관심이 컸다는 것이다. 이는 1923년 중국에서 귀국한 선생이 최승일․나경손․김영팔․임남산 등과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아마도 연극이 갖는 역동적인 대중 호소력에 끌렸던 것 같다. 1927년 선생이 직접 각색․감독하여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만들고, 또 자신의 대표작인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한 일도 같은 이유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24년 선생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였다. 이제 비로소 선생의 뜻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지면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거기에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1926년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사건으로 동아일보를 퇴사하게 되었다. 철필구락부는 1924년 11월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이 만든 언론운동단체였다. 1925년 4월 철필구락부는 같은 언론운동단체인 무명회(無名會)와 공동으로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 사회부 기자들은 임금 인상 투쟁을 전개하여 신문사 경영진의 비위를 거슬렀다. 나아가 이듬해에는 일제의 언론탄압에 항의하여 언론옹호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철필구락부는 해산되었고, 거기에 참여하였던 다수의 기자들도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바로 이때 선생도 동아일보사에서 퇴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언론 운동하다가 퇴사.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

선생이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에서 물러난 직후인 4월 26일 융희황제(순종)가 붕어(崩御)하였다.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경술국치 직후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어 거의 유폐되다시피 생활하다가 돌아간 융희황제에 대한 슬픔이 일제를 향한 분노로 폭발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회를 직감할 수 있었다. 광무황제(고종)의 붕어가 3․1운동의 한 계기였다면, 이번 융희황제의 붕어 또한 그와 유사한 독립운동의 폭발을 예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가진 선생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4월 29일 융희황제의 국장이 준비되고 있는 돈화문 앞에서 <통곡 속에서>를 지었고, 5월 16일자 《시대일보》에 발표하였다. 당시 이 시는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살던 한국 민중의 분노를 고조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선생이 예견한 대로 융희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 서울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선생의 시 <통곡 속에서>는 6․10만세운동을 폭발시킨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후 선생은 1927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하였고, 귀국한 뒤에는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각색․감독하여 같은 해 10월 26일 단성사에서 상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 22일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경성고보 동창생 박헌영이 병 보석으로 출옥하자 그를 만났다. 이때 선생은 일제의 고문과 병으로 형편없이 변해버린 박헌영의 몰골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일제에 대한 분노를 <박군(朴君)의 얼굴>이라는 시에 담았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콜병에 담가 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같이 부풀어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중략)

박아 박군아 XX(헌영)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X(한)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길 때까지.

1927년 12월 2일 작성된 이 시에서는 박헌영을 매개로 표현된 친구에 대한 선생의 지극한 사랑과 일제에 대한 강렬한 투쟁의식이 담겨있다. 비록 여건상 실제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투쟁의식은 선생의 일생을 관류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일제에 대한 옥중투쟁 등을 신문에 연재. 일제가 게재 정지시켜

이듬해 1928년부터 선생은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면서, 1930년에는 조선일보에 소설 <동방(東方)의 애인>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게재 정지 처분으로 중단되었고, 이어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였으나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들 두 소설이 모두 선생의 중국 망명, 유학 당시의 생활을 소재로 하였고, 특히 <불사조>는 일제에 대한 옥중투쟁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해 선생은 3․1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였다.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옥고까지 치른 선생에게 있어 그 기념일은 매년 특별한 날이었지만, 이해에는 유난히 더 그랬다. 그것은 1929년 11월 발발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광주학생운동의 여진이 아직 남아 있는 탓이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 원산노동자총파업과 용천소작쟁의 등으로 눈부시게 발휘된 노동자․농민 등의 항일투쟁을 목격한 감격인지도 모른다. 선생은 침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항일 저항문학의 최고 금자탑으로 불린 <그날이 오면>이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발표한 것이다.

허가 받지 못한 노래. ‘그날이 오면, 이 몸 가죽 벗겨 북 만들어 여러분의 앞장을 서오리다.’

<그날이 오면>. 심훈 선생의 대표적인 시로 선생이 1932년 시집 발행을 위해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받은 원고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는 비위에 거슬리는 내용을 빨간색으로 표시하였고, '삭제' 도장을 찍어 출판 허가를 하지 않았다.
출처: 심훈기념사업회, <심훈문학전집>1, 차림, 2000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후 선생은 1931년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경성방송국 문예담당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사상문제로 곧 그만두었다. 그리고 부모가 살고 있던 충남 당진군 송악면(松嶽面) 부곡리(富谷里)로 낙향하여 창작생활에 정진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1932년 그 동안 발표한 시들을 묶어 시집 발간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것이 바로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집이었는데, 당시 이는 일제의 검열로 빛을 보지 못했다. 때문에 해방 직후에야 간행되어 유고집이 되고 말았다.

 

1933년 선생은 당진에서 장편 소설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집필하여 7월 10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취직하여 상경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다시 당진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 선생은 장편소설 <직여성(織女星)>의 집필을 시작하여 3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고, 당진에 필경사(筆耕舍)라는 자택을 몸소 설계하여 지었다. 여기서 바로 1935년 <상록수>라는 농촌계몽 소설을 집필한 것이다.

낙향하여 <상록수> 완성,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민중들의 큰 호응 얻어

<상록수>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서 전개되고 있던 야학운동과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당시 부곡리에서는 선생의 장조카 심재영(沈載英)이 1932년부터 농촌 야학을 운영하며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와 함께 그는 12명의 젊은이들과 공동경작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이를 높게 평가하였다. 이때 마침 동아일보가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농산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공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이는 1931년부터 동아일보사가 전개하고 있던 브나로드(귀농)운동을 촉진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에 선생은 부곡리의 공동경작운동과 1935년 1월 경기도 반월면 샘골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펴다 요절한 최용신(崔容信)의 이야기를 연결하여 <상록수>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록수>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당선작으로 선정되었고, 그 해 9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어 당시 민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심훈 선생 별세 보도기사(《매일신보》1936년 9월 17일자)

<상록수>와 함께 한 운명…출간 작업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1936년 선생은 <상록수>의 영화화에 나서, 선생이 각색․감독을 맡기로 하고 제작사까지 선정하여 제반 준비를 갖추었지만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은 <상록수>를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로 마음먹고, 상경하여 한성도서주식회사 2층에서 침식하며 간행 작업에 힘을 쏟다가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2.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