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2_19.jpg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백자 항아리로, 크기는 높이 49.0㎝, 아가리 지름 20.1㎝, 밑 지름 15.7㎝이다.

입호(立壺)든 원호(圓壺)든 이런 큰 항아리는 성형(成形) 및 번조(燔造)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물레로 차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고, 상·하부분(上·下部分)을 따로따로 만든 후 두 부분을 접합시켜 완성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짧은 구연(口緣)은 사직선(斜直線)으로 예각(銳角)을 이루며 맵시있게 꺾여졌으며, 구부(口部) 아래에서부터 경부(頸部)가 따로 없이 너그러운 곡선(曲線)을 그리면서 팽창되다가 동체(胴體) 중앙(中央)의 접합부를 지나면서 다시 좁아져 구경(口徑)과 비슷한 직경을 가진 굽에 이르는 원호(圓壺) 형식(形式)으로 일명(一名) 「달항아리」라고 불린다. 크기가 우선 압도적이며, 조선시대 백자의 특징이라고 하는 온화한 백색·유려한 곡선·넉넉하고 꾸밈없는 형태 등이 고루 갖추어진 달항아리로, 비록 제작시기는 다르지만 국보(國寶) 제261호의 입호(立壺)와 상대할 수 있는 대표적인 원호(圓壺)이다.

담청색(淡靑色)을 띤 유(釉)를 내·외면(內·外面)에 모두 시유(施釉)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시유(施釉)가 안된 곳도 있으며, 표면색조(表面色調)는 유백색(乳白色)이다. 다리굽으로 접지면의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耐火土)를 얇게 발라서 번조(燔造)하였다. 내·외면에는 시유전(施釉前)에 생긴 작은 흠집(태토에 섞인 불순물이거나 번조시의 소실(燒失)로 인한 작은 구멍)이 산재(散在)해 있고, 저부(底部) 중앙(中央)에는 터진 흠이 있으며, 굽도 여러 곳이 결손(缺損)되었다.

동체(胴體) 중앙(中央)에 상부(上部)와 하부(下部)를 접합(接合)시킨 흔적(痕迹)이 보이고, 동체(胴體) 하부(下部)에는 태토(胎土)에 섞인 잡물(雜物)로 인해 황적색(黃赤色)을 띠는 곳이 산재(散在)하며 유표면(釉表面)에 긁힌 자국도 산견(散見)되는 등 비록 세세한 부분의 외양까지 깨끗하지는 못하지만, 경기도(京畿道) 광주지방(廣州地方)의 관요(官窯)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의 둥근 항아리는 17세기 말경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을 조형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시기의 항아리는 그 수도 많고 걸작도 많지만 이 항아리는 이때까지 발견된 것 중 대형에 속할뿐 아니라 시원하고 당당하여 이 시기의 항아리로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