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81.jpg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이곳은 옛 조선시대의 우수영(右水營)이며, 강 건너 바로 앞이 진도를 바라보는 해남의 남쪽 끝 해안지역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강제철거되어 경복궁에 옮겨졌던 것을 1947년에 다시 옮겨 세웠다.

이 석비는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꽂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을 장식한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문에는 선조 30년(1597) 이순신장군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 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찌른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비문은 1686년에 쓰여졌으나 비가 세워진 것은 2년 뒤인 1688년으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하였다.

 

12.gif 명량대첩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 :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대부분 패하였다. 이에 그 해 7월 22일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중에 남아 있던 쓸만한 전선(戰船)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 :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 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리 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진입하였다. 일본 수군의 진입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 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수로 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으며,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였다.

격전중 이순신의 전선에 동승하였던 투항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의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이순신이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전투의 기세를 잡은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 수군은 물러나 도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그들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쇠(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