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문석봉(文錫鳳,1851.12.24~1896.11.19)

문성식 2015. 7. 30. 23:27

문석봉 “국모를 시해한 적들과 어찌 한 하늘 아래 살겠는가.” 을미의병 불길 당긴 의병장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궁중에서 시해되는 국제적 범죄행위가 일어났다.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활화산같이 끓어올라, 누군가 의병 봉기의 횃불을 올리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태세였다. 이 때에 문석봉(文錫鳳) 선생이 대전의 유학자들과 평민들의 지원과 참여로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바로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을미의병의 첫 봉기가 되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백발백중의 궁술 실력. 암자에 살며 무술 익힌 청년 무인

문석봉 이미지 1

문석봉(文錫鳳,1851.12.24~1896.11.19) 선생은1851년 경북 현풍군(현, 경북 달성군 현풍면 상동리)에서 부친 하규(夏奎)와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이필(而弼), 호는 의산(義山)이고 본명은 봉각(鳳珏)이다. 본관은 남평으로 시조 다성(多省)의 32세손이다. 문석봉의 11대조가 대구로 처음 이사와 살게 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의 관계(官界) 진출은 미미하였다. 다만 문석봉의 9대조인 영남(榮南)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선략장군훈련봉사의 직을 받았고, 6대조인 재징(在徵)이 대구감영에서 성 쌓는 일로 공을 세워 성축감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후 문석봉의 부친에 이르기까지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문석봉 대에 와서야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을 역임하는 등 관직을 제수 받는 정도였다.

이처럼 고려 문신의 후예인 그의 집안은 낙향하여 조선조에 관료의 길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관계진출에 소극적이었으며 그것은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결과로도 나타났다.

따라서 비록 그가 영남의 한미한 선비가문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의 신분은 거의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석봉은 어려서부터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 주었다. 12세 때인 1861년 죽궁을 쏘아 소뿔을 맞히면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어사 김화영이 술사 이성구를 보내주어 그에게 <육도삼략>을 비롯한 병서를 수학하게 하였다. 1870년에는 이성구와 함께 ‘고견암’이라는 암자에 기거하면서 3년간 무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암자에서 나온 직후인 1873년부터 2년간은 두문불출하며 <주역>을 탐독하였으며, 25세 때인 1875년에는 중국의 금릉으로 건너가 왕희주한테 침술을 비롯한 한의학을 3년간 수학하였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 가난한 백성들에게 풀어주고, 첫 번째 관직 생활 정리

문석봉은 32세 때인 1882년 ‘조운리(漕運吏)’가 되면서 관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전라도 지역의 세곡을 조운선으로 서울에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첫 관리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가 세곡을 싣고 목포-무안 사이를 지날 때 전라도지역의 기근 상태를 보고 곡식을 풀어 기민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정부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그는 “나라를 속인 것은 죄이나 이 백성들은 어찌 나라 사람이 아니겠는가. 쌀을 중히 여겨 백성을 버리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라 하고 집안 일을 친구인 김수영에게 맡기고 방장산 속으로 들어갔다.

문석봉은 41세 때(1891년) 고향의 수문동에서 친척인 문용현과 함께 영파재(映波齋)를 지어 빈민자제 50여명에게 한학을 교육하였다. 이는 그가 무인으로 일어났으나 문인의 소양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때 현풍군수 윤병(尹秉)은 비적의 방어를 위하여 그에게 군내 순찰의 임무를 맡겼다. 문석봉은 이를 인연으로 윤병이 과천군수로 옮겨가자 그의 책실로 수행한 뒤 포군장이 되었다. 1893년 5월 비로소 그는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석봉은 곧 경복궁5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 해 12월에는 진잠 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3월 모친상을 당하여 과천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894년 11월 문석봉은 양호소모사의 직에 임명되어 공주부에서 근무케 되었다. 이때는 동학농민군이 득세하던 시기였으며 충청 지역 중에서는 그가 현감으로 재직하였던 공주부지역이 특히 심하였다. 문석봉의 소모진은 11월 18일 조직되었으며, 11월 29일 간부를 임명한 듯하다. 그는 12월 2일 과천을 출발하여 12월 7일 공주감영에 도착하였다. 문석봉은 소모사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진잠을 비롯하여 연산, 은진, 진산, 여산은 물론 청산, 보은 등지에까지 수 차례 출정하여 동학군 진압에 출중한 공을 수립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1895년 1월 24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연산지역 염학동 동학군 진압 작전은 대표적인 전투였다.

관병들에게 신식 훈련시킨 것은 일본군을 치기 위함이라고 고발 당해 구금 생활

이와 같이 문석봉의 동학군 진압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연산을 비롯한 인근 6읍의 주민들이 진잠 지역에 <양호소모사문공석봉명찰선정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리기까지 하였다. 공주부에서는 문석봉을 신영 영장에 임명하여 공주부에 근무케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잠 연산 은진의 유생들은 순영과 통리아문에 문석봉 부대를 “인의의 부대”라고 칭송하면서 아직 동학의 잔당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신영으로 부대를 철수케 되면 동학군이 반드시 무리를 지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이는 국가는 물론 백성들이 우려하는 바니 그 해를 제거케 해야 함을 청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박제순은 오히려 문석봉의 신영 근무를 재촉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결국 1895년 2월초에 신영 영장으로 근무케 되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안가 문석봉이 공주부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공주의 관병에게 신식훈련을 시킨 것은 의병을 일으켜 “토왜(討倭)”하려 한다는 고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21일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그가 본격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문석봉의 의병투쟁은 을미사변 직후 재개된다. ‘국수보복’의 기치를 내걸고 1895년 9월 18일 ‘공주의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문석봉 선생의 글을 모은 ‘의산유고’의 회문(回文)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국치. 신하로서 반드시 그 원수를 갚아야.”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킨 주요한 이유는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자는 것이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공사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인 낭인배도 동원되었다.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부대를 이끌고 광화문에서 막고자 하였으나 일본군의 총탄에 피살되고 말았다. 왕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일본군은 왕의 처소인 건청궁을 포위하고 명성황후를 찾아 내 시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저지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피살되었으며 3-4명의 궁녀들도 피살되었다. 고종은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으며 왕태자는 일격을 맞고 기절하였다.

이러한 일본에 의한 천인공노할 사태에 관료들도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거족적인 항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킬 뜻을 밝히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문석봉은 을미사변 직후에 서울에 올라가 민영환 등 중신들을 만나 거의(擧義)의 뜻을 밝히고 대전으로 내려와 9월 18일 유성 장터에서 의병을 봉기한 것이다.

문석봉은 의병을 일으키기 직전에 친구인 엄진섭에게 자식들을 부탁하며 보낸 편지에서 그는 시해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綱常•삼강오륜)의 대변(大變)’이라고 통분하고 있다. 그는 을미사변을 ‘국치’로 인식하였으며 신하로써 그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리라고 인식하였다.

또한 문석봉은 자신이 임진의병장의 후예라는 자각이 강했다. 따라서 이러한 ‘척왜론’은 그가 의병봉기를 실천한 또 다른 이유였다. 그가 1895년 2월 체포된 죄명이 ‘토왜죄(討倭罪)’였다. 그는 이때 경무사 이윤용과 가진 공초(供招)에서 “태조 이래 5백년간 내려 온 조종사직을 어찌 쉽게 두 손을 들어 오랑캐에게 바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오랑캐 일본을 물리쳐 국망을 막아야 함을 피력하였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관리로 근무하면서 정부에 의한 일련의 개화정책이 일본의 조종에 의해 이루어짐을 목도하였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위압적이고 무자비한 진압, 거기에 비해 조선정부의 나약함을 보고 그의 척왜론은 강화되었으며 급기야 국모가 시해되는 사태를 당하여 그는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1895년 시해 당한 명성황후의 장례식. 이때부터 을미 의병 항쟁의 불길이 조선인의 가슴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의병 일으킬 준비하며 만난 민영환, 칼을 주며 선생을 격려

유성의병은 현풍 출신인 문석봉이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에 임명되어 공주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가능하게 되었다. 문석봉은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로 임명된 이후 공을 수립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정부의 시책을 추종만 하지는 않았다. 양호소모사로 공주부에 부임하여 첫 작전이었던 박만종의 체포 문제에서 관찰사와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도 그 일단이다. 이후 그는 개화정권의 수족 노릇을 개탄하고 반개화 반침략의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문석봉의 이러한 행동전환은 1895년 2월경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일본을 구축할 계획을 세우고 공주부 관병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문석봉은 김재수의 고발로 그해 2월 ‘토왜죄’로 체포되었다. 서울 경무청에 구금된 그는 경무사 이윤용으로부터 2회에 걸친 공초를 받고 실형을 받았다. ‘토왜죄’로 실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항일의병을 추진하였음을 공인한 것이 된다 하겠다. 따라서 그의 의병활동이 을미사변 직후에 구체화되기는 하였으나, 이미 1895년 2월에 계획,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895년 6월 석방된 문석봉은 8월에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였으며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 전인 9월초 서울에 올라가 을미사변 직후의 분위기를 파악하였으며, 여러 인사들을 만나 봉기의 뜻을 밝히고 동조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창의에 참여한 세력은 황현이 지적하고 있듯이 유생층이 중심이 되었던 듯하다. 특히 이 지역 유림의 대표자인 송근수와 신응조가 참여하였음이 주목된다. 일본의 동경에서 발간된 《동경조일신문》에서도 이들의 의병 참여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송근수(1818-1902)는 송시열의 8대손으로 헌종 14년(184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우의정을 거쳐 고종 19년(1882) 좌의정에까지 이른 정치가였다. 또 한편으로는 1884년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회덕에 낙향하여 ‘재상산림’이란 칭호를 얻었으며 단발령이 공포됨에 ‘각식(却食)’을 한 척사계열 유학자였다. 1905년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이 그의 친조카임을 볼 때 이들의 척사사상에 기반을 둔 반일우국정신을 살필 수 있겠다. 신응조(1803-1899)는 대원군의 이종사촌으로 형조 판서를 역임하고 1882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진잠으로 이사하여 저술에 종사한 척사계열의 인물이었다. 문석봉은 상경하여 당대 민씨 척족 세력의 실권자였던 민영환을 만나 거의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때 민영환은 문석봉의 뜻을 듣고 환도 한 자루를 풀어주며 격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욕 되게 사는 것보다 영광 되게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적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한편 을미사변 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방조한 우범선을 살해한 인물로 잘 알려진 고영근과도 서울에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고영근은 문석봉이 봉기하기 직전인 9월 13일 편지를 보내어 거의를 격려하고 있다. 과천의 집에서 편지를 받은 문석봉은 9월 18일(양 11월 4일) 충청도 유성으로 내려가 의기를 들었다. 죽음을 결심하고 국모시해 1개월 후에 결연히 ‘국수보복’을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다. 문석봉은 9월 18일 창의한 후 대장이 되어 유성의병의 지휘부를 다음과 같이 조직하였다.

선봉: 김문주
중군: 오형덕
군향: 송도순

김문주는 공주 출신의 유학으로 문석봉과는 소모군 때부터 참모사로 동고동락했으며 지난 2월 1차 의병 때도 같이 거의를 공모하여 체포되었던 동지였다. 오형덕은 옥천 출신의 유학으로 역시 문석봉이 양호소모사로 재직 시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여기에 회덕의 사족 송도순이 군향으로 참여한 것이다. 송도순(1858-1918)은 송준길의 10대손으로 고종 11년(1874)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1893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 봄 사헌부 대사헌과 승정원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낙향한 인물이다. 이들 외에 문석봉 의병에 참여한 인사로 진사 김종률과 영장 최은동, 김성의 등이 확인된다. 김성의(1861-1925)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인 송애 김경여의 후손으로 문석봉의 제의로 의병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병관이 찬한 <김성의묘갈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문석봉과 김성의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다.

오호라. 이는 故從仕郞宮內府主事(고종사랑궁내부주사) 松雲金公(송운김공)의 墓(묘)이다. 公(공)이 甲子(갑자,1924년)년 중국으로 가 乙丑(을축,1925년)년 7월 17일 봉천에서 병사하였다. (중략) 이에 앞서 을미년 국모가 시해당하는 ‘坤寧(곤녕)의 變(변)’이 일어나 凶逆(흉역)이 內外(내외)에 있어 한 사람도 감히 討賊復讐(토적복수)를 말하는 이가 없더니 文錫鳳(문석봉)이 召募(소모)의 命(명)을 몰래 띠고 와서 公(공)의 형제들이 志節(지절)이 있음을 알고 와서 擧義(거의)를 謀議(모의)하였다. 드디어 鄕丁(향정)을 糾合(규합)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서했으나, 整備(정비)가 되기 전에 賊臣(적신)이 임금의 令(령)을 빙자하여 義兵(의병)을 匪賊 (비적)이라 하여 체포하고 해산시켰으니 원통하다.

이에 의하면 문석봉이 거의하기 전 김성의를 찾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의는 그와 함께 의병을 모아 의병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부대가 해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성의는 피신하여 대전 상괴리에서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1924년 중국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갔으나 봉천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죽은 지 15년만인 1940년에 고향으로 모셔졌다. 김성의의 둘째인 김직원과 그의 당질인 김정철은 대전 인동시장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그는 통문에서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 사직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통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通諭(통유)할 일은, 聖母(성모)께서 해를 입으신 것은 실로 천고에 없는 대변입니다. 일찍이 복수를 하지 않고 참아 이 적들과 어찌 한 하늘에서 더불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감히 욕되게 사는 것보다 영광되게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나라 누구인들 신하가 아니며 누가 복수를 원하지 않으리오. 같이 일어나 대의로서 흉당을 멸망시키고 社稷(사직)을 건지는 것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乙未(을미) 九月(구월) 日(일)

문석봉 선생의 글을 모은 ‘의산유고’의 통문(通文)

유성에서 부대 편성, 회덕현 무기고에서 무기 탈취, 관군과 격전. 을미사변 이후 첫 의병 거병

문석봉은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았다. 그는 공주관아를 선점하여 무기의 열세를 ‘지리의 이점’으로 메우고자 한 것이다. 문석봉은 9월 18일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우선 무기를 획득하기 위하여 회덕현을 급습하였다. 회덕현의 무기고를 공격한 일자를 알 수는 없으나 10월 20일(양,12월 6일)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00여명의 의병이 유성 장대리에 다시 진군하였다. 이곳에서 의병을 모은 부대는 다음 날(10월 21일) 오전에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을 만난 듯하다. 그러나 이세경은 의병의 동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진잠에 입성한 지 일주일 후인 10월 28일 문석봉 의병은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공주인 이단석의 <시문기(時聞記)>에 의하면 의병이 10월 28일 공암을 지나 공주부로 향하였다.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은 전중군 백락완과 이인 찰방 구완희에게 각각 100명씩 이끌고 가 대응케 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들과 공주 와야동(현재, 공주시 소학동)에서 일전을 겨루었다. 그러나 의병은 매복해 있던 관군에 패하고 말았다.

문석봉은 패산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문석봉은 우선 고령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이어 감역 윤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상금 만금을 그대들에게 걸고 있으니 잠시 숨어 후일을 도모하시오”라고 이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령현감 조모의 고변으로 순검 서윤묵․정인원․이효진 등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으니 11월 24일의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들 3명의 순검에게 갑종상으로 6원씩을 상금으로 주었다.

대구부 감옥에 갇힌 문석봉은 11월 25일 경무관 장규원으로부터 공초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그간의 경과와 심정을 비장하게 토해 놓았다. 3일 후인 11월 28일에는 관찰사 이중하의 공초를 받았다. 문석봉은 관찰사의 불의를 통렬히 논박하였으며 거의한 큰 뜻을 의연히 역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체포된 후 감옥을 부수고 탈옥. 재봉기를 시도했지만 옥고와 병으로 마흔여섯 살에 타계

문석봉의 의병투쟁에 대한 의지는 열렬하였다.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봉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1896년 봄 영장 최은동, 중군장 오형덕과 함께 파옥, 탈출하여 과천에 올라왔으나 이미 문석봉의 집은 일본병에 의해 불태워져 있었다. 문석봉은 4월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유인석의 제천의병과도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 문석봉은 병에 걸려 8월 12일 현풍으로 귀환하였으며, 결국 11월 19일 밤에 46세의 일기로 병사하고 말아 거의의 목표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문석봉 선생이 일으킨 유성의병은 을미사변 후 전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의병 활동이었다. 이후로 곳곳에 ‘을미의병’의 불길이 퍼져 나갔다. 이 같은 의병 활동은 충의정신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근왕의병이었다. 의병장 문석봉은 경북 현풍 출신이었지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자신이 진잠현감으로 근무했던 대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것은 대전이라는 향촌사회가 의병을 일으킬 수 있는 이념적 바탕이 강했으며, 따라서 지역인들의 지원과 참여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전 유성구청은 2004년 유성시장에 ‘을미의병의 효시, 유성의병’이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집필
김상기 |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1.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