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심남일(沈南一, 1871~1910)

문성식 2015. 8. 9. 23:03

심남일 남도 제일의 의병장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 입고 / 말을 타고 남도를 바람처럼 달리리 / 만약에 왜놈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 맹세코 모래밭에 죽어 돌아오지 않으리. -1907년 의병으로 나서면서 지은 선생의 시-

서당 훈장이 의병을 일으키다

심남일 이미지 1

전라도 함평 땅의 자그마한 서당에서 훈장을 하고 있던 심수택(沈守澤). 위의 시는 선생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이 기승을 부리던 1907년 말 사랑하는 가족과 어린 학동들을 뒤로 한 채 의병으로 나서면서 지은 것이다. 선생의 결연한 맹세처럼 선생은 고향 땅에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심수택, 아니 심남일(沈南一, 1871~1910)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누구인가. 선생의 자(字)는 덕홍(德弘)이며 본관은 청송이다.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당시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남일(南一)이라 이름했는데,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인지 선생이 이끄는 의병부대인 호남의소는 흔히 “남일파”로 불려졌으며, 선생 역시 심남일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 것이다. 선생은 현재의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에서 심의봉(沈宜奉)과 진주 강씨 사이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벼슬이 끊긴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히면서 성장하였다. 그 후 선생은 평택 임씨와 혼인하여 두 아들과 세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 되었다.

이러한 선생에 대하여 일본측 기록에서도 “일찍이 훈장이 되었던 일이 있음. 다소 학식 있음”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선생은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으며, 향리인 함평향교의 교임(校任)을 맡아 활동하는 정도였다. 선생은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추고서 서당 훈장으로 활동하던 시골 선비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의감이 매우 강했던 것 같다.

심씨는 전라남도 함평군 사람이라. 그 천성골격이 옥과 같으며 세상에 드문 대장부로 재주가 출중하며 손오병서와 중국 고대의 협객전을 많이 읽은 고로 그 위의와 명망이 표표함 -<대한매일신보> 1909년 10월 16일자-

한편 을사늑약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자 선생은 의병을 일으킬 궁리에 골몰하였다. 선생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태로운 국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질 각오였다. 특히 을사늑약 이후 풍전등화의 위급한 상황과 을사오적의 농간에 분개하여 장차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되찾을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선생은 자력으로 의병을 일으킬만한 처지가 못되었다. 명망이 높은 유학자도 아니었으며, 재력이 탄탄한 부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선생은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장 기삼연의 주도로 선봉장 김태원, 김율형제 등이 약 4, 5백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이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일제 군경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귀순을 권유하는 귀순정책과 아울러 강력한 군사작전을 수시로 전개하여 이들을 압박하였다. 결국 1908년 2월에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 총살되었고, 그 해 3월에는 김율이 체포되었으며, 이어 4월에는 김태원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호남창의회맹소가 거의 와해지경에 처했으나 선생은 굳건한 항일의지로 의병을 다시 불러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서당 훈장에서 의병장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독자적인 의병부대 ‘남일파’를 결성하다

전국의 동포들은 다같이 풍파를 만난 배를 탄 신세입니다. 그런즉 앉아서 고래 떼처럼 악독한 왜놈들에게 잡혀 먹히기 전에 서로 분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쳐부순다면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은 오늘의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의 벼슬아치나 산림의 숨은 인재들은 저더러 그러한 자격이 못 된다고 하지 말고 각자 의분심을 일으켜 함께 큰 일을 치루어 나간다면 천하 만국이 또한 반드시 우리를 호응하게 될 것입니다. -심남일, [격고문]-

서당 훈장이었던 선생은 약화된 의병세력을 결집하여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당시 선생의 모습.

1908년 봄을 지나면서 기삼연과 김태원 김율 등의 의병장이 잇달아 순국하자, 선생은 위의 격문을 사방에 보내어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아울러 선생은 토왜(土倭), 즉 친일파들에게도 지난날을 회개하고 의병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으며, 향교에도 통문을 보내어 서로 호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각 고을의 면장과 세금영수원, 이장들에게도 일제에 협조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독자적인 의병부대의 출범을 사방에 알리는 한편, 의병부대의 주요 부서를 정하였다. 의병부대의 부서 조직은 선봉-중군-후군, 즉 전통적인 군제인 삼군체제(三軍體制)를 근간으로 운용되었다. 특히 선봉장 강무경은 부장의 임무를 맡았는데, 이는 의병장 선생과 선봉장 강무경이 서로 의형제를 맺은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의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들은 어떤 특징을 지녔을까. 선봉장 강무경은 필묵상(筆墨商)이었는데, 서당 훈장과 필묵상이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강무경의 뒤를 이어 선봉장으로 활동한 장인초의 직업은 목수였으며, 모사 권택최익현의 문하에서 한때 수학한 적이 있는 유생이었다. 또한 중군장 안찬재도 유생이었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의병 병사층은 대개 농민이거나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다시 말해 다소의 학식을 갖춘 유생과 농민 및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대다수의 의병 병사층은 가난한 평민출신으로 보인다. 한편 의병장이었던 선생은 의병부대의 역할 중 주민 보호를 크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들의 안민의식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원컨대 제군들은 특히 백성을 무마하는데 힘써야 한다. 부디 토지와 재물을 빼앗지 말고, 겁략하지 말 것이며, 무고한 사람들을 때리지 말라. 그리고 경솔하게 군사를 발동하지 말고, 적을 가소롭게 보지 말라.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집안 사람을 맞이하듯 반갑게 서로 대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라 -[심남일 실기], ‘능주돌정접전’ 중-

선생은 안민적 의병활동을 크게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선생은 민폐를 끼치거나 군율을 어긴 자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히 다스렸다. 일제 측의 기록에서도 선생은 부하의 비행을 엄격히 다스리고,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킨 의병장으로 높이 평가함으로써 이른바 그가 결성한 ‘남일파’는 더욱 이름을 떨쳤다.

[의병대장 심남일공 진지록]의 표지와 내용 사진. 선생의 시, 격문, 통첩, 고시(告示)등을 모은 문집이다.

‘남일파’,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남일파의 의병활동은 몇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친일세력을 제거하는 활동이다. 1908년 4월 선생은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통문을 게시하였는데, 군수, 세무관 그리고 각 면의 공전영수원들이 거두는 세금이 일본군의 군사비에 충당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계속한다면 왜적과 같은 세력으로 간주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선생은 주민의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으며, 아울러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자위단과 한인 헌병보조원들도 일본세력과 함께 제거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 가운데에서도 이들은 특히 납세거부투쟁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각종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병활동의 재원 마련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병장 심남일공 순절비(광주 남구 광주공원 소재).

둘째로 이들은 의병을 빙자한 도적을 퇴치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잡배들이 약간의 무리를 지어 의병이라 칭하고서 민재를 강탈하면 의소에 곧바로 알리거나 잡아 보낼 것을 촉구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주민들로부터 한층 신뢰받을 수 있는 의병부대로 인식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셋째로는 반일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나주 함평 영암 보성 장흥 강진 해남군 등지를 무대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고, 그리하여 1908~9년 사이에 전라남도 나주와 강진을 축으로 하는 전라남도의 중남부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성장하였다. 남일파는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 전투에 이르기 까지 수십 회에 걸쳐서 일본군경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과정에서 선생이 가장 강조한 바는 주민 보호, 군율의 확립, 약탈금지, 농작물 피해방지 등이었다. 요컨대, 남일파는 의병으로서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며 주민보호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반일투쟁에 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병을 좋아하지 않을 주민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주민들도 이들을 기꺼이 도와주고 숨겨주었다. 선생의 의병부대가 일본 군경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두자,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쳐나가고 강현수는 풍운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동요가 생겨날 정도였다. 이들의 본격적인 반일투쟁은 1908년 음력 3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계속되었다.

일제의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 해산

이처럼 전라남도의 중남부지역을 근거삼아 의진간의 연합전선을 주도하며 반일투쟁을 전개하는 선생의 존재는 일본군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다.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먼저 1908년 10월에 영산포헌병분대의 후원으로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가 발족시켜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한 정찰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 해 12월 15일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아래 8개 부대가, 광주수비대에서는 3개 부대가 각각 편성되어 심남일 의병부대 등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시에 출동하였다. 그리고 1909년 6월 초에도 3개월 예정으로 3개의 변장정찰대가 활동에 들어갔는데, 그들의 목적은 당시 전라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선생을 비롯한 전해산, 안규홍등의 근거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7월 중순에도 1개월 예정으로 11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주된 목적은 전해산, 심남일을 죽이는데 있다”라고 함으로써 당시 일본측이 선생의 제거에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에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9년 7월경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하고서 활동을 일시 중단하였다. 일제측은 “대토벌을 개시하자 적세가 조락(凋落)하여 지난날의 횡포가 없고 전, 심, 안(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 필자주)과 같은 대수괴는 일시 부하를 해산 혹은 분산하고 수괴는 어디론가 잠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일제는 심남일을 비롯한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이른바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했는데,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그것이다. 결국 1909년 8월말 선생 등 10여 명의 의병장이 강진군 모처에 모여 일제의 군사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훗날을 기약하며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중군장 안찬재는 의병해산에 반대하여 보성에서 활동하던 임창모와 합세하여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의병장이었던 선생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결국 1909년 10월 9일에 체포되었다.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 ‘남한폭도대토벌작전’도 일단락되었으며, 선생을 체포한 일본군 제2연대 제3중대는 “전라남도 남부에 있어서 수일(首一)이라 칭하는 거괴(巨魁) 심남일 및 그 부하 유수의 수괴 강무경을 포획”한 공로로 상장을 받았다. 일본측조차 “현재폭도 중에서 가장 교묘한 자”라고 일컬었던 선생의 체포는 곧 호남의병의 종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후일 백암 박은식은 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평하였다.

그는 훤한 얼굴에 훤칠한 풍채로 재주가 뛰어나고 기지가 많았었다. 의병 70여 명을 모집하여 누차 기묘한 계책으로 토적하여 매우 위망이 있었으나 마침내 장흥군의 동쪽 산에서 패전하여 의병장 강무경과 함께 전사(체포: 필자 주)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중-

1909년 체포 당시 모습.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선생,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선봉장 강무경이다.

남도의 별, 마침내 쓰러지다

체포된 선생 등 은 광주감옥에 갇혀 일제의 모진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굳건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선생은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 없는 의병들이 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 선생은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대구에서도 지루한 법정 공방이 오간 끝에 이들은 체포된 지 약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1910년 10월 4일이었다. 선생은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해와 달처럼 밝고 밝던 우리 강산이
갑자기 비린 먼지 속에 묻히고 말았네
맑은 하늘 보지 못하고 지하로 가노니
붉은 피 한에 맺혀 푸른 피 되리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심남일 이미지 2

홍영기 |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