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신팔균(申八均, 1882. 5. 19(음)~1924. 7. 2)

문성식 2015. 7. 30. 23:26

신팔균 “압록강 이남으로 밀고 내려가 일본 경찰대를 섬멸하라.”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국권회복(國權恢復)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그 중 자신뿐만 아니라 처자(妻子)까지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치신 신팔균 장군은 일제하에서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만주(滿洲)를 무대로 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독립투쟁(抗日獨立鬪爭)을 전개하였던 대표적인 무장투쟁가다.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 등과 함께 독립군 인재(人才)의 삼천(三天)으로 불리던 지휘관이다.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싸운 명문가의 아들

신팔균 이미지 1

신팔균(申八均, 1882. 5. 19(음)~1924. 7. 2) 장군은 1882년 5월 19일(음)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신석희(申奭熙)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 내부협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부 신헌(申櫶)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 등을, 고조부 신홍주(申鴻周)는 순조(純祖)때 훈련대장을 지냈다. 특히 조부는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측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흑전청륭(黑田淸隆)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고 1882년에는 미국의 R. W 휴페펠트와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최초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명문가(名門家)에서 출생한 장군은 천성적으로 무관(武官)의 기질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유학(儒學)과 고금병서(古今兵書)에 능통하였고 성품이 청렴(淸廉) 강직한데다가 문장 또한 비범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하여 군사교육훈련을 받은 후 1903년 9월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하여 시위연대 제3대대에서 복무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운(國運)이 쇠해가던 시기에 국방의 임무를 맡은 열혈청년 지휘관으로 많은 고뇌에 싸였지만 강계(江界) 진위대(鎭衛隊)에 배속되어 초급장교로서 오직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다.

군대가 해산 당하자 미련 없이 군복 벗고, 향리에 사립학교 세워 구국교육운동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황실 경위와 의장대의 성격을 띤 근위보병대에서 복무하다 1909년 7월 육군(陸軍) 정위(正尉)로 진급하였다. 이름뿐인 군대와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부하 장병들을 이끌고 일제에 대항코자 하였으나 불가항력임을 깨달아 군복을 벗어버렸다. 그 후 향리인 충북 진천(鎭川)으로 내려가 청소년의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항일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사립 보명학교(普明學校 : 현, 이월국민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각 지방의 의병부대 및 전국 각지의 애국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전국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대동청년당을 조직

약 2년간 민족교육사업을 전개하며 구국투쟁을 준비한 선생은 1909년 전국의 애국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 당은 안희제(安熙濟)․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서상일(徐相日)․남백우(南百祐) 등 근대적 교육을 받은 80여 명의 애국청년들이 참가하여 조직한 단체였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하여 광복 시까지 존속한 비밀 청년단체였다. 단원들은 항상 서로 연계하면서 구국의 신사상과 방략(方略)을 교환하고 그들이 머무는 지역에서 계몽교육을 전파해 나갔다. 이들은 혈맹단체(血盟團體)로서 철저한 보안을 지키면서 전국 각지에서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 같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1910년 8월 마침내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되었다. 나라의 패망(敗亡)을 지켜본 선생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임을 깨닫고 민족의 남은 여력을 모두 결집시켜 무력(武力)을 키운 다음 일제를 일시에 구축(驅逐)하기로 하였다.

경술국치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광단(重光團)에 가입 활동

그런데 선생은 그와 같은 힘을 키우고 결속을 지키는 일이 국내에서는 어렵다고 판단,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북간도 일대의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徐一)과 함께 중광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3․1운동에 앞서 동삼성(東三省)의 민족지도자 38인 중 1인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서명, 발표한 바도 있다. 중국의 북경(北京), 상해(上海)와 남북만주(南北滿洲) 그리고 연해주(沿海州) 등을 두루 거치며 동지를 규합하다가 활동무대를 서간도(西間島)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서간도는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코자 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집결하고 있었으며 또한 국경과 인접되어 있어 이 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국내외 애국청장년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최적지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간도에서는 경학사(耕學社)가 북간도에서는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가 설립되어 이주(移住) 한인(韓人)의 자치를 담당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신팔균 선생의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1903.9.20) 육군무관학교 보병과 학도 신팔균이 교육과정을 졸업했음을 증명하는 증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관으로 독립군 3,500여 명을 배출

이후 경학사가 발전되어 조직된 한족회(韓族會) 소속의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1918년경부터 동군단 무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관에 임명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다. 여준(呂準)․윤기섭(尹琦燮) 그리고 한말(韓末) 무관 출신인 선생을 비롯하여 김창환(金昌煥)․성준용(成駿用)․김흥(金興) 등과 맹장인 지청천․김경천(金擎天) 등이 교관을 맡은 신흥학교는 그야말로 독립군 간부의 중추적인 양성기관이었다.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힘입어 적극적인 독립전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 내에 속성 훈련기관을 설치하였는데 그때까지 졸업생 수는 약 3천 5백여 명이었다. 졸업생 대부분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만주 내 각 독립군단에 소속되어 직접 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특히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일부는 만주 한인사회에 설립된 각지 민족학교의 교원이 되어 또 다른 애국청년들을 양성하였다. 선생은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시로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일제의 주재소, 헌병대 등을 습격하고, 일본 군경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는 한편 친일(親日) 주구배들을 숙청(肅淸), 군자금모금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명성을 떨쳤다.

신팔균 육군보병 정위 임명장(1909.7.30) 군부대신 이병무가 육군 보병 부위인 신팔균을 육군 보병 정위로 임명한다는 임명장.

그러던 중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참패(慘敗)한 일군(日軍)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의 전지역 한인(韓人) 부락을 구석구석까지 습격하여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그들 임의로 ‘불령선인’이라 지목하여 무차별 참살(慘殺)하고 방화(放火)하는 등 잔학한 만행을 자행하였는데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한다. 일군의 대규모 병력이 계속 만주를 침입하자, 근거지 이동계획을 세운 독립군들은 간도를 벗어나 남북만주 및 연해주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독립군에 격파 당한 일본군, 무차별 학살 방화…장군은 비 바람 찬 이슬 속에 새 기지 구축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 등은 북만의 밀산(密山)까지 이동하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조직하여 연해주까지 이르는 장정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연해주로 이동하지 않고 만주에 잔류하고 있던 서로군정서, 광복군 총영, 대한독립단, 광복단 등 나머지 독립군 병력은 장백, 안도, 안동, 임강, 홍경 등 남만지역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항전기지(抗戰基地)를 구축하였다. 따라서 선생도 그를 따르는 부하들을 인솔하고 홍경현으로 옮겨 재기의 준비를 하였다.

홍경현으로 옮긴 이유는 그곳은 한인의 수가 2만여 명이 넘어 독립군으로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이 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한인이 많이 살고 있어 이곳의 한인들을 고무(鼓舞)시키고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총칼로 항일 전을 수행하고, 수십만 만주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한통군부를 조직

1922년 봄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한단(光韓團) 등 여러 독립군단 대표들이 홍경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환인현(桓仁縣)에 회집(會集)하여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결성하고, 각 독립군단의 대동단합에 관한 문제를 숙의하였다. 그 결과 통일회(統一會)를 결성하고, 각 독립군단의 조직을 해체하여 통합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할 것을 합의하였다. 대한통군부의 설립목적은 무장항일전(武裝抗日戰)을 수행하는 한편 수십 만이 넘는 남만지역 이주 한인들을 보호하는 정부적 기능을 수행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남만지역 독립단체를 재통합.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여 정부 기능을 갖추다

그러나 대한통군부가 성립된지 2개월만에 기구의 확장과 아울러 통군부 설립 때 불참하였던 다른 단체들과의 통합운동이 일어나 1922년 8월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가 다시 개최되었는데 이때 모인 단체는 대한통군부에 이미 가입된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관전학교민단(寬甸韓僑民團), 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 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평안북도 독판부(督辦府) 등 8단(團) 9회(會)의 여러 단체들이었다. 이들 각 군단의 대표자들은 며칠간에 걸쳐 회의를 한결과 대동단결할 것을 결의하고 지금까지의 각 단체를 해체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 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소속 독립군은 대한통의부 의용군으로 새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총장제를 도입하고 그 밑에 민사, 교섭, 군사, 재무, 학무, 법무, 교통, 설업 등의 부서를 둔 하나의 정부 형태를 갖추었다. 중앙기구 밑에는 이주 한인이 살고 있는 각 현에 총감(總監) 사무소가 설치되어 하부조직을 총괄하면서 한인의 지방자치행정을 맡았다. 대한통의부의 관할지역은 환인현을 비롯하여 통화, 집안, 관전, 흥경, 유하, 임강, 장백 등 한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환인현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독립군 근거지 구축작업을 추진하고 있던 선생은 이러한 대한통의부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흥경현 지방조직 활동에 전념하였다.

신팔균 장군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어머님 전상서’로 시작하고 있다.

병사들과 함께 훈련 하고, 전투 중에 최일선에 서는 의용군 사령관

1923년에는 김창환(金昌煥)의 뒤를 이어 의용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대한통의부의 총 군사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1,2,3,4,5중대로 구성한 1개 대대와 유격대 및 헌병대 등의 7개 중대로 조직되었다. 제1중대장에 채찬(蔡燦 : 白狂雲), 제2중대장에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에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에 홍기주(洪基柱), 제5중대장에 김명붕(金鳴鳳)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문학빈(文學彬)․홍석호(洪石浩)․김창룡(金昌龍)․김시하(金時河) 등을 중대장으로 한 4개의 독립 유격대(遊擊隊)는 150명의 병력으로 일정지역에 근거지를 두지 않고 국경을 넘나들며 유격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정예 전투부대들이었다. 헌병대는 송헌(宋憲)이 담당하였다. 이어 대한통의부 중앙기구로서 군사적 행정을 총괄하는 군사 부위원장직까지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지시하고 명령만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라 항상 부하와 함께하면서 훈련시키는 실전(實戰) 지휘관으로서 솔선수범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노력과는 달리 통합단체로 결성된 대한통의부는 오래지 않아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신진세력과 복벽주의를 주장하는 구세력간의 이념 갈등으로 통의부의 지도이념과 인선 및 조직상의 이견(異見)이 발생하여 전덕원(全德元)을 비롯한 채상덕(蔡相悳)․김평식(金平植)․오석영(吳錫泳)․박대호(朴大浩) 등 왕실복고를 이상(理想)으로 한 복벽론자들은 1923년 2월 환인현 대황구(大荒溝)에서 회집하여 대한 통의부로부터의 분립을 선언하고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편성하였다. 동년 6월경에 또다시 통의부 의용군의 일부가 이탈하여 참의부(參議府)를 조직하였다.

신장군이 직접 전투 참여하여 국내 진공 작전 지휘. 일본 경찰서, 주재소 격파, 경찰대 섬멸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선생을 비롯한 김동삼․오동진(吳東振)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대한통의부를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내부분열로 일어난 역경을 감내하며 의용군 사령관 겸 군사위원장인 선생의 지휘 아래 대한통의부 의용군 부대가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한 지역은 주로 압록강 접경지역으로서 1923년에 전개한 전투상황의 일단을 살펴보면, 이렇다.

1월 5일 평북 창성군 후평 소재 일본주재소 습격.
5월 28일 초산군 판면(板面) 일본주재소와 면사무소 습격.
6월 28일 초산군 서면 연담리(面蓮潭) 일경 사살.
8월 강계 회룡동 부근에서 일제의 경찰대 섬멸.
9월 21일 희천(熙川)군 문명(文明)동 일본주재소 습격

대한통의부의 국내진입작전이 활발하였던 것은 선생이 뛰어난 통솔력과 희생정신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독립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또 직접 전투에 참전하여 그 용맹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앞잡이 단체들을 일제히 소탕…. 일제가 사주한 마적들과 교전 중 사망

만주에서 풍찬노숙하던 시절 신팔균 장군이 입던 유품인 의복.

한편 1924년초 사령관으로 취임한 선생은 양세봉(梁世奉)․문학빈․심용준(沈龍俊) 등과 함께 재만 친일주구배의 숙청을 목표로 유하, 통화, 집안지역에 일제 거류민회와 보민회를 습격, 소탕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동년 7월 2일 선생이 홍경현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 밀림리(密林里) 산곡(山谷)에서 야외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 300여 명이 포위하여 불의의 기습공격을 하여 왔다. 아무런 전투 준비 없이 훈련만 실시하고 있던 독립군은 황급히 전열(戰列)을 갖추어 교전(交戰)하면서 대원들을 안전지대로 후퇴시켰으나 선두에서 지휘하던 선생은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부하들이 사령관을 부추기려 하자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쓰러진 부상병을 먼저 후송토록 명령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때 다시 총탄이 선생의 흉부를 관통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중대장 김하석(金河錫)이 달려들어 선생을 등에 업고 포위망을 탈출하였으나 향년 42세로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운명을 하던 순간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였더니 무관한 중국사람과 싸우다가 죽는구나”하며 통분해 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국 마적으로 변장한 일군 시체가 발견되고 이들이 지니고 있던 대마적정책문서(對馬賊政策文書)가 입수됨으로써 마적들의 행위가 일제의 사주에 의한 소행임이 명백히 드러났던 것이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들 중국 마적들은 일본의 통화(通化) 영사분관(領事分館)의 사주를 받은 중국 장작림 군벌부대와 경찰들이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신팔균 장군 전사지 사진. 신팔균이 중국 만주의 흥경현(興京縣) 이도구(二道溝)에서
사관들을 야외 훈련시키던 중 무장대의 습격을 받고 전사한 장소 사진.

장군의 전사 소식에 부인과 딸, 쓸쓸히 자진…순국한 아빠 따라 갓난 아기마저 하늘 나라로

선생이 만주(滿洲)에서 순국(殉國)할 당시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부인 임수명(任壽命) 여사는 만삭(滿朔)의 몸으로 어렵게 연명하고 있었다. 선생의 동지들은 여사가 남편의 전사소식을 알면 낙태가 될까 염려하여 일체 알리지 않고 모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선하여 1924년 9월 서울로 돌아와 사직동 303번지에서 셋방 한 칸을 얻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중 유복녀를 출산하였다. 여사는 자녀 삼남매를 데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부인은 남편이 전사하였다는 흉보(凶報)와 겹쳐 둘째 아들을 병으로 여의게 되자, 갓난 딸과 함께 부군을 쫓아 음독하여, 자진(自盡)하였다. 임수명 여사는 1912년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할 때 일본 경찰에 쫓겨 환자를 가장하고 입원하고 있던 신팔균 선생과 1914년 결혼했다. 그 뒤 신팔균 선생과 함께 만주에서 풍찬노숙하며 비밀 문서의 전달, 군자금의 모금, 독립군 후원 등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 남편이 사라지자 살아갈 힘마저 잃어버린 것일까.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대한통의부의 동지들은 가슴이 미어져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지키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가정의 안위와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이국 땅에서 용맹을 떨쳤던 선생의 숭고(崇高)한 애국정신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사표(師表)로 남게 될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임수명 여사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1.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