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잔인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 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이 땅의 모든 애국자는 다 함께 일어나 우리의 말 우리의 글을 피로써 지키자!” -선생의 글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중에서-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영어와 조선어 담당교사로 부임
정태진(丁泰鎭, 1903. 7. 25~1952. 11. 2) 선생은 1903년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릉리에서 부친 정규원과 모친 박씨 사이의 3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석인(石人),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개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개화하였던 선생은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에서 4년의 수업과정을 마치고 1921년 3월 졸업한 선생은 그 해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이 시절 선생은 6살 위의 동기 동창생인 정인승을 만나 우리말에 대한 사랑을 공감대로 하여 서로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선생과 정인승은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 업무도 같이하고, 또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는 옥중에서 고통도 같이 나누며 동고동락하게 된다. 아울러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선생은 국학자이며 실천적 민족주의자인 정인보선생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상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귀국한 후, 1922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정인보 선생은 우리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얼’을 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정인보 선생의 영향으로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연구 전파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민족독립의 날을 기약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한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선생은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곧 바로 그 해 4월 함경남도 함흥에 있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영어와 조선어 담당교사로 부임하였다. 이 학교에서 선생은 제자인 소설가 임옥인이, “정태진 선생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문학작품, 그 중에서도 주로 우리나라 명시(名詩)를 풍성하게 소개하여 민족의 문화의식을 심는 데 애쓰셨다.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고 우리말 교육이 맥을 못 추기 시작했을 때였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국문학의 정수를 접할 수 있었다”라고 술회하는 것처럼 우리의 고전을 소개함으로써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
우리말 연구와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헌신
약 2년 후 선생은 1927년 5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우스터 대학(Wooster College)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고, 이어 1930년 6월에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 6월 석사학위를 취득한 선생은 그 해 9월 귀국하여 다시 함흥 영생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친 후 영생여학교로 되돌아 간 데에는 선생 나름대로의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선생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말 연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 그것은 한국인의 체취가 배인 방언(方言)의 조사 연구로부터 출발하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선생은 방언의 조사 연구에 적합한 영생여학교로의 복귀를 선택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민족의 역량을 키움에 있어 여성,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선생은 방언을 수집하고 우리 말과 역사에 대한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1931년 9월 만주침략 이후 더욱 악랄해진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수업 중 틈틈이 학생들에게 세계정세와 일본의 불안한 장래, 우리 민족의 우수성 등을 설명해주곤 하였다. 예컨대 선생은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 역사를 열거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남장을 하고 왜군을 물리친 김홍도, 왜장을 껴안고 대동강에 뛰어든 평양 기생 계월향등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여학생들의 민족적 각성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갔다. 그리고 선생은, “옛날 신라 때의 마의태자(麻衣太子)는 그 아버지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일생을 조국 부흥에 바쳤으니, 너희들도 비록 우리나라가 현재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유구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마의태자처럼 조국을 생각하는 정신을 가져 주기 바란다” 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도록 하는 한편, 후에 어머니로서 그 자제를 독립운동의 동량(棟梁)으로 키우도록 교육하였다.
정인승의 권유로 조선어학회에 동참
그러나 일제는 중일전쟁을 앞둔 1937년 3월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의 상용을 강요하더니 1938년 3월에는 ‘조선교육령’ 을 개정 반포하여 이듬해부터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과를 폐지하고, 교수 용어로서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부득이 수신(修身)이니 대수(代數)니 하는 전공 이외의 과목을 맡아 가르치게 되어 심한 민족적 모멸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있던 정인승이 같이 일할 것을 권유하자, 민족교육을 통한 독립의지 실현의 길이 막혀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던 선생은 찬란한 민족문화의 정수인 우리 말, 우리 글의 연구 보급을 통해 위축된 한국인의 민족혼을 다시 일깨우기로 결심하고 영생여학교를 사직한 후 조선어학회로 전직하여 1941년 5월부터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선행 사업으로 어휘의 수집과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의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한글 연구성과의 보급과 한글 교습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을 위해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파견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수시로 한글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32년 5월부터 조선어학회 기관지로 <한글>을 창간 발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문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이와 같은 우리말 우리 글의 연구 보급은 한민족의 일체감 및 정체성 확립과 민족문화 부흥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역량을 키워 민족독립을 달성코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제 조선어학회는 학술 연구단체의 차원을 뛰어 넘어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민족독립의 토대 마련이라는 어문 민족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 같은 시기인 1941년 5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에 전임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선생은 뒤늦은 동참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사전 편찬 업무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사전 원고를 하나하나 써나가면서 어휘를 뽑아 주석을 달고 이를 카드로 정리하는 한편, 회원들이 써 보낸 원고를 마무리하다가 밤을 새우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조선어학회에서 발간한 [한글] 제6권 제10호와 11호(1938).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징역 2년 옥고 치러
[고어독본](1947) 선생이 고어(古語)를 정확히 이해하고자 쓴 책이다.
이처럼 불철주야로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하던 선생은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의 증인 소환장을 받고 출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조선 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즉 일제는 침략전쟁에 우리 민족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아울러 식민지 동화정책의 최후단계인 민족말살정책의 완성을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허울좋은 식민지 지배 정책을 내세웠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사전 편찬 작업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일제는 어떠한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 경찰은 1942년 10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즉 홍원경찰서에서는 10월 1일 이극로, 정인승, 이윤재, 한징, 이중화, 김윤경,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권승욱, 이석린 등 11명을 체포하고, 이어 이우식, 이강래, 이병기, 김법린, 이인, 안재홍 등 모두 33명을 체포하여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편찬 후원 회원들 전원을 검거하였다. 그리고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선생 또한 홍원경찰서에서 1년여 동안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한 뒤, 1945년 1월 1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큰사전] 편찬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세대, 중앙대, 홍익대, 동국대, 국학대 및 1948년 9월 조선어학회에서 6개월 과정으로 설립한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 등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특히 선생은 미국 유학으로 영어가 능통하여 미 군정의 여러 고위 직책을 제의 받았으나 모두 고사하고, 오직 우리 말과 글의 정리와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렇듯 선생이 모든 세속적인 출세를 거절한 채, 우리말 연구와 [큰사전] 편찬, 그리고 후진 양성에 주력한 것은 자신이 빌미가 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많은 학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점을 못내 가슴 아파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6년 6월 [한자 안 쓰기 문제], 같은 해 10월에는 김원표와 함께 [중등 국어 독본], 12월에는 시가집인 [아름다운 강산], 이듬해 4월에는 [고어독본]을 펴내는 등 정력적인 저술활동을 벌였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재건된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해 발행된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제1권, 이듬해 5월 5일 발행된 [큰사전] 제2권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선생은 영생여학교 재직 시절부터 틈틈이 모아 온 자료를 토대로 1948년 12월 김병제와 함께 [조선고어방언사전]을 펴냈다.
이후 1949년 9월 25일 조선어학회를 한글학회로 개편할 때, 선생은 이 학회의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 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고향인 파주로 피신하였다가 1951년 1․4후퇴 때에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선생은 우리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멈출 수 없다는 일념으로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1952년 5월 25일 유제한 선생과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신문>사에서 원고를 마무리하여 우리말 [큰사전] 넷째 권의 지형을 떠놓고, 고향인 파주로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타고 있던 군용트럭이 전복돼 1952년 11월 2일 5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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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 영생여학교에서 국어교육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
- 1941 조선어학회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 1942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체
- 1945 징역 2년 수형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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