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조명하 의사,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완 타이페이의 일제 처형장에서 순국 직전 남긴 유언 -
스물 두 살 때 일본을 알기 위해 현해탄을 넘어가다
조명하(趙明河,1905. 4. 8(음력)~1928. 10. 10) 의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松禾)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용우(趙鏞禹), 모친 배장연(裵長年) 사이의 차남. 본관은 함안(咸安).
조의사는 일찍이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일제에 탄압 받는 민족의 쓰라림에 눈을 떴다. 조의사는 1926년 3월 신천군청의 직원으로 고용되어 일하면서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 등 독립운동 선각자들의 무용담을 전해 듣고 애국남아(愛國男兒)로서의 각오를 다졌다.
그 무렵 아들 혁래(赫來)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 하던 부인 오금전(吳金全)씨를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 길에 조의사는 갑자기 어머니에게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 채 돌아섰다. 처자식을 만나 마음이 흔들릴 지도 모르는 자기자신을 채찍질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중구(呂仲九) 등 친구 6명이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의사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 땅에 상륙했다.
오사카에서 주경야독하며 식민지인 차별에 분노.타이완 거쳐 중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조의사는 오사카(大阪)에서 공장직원․상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오사카상공전문학교 야간부에서 고학했다. 그는 주경하독하던 이 과정에서 일본인의 차별대우와 모욕적 언사를 수없이 당하면서 조국독립의 염원을 굳혀갔다. 그러나 오사카에서는 일본인 수괴를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조의사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먹고 일단 타이완(臺灣)으로 향했다. 중국 상하이로 직행하는 것은 일경들의 통제와 감시가 철저해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로서 비교적 여행이 자유로운 타이완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 사실을 알리는 신문 기사.(중외일보 1928년 6월 15일자 기사 사본) 의거는 5월에 실행되었지만 기사 게재가 금지되다가 해금되어 6월에야 소식을 전한 것
일본 왕족인 육군대장이 중국 침략 노리는 일본군 점검하러타이완 방문
조의사는 1927년 11월 타이완에 도착, 타이중시(臺中市) 계광로(繼光路) 52번지에 있는 부귀원(富貴園)이란 찻집에서 매달 10원(圓)을 받고 일하면서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제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타이완 원주민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일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일본의 산둥성(山東省)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전진기지로서 타이완은 주요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일군 병력이타이완 각지 요소에 배치돼 있었고 이들타이완 주둔 일군을 특별검열하기 위해 검열사가 파견되었다. 조의사는 육군 특별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王)가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며 육군대장, 군사 참의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구니노미야가 타이중(臺中)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일정을 알아냈다.
‘우리 겨레의 한을 풀리라.’ 일본 육군 대장의 목에 단도를 던져
‘이곳에서 일본 왕족인 구니노미야를 내 손으로 주살하여 우리 겨레의 한을 풀리라’
조명하 의사 의거지 사진. 당시 타이중(臺中) 도서관이 있던 곳으로 이후 합작금고가 들어섰다.
의사의 거사 결의는 돌 보다 굳었다. 오매불망의 의지를 다진 조의사는 타이중(臺中)역에서 타이완지사관사(台灣知事官舍)에 이르는 노정과 구니노미야가 일박할 예정인 지사관사 부근의 정황 등을 세밀히 정찰했다. 마침내 5월 14일 운명의 날이 밝아오자 결연한 마음을 다지며 단도에 극약을 바른 다음 이를 가슴에 품고 예정 장소로 나갔다. 도로 양쪽에는 물샐 틈 없이 경비군경들이 늘어섰다.
지사 관사에서 구니노미야(久邇宮)를 태운 무개차(지붕 없는 차)가 오전 9시 55분쯤 타이중(臺中) 도서관 앞 사거리 지점에서 좌회전 하려는 순간 환영 군중 사이에 서있던 의사는 단도를 빼내 들고 날쌔게 자동차 뒤쪽에 뛰어 올랐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위험을 느낀 운전사는 속력을 냈고 무개차에 동승했던 오누마(大沼) 무관장(武官長)이 구니노미야(久邇宮)의 몸을 감쌌다. 그 순간 조의사는 그를 향해 단검을 힘껏 던졌다.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 가벼운 상처를 입힌 뒤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
조의사는 거사 후 당황하는 중국 군중을 향해 “당신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침략의 주범 일본 육군의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중상 입고 사망
조(趙)의사는 아수라장이 된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일본 군경들에게 포박을 당하였다. 조의사는타이중(臺中) 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으며, 6월14일타이페이 형무소로 이송되어 수형자 번호 152번의 명찰을 단 채 독방에 수감되었다. 조의사는 그해 7월 18일 타이완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소위 ‘황족위해죄(皇族危害罪)와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조의사는 3개월 뒤인 10월 10일타이페이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의사의 나이 스물 네 살 나던 실로 꽃다운 나이일 때였다.
조의사, 순국 직전 유언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조명하 의사에 대한 사형집행을 알리는 신문 기사.(동아일보 1928년 10월 12일자 기사 사본). “24세 청춘을 일기로 타이페이 형무소 교수대 이슬로”라고 쓰여있다.
조의사는 순국 직전 형리가 “할 말이 없는가”라고 묻자 의연하게 다음처럼 말했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조의사가 순국한지 3개월 17일 뒤인 1929년 1월 27일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는 단검의 극약이 온 몸에 퍼져 목숨을 잃었다. 한국 침략 주체인 제국주의 일본의 육군 대장을 척살하기로 한 의사의 거사가 성공한 것이다. 중국 침략을 앞두고 있던 일본에 대한 단호한 경고였다. 우리의 무력 독립 운동은 대체로 조직적이고, 배후가 있는 것이었으나 조의사의 의거는 단독거사로 밝혀졌다. 조국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한국인의 의지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마나 뼛속 깊이 맺혀 있는지를 알려준 단적인 사건이었다. 이 같은 의거들로 인해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여 지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아갔다.
1978년 5월 타이페이시 한교학교(韓僑學校)에 조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의사의 유해는 1931년 4월 중순 고향인 장천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6․25 후에 자손들이 월남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유택이 마련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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