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영천시 청통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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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창건 및 연혁〕
809년(헌덕왕 1)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하였다.
은해사는 809년(신라 헌덕왕 1) 혜철(惠哲) 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비록 여기에 대한 뚜렷한 문헌적 근거는 찾기 어렵지만, 일부 사적기 자료에서 이러한 창건설이 제시된 이후 현재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후대에 편찬된 사적기인 「팔공산은해사적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생각건대 은해사는 옛날 신라 헌덕왕 기축년(己丑年, 809년)에 혜철 국사가 개산(開山)한 곳이다. 사찰 이름을 해안사(海眼寺)라 하였으며 헌덕왕이 이곳을 축리소(祝釐所, 원찰과 같은 곳)로 삼았다. 스님의 휘는 혜철이고, 자(字)는 체공(體空)이며 성은 박씨로 경사인(京師人)이다.(중략)
조선 인종 을사년(乙巳年, 1545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사지(寺誌)와 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명종 병오년(丙午年, 1546년) 천교(天敎) 스님이 내탕금을 지원받아 이곳으로 옮겨 세웠으며 절 이름도 은해사로 고쳤다. 대체로, ‘모든 눈을 취한다(取眼)’는 것으로 ‘은해(銀海)’의 뜻을 삼았다. 옛 터는 운부암(雲浮庵) 아래 해안평(海眼坪)에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옳다.
김정래(金鼎來)가 1943년에 지은 사적비의 내용으로, 현재 각종 사전류 자료에서 모두 위에서 서술된 내용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위의 자료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내용은 은해사의 이름과 관련한 부분이다. 위에서 인용한 사적기 내용에 의하면 혜철 스님이 창건할 당시의 이름은 ‘해안사(海眼寺)’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546년 천교 화상이 중창하면서 지금의 은해사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의 역사에서는 1270년 홍진국사 혜영과, 1275년 원참 스님의 중창 사실이 눈에 띤다. 혜영 스님은 동화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 유가종(瑜伽宗) 승려로, 그의 전기(傳記) 자료도 상세히 전하는 인물이다.
또한 원참 스님은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데,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지만 1298년의 활동이 확인되어 13세기 후반 무렵에 실재한 인물로 보인다.
현행서방경은 거조사(居祖社)에 있던 도인 원참이 1298년 악서(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전해 받은 법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경’이라는 이름을 지닐 수 없는 저술이지만, 여러 유통본에 이 저술의 이름이 그대로 쓰이고 있어 흥미롭다. 이 책은 주로 정토왕생의 참법(懺法)을 닦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성격으로 보아 진표의 미륵신앙과 동화사 창건 배경이 되었던 간자(簡子) 신앙 등의 계통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은해사의 고려시대 중창자로 기록되어 있는 혜영과 원참 두 스님은 유식학과 관련된 교학승으로, 또는 미륵 신앙의 신봉자로 평가할 수 있다.
1563년 묘진(妙眞)이 중건하였고, 1589년(선조 22)에는 법영(法英)이 법당의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백흥암(百興庵)과 명부전(冥府殿)을 신축하였으며, 1667년(현종 8)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절 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으며, 1730년(영조 6)에는 백흥암의 보화루(寶華樓)를 중건하였다.
조선시대 이후의 은해사 역사는 인종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의 기능을 수용하면서 부각되었다. 앞서 연혁에서 보았듯이 은해사는 이후 꾸준히 사세를 유지해 나갔으며, 1712년에 일주(一珠) 스님이 서울에 올라와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키고 사찰에 부여된 잡역을 경감시켰다는 사실도 전한다.
은해사는 이처럼 인종의 태실과 관계하여 왕실로부터 꾸준한 지원을 받았으며, 한편으로 갑계(甲契)를 통한 사찰 재산의 유지·증식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점이 주목된다.
1737년에는 법당·누각·천왕문 등을 단청하였고, 1750년 법당의 아미타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1759년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건하였으며, 1761년에는 천왕문을 세웠다. 1767년에는 백흥암의 영산전(靈山殿)을, 1772년에는 설화(雪華) 등이 백흥암의 동대(東臺)를 쌓았고, 자암(慈庵)은 대웅전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도봉(道峰)은 영산전과 시왕전(十王殿)의 불상을 개분(改粉)하였다.
1780년(정조 4)에는 혜옥(惠玉)·서징(瑞澄)·덕윤(德玧)·체주(體周) 등이 묘봉암을 중창하였고, 1785년에는 쾌민(快敏)이 거조암(居祖庵)을, 1797년에는 경옥(璟玉)·석린(碩麟)·해운(海雲)·유화(有和)·승수(勝修) 등이 법당과 누각을 중수하고 단청하였는데, 이때 운부암 조실(祖室) 지첨(知添)이 불사를 지휘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기기암(奇奇庵)을 중창하였는데 기기암의 원래 이름은 안흥사(安興寺)였다.
1816년에는 비각(碑閣)을 세웠다. 1817년에는 기봉(箕峰)·유성(宥性) 등이 서운암(瑞雲庵) 등 30여 곳에 다리를 놓았고, 1823년에는 기기암을 중수하였으며, 1833년에는 보봉(寶峯)·응암(應庵) 등이 서운암을 중창하였고, 1834년에는 우일(宇一)·유엽(有曄) 등이 중암암(中巖庵)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1847년(헌종 13)에는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 불이 나서 1,000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같은 해 팔봉(八峰) 등이 주관하여 사방 아홉 칸의 법당과 향실(香室), 심검당(尋劍堂)·설현당(說玄堂)·청풍료(淸風寮) 등을 새로 지었다. 또 이듬해에 옹호문(擁護門)·안양전(安養殿)·동별실(東別室)·만월당(滿月堂)·향적각(香積閣) 등을 세웠으며, 1849∼1850년에 걸쳐서 보화루를 중수하였다. 1849년에는 백흥암의 중료(衆寮)를 중창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靑峰) 등이 백흥암의 영산전을 중수하였으며, 1860년에는 운부암(雲浮庵)이 소실되었다.
그 해 응허(應虛)·침운(枕雲) 등이 운부암을 중건하여 법전(法殿)·설선당(說禪堂)·조실(祖室)·영각(影閣)·노전(爐殿) 등을 세웠다. 또한 1869년(고종 6)에는 백흥암의 명부전을 중수하였고, 1876년에는 백흥암에 나한전(羅漢殿) 및 석조(石槽)를 만들었으며, 1878년에는 백흥암의 보화루를 중건하였다.
현재 이 절은 말사 39개 소, 포교당 5개 소, 부속암자 8개 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해도 이 절은 논 46만4000여 평, 밭 2만8000여 평, 임야 920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2,484평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다. 이 절은 동화사(桐華寺)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지눌(知訥)이 거조암에서 신행결사(信行結社)를 도모한 이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홍진국사가 머문 뒤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으로서 사격(寺格)이 고양되었고, 조선 후기의 고승 영파(影坡)가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華嚴敎學)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날렸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산령각(山靈閣)·설선당·심검당·단서각·종루·보화루·승당·요사채·객실 등이 있으며, 그 밖에 1999년 성보박물관이 완공되었다. 대웅전과 보화루의 현판은 추사(秋史)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던 극락구품회탱(極樂九品會幀)은 1750년에 성청(性淸)과 옥련(玉蓮)이 그린 뛰어난 작품이나 수년 전의 도난사건 이후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절과 부속 암자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3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 점의 사중 보물, 24동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중국식 건축양식을 본뜬 국보 제14호의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須彌壇),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 등이 있다.
은해사괘불탱[보물 1270]
〔산내암자〕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거조암·기기암·백흥암·묘봉암·중암암·백련암·서운암 등이 있다.
〔사찰풍경〕
추사(秋史)의 글 한점을 지니고 있다면 그 자체가 영광이다. 그 영광을 가질 수 없지만 함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추사의 묵묘(墨妙)를 느끼고 싶으면 은해사를 찾아가면 허기진 묵향을 그대로 맡을 수 있다. 은해사는 추사체의 보고이다. 추사의 묵필이 은해사를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주문을 지나 400미터의 산사의 길을 따라가면 다리를 건너면 제일 먼저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이 커다란 2층 누각이다. 누각의 편액인 ‘보화루(寶華樓)’가 바로 추사의 글씨이며, 보화루와 일직선상에 있는 대웅전(大雄殿) 편액 또한 추사의 글씨이다. 대웅전 옆 기도하는 스님이 묵는 노전의 일노향각(一爐香閣)도 추사의 묵계(墨界)이다. 얼마 전까지는 일주문의 편액인 ‘은해사(銀海寺)’도 추사의 작품이었으나, 일주문을 증개축하면서 추사의 작품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맛보게 되었다. 박물관에는 추사의 작품인 ‘불광(佛光)’도 감상할 수 있다. 산내암자인 백흥암에서도 추사를 만날 수 있다. ‘십홀방장(十笏方丈)’ 편액과 6개의 주련이 바로 추사의 세계이다. 간송미술관 최완수선생은 "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고 추사의 글씨를 자랑했다. 경상감사로 부인한 추사가 명승지를 구경하면서 은해사를 들러 영파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은해사는 불사를 완성하고, 추사는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와 있을 때 영파스님의 부탁을 받아 글 써주었다고 한다. 은해사는 추사의 흑묵으로 시작해서, 추사의 묵계로 승속의 관계 이으며, 묵향으로 회향하는 곳이다. 묵향을 길라잡이로 삼아 부처님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멋이 아닐까.
〔가람배치〕
은해사 일주문에서 낮고 평평하게 형성된 계곡을 따라 경내로 들어간다. 이 길은 좌우에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심어져 있어 걸어가는 길이 상쾌하게 이어진다. 이 길 중간 왼쪽에 부도밭이 있고, 여기에 은해사에 머물렀던 여러 고승들의 부도와 비가 모아져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바로 못 미쳐서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은해사의 높은 사격(寺格)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계곡을 지나면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보제루 누각이 있고, 주변은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어 경내를 둘러싸고 있다. 보제루로 들어가면 경내가 시작되는데, 중앙 뒤쪽에 금당인 대웅전이 있고, 그 앞쪽 좌우에 종무소가 있는 심검당과 은해사 승가대학 강원이 마주보고 있다. 대웅전 왼쪽 위에는 자그마한 단서각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 지장전과 우향각이 자리한다. 보제루 왼쪽에는 종각이 있다. 교통안내 현지교통 주변관광지
입 장 료
주차시설 도움전화
* 경부고속도로 - 경산 나들목 - 하양 - 919번 지방도 - 청통면 사무소 - 은해사
* 대구 - 4번 지방도 - 하양 - 919번 지방도 - 청통면 사무소 - 은해사
* 영천 - 28번국도 의성방향 - 신덕리 - 919번 지방도 - 청통면 사무소 - 은해사
▲ 영천 ----→ 신녕 --→ 거조암
※ 영천까지는 경부고속도로 이용, 대구에서 42km, 포항에서 54km, 경주에서 27km 지점에 있음.
※ 거조암은 은해사의 한 암자인데 직선 거리로 4km 가량 떨어져 있고, 들어오는 입구도 다 르다.
영천고속터미널에서 2시간 간격으로 은해사행 버스 운해(소요시간 30분)
은해사 054-335-3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