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풍경

[스크랩] 600년전 조선 읍성안의 동헌과 객사등 관아의 모습/고창읍성3

문성식 2010. 10. 15. 11:47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외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모양성이라고도 부르며 고창군 남쪽 성주봉인 장대봉(108m)에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를 최대로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이 성곽은 모서리 이음의 공법으로 축조하여 외면만 돌을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져 있다.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50,172평)로 동.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축성 당시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건물 14동을 복원·정비 하였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육축에 호예문을 열고 초루를 세우는 방식과 달라,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자연석은 거칠게 다듬어 썼는데, 초석 당간지주 등을 깨뜨려 쓴 것도 있다.
성벽에 새겨진 각자를 보면 전북, 전남, 제주의 각 고을에서 책임 구역을 정하여 합동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산9  사적 제145호

<이하출처 : 고창읍성 홈페이지에서 발췌>

 

 

고창객사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다.

중앙의 몸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본관의 현판에 쓴 모양지관은 예로부터 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이라 불러온데서 비롯된 당호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객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8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91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내아

 

 

동헌은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 불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내아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7년에 발굴조사하여

 1989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동헌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군·현 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동헌이라 하였다.
건물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동헌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7년에 발굴조사하여 

 1988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읍성 풍화루

 

 

이 건물은 고창읍성 연못옆에 세운 2층 누각이다.
문헌에는 성내의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풍화루는 1989년에, 연못은 1990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고창읍성 관청

 

 

관주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령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의 접대와 각종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사무를 관장하였다.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2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읍성 작청

 

 

 

고창읍성 장청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 및 진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 · 현을 지키는 속오군 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 · 군교들이 군무를 보살피던 청사이다.
 2000년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읍성 향청

 

 

조선시대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서 조선 초기에는 유향소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이라고 불렸다.
향청의 설치목적은 지방의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교화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93년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읍성 성황사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이다.
1983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읍성 옥

 

 

 

척화비

 

 

조선말기에 대원군에 의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 (1871)에 세웠다.

당시 서양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의 개방을 요구하고 엄청난 힘으로 밀어 닥치자 섭정의 자리에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길은 쇄국정책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운 신미년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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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청솔객이 걷는 길
글쓴이 : 청솔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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