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속초시 대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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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문화재청 |
강원도 속초시 대포동 설악산에 있는 절.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이다.
〔창건 및 연혁〕
652년(진덕여왕 6)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라 하였으며, 당시 계조암(繼祖庵)과 능인암(能仁庵)도 함께 지었다. 이 때 자장은 구층탑을 만들어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이 구층탑이 어느 탑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향성사는 698년(효소왕 7)에 능인암과 함께 불타 버린 뒤 3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701년에 의상(義湘)이 자리를 능인암터로 옮겨서 향성사를 중건하고 절이름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고쳤다. 이 때 의상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3존불을 조성하여 이 절에 봉안하였다. 선정사는 1000년 동안 번창하였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구층탑이 파괴되었고, 1642년(인조 20)에는 화재로 완전히 타 버렸다.
〔중 창〕
선정사는 천년 가까이 법등을 이어왔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피해를 받지 않았으나, 1642년(인조 20)의 화재로 완전히 폐허가 되자 그곳에 거주하던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절의 중창을 기도하며 설악산을 떠나지 않은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惠元) 스님들이 있었는데, 1644년(인조 22)의 어느 날, 세 스님은 똑같은 꿈을 꾸었다. 향성사 옛터에서 비범한 신인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터에 만대에 이르도록 삼재(三災 : 바람과 물과 불의 재난)가 감히 침범하지 못할 뿐 아니라, 널리 불법을 펼 수 있는 도량이 되리라.”
하루 저녁, 같은 꿈을 동시에 꾼 것을 계시로 여긴 세 스님은 이튿날부터 중창을 시작하였고, 1647년 절이 완공되자 신인이 영원히 흥할 수 있는 절터를 잡아 주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新興寺’로 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1761년(영조 37)에 체조(體照) 스님이 지은 「설악산신흥사대법당석체기(雪嶽山新興寺大法堂石砌記)」에서는 주변의 지형과 불교사상에 입각하여 신흥사라 하게 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신흥은 어떠한 까닭으로 ‘新興’이 되었는가?
석가세존은 당시 설산에서 도를 얻으셨다. 나아가 신흥사에서 10리 거리에는 홀로 빼어난 천척(千尺)의 고봉이 있으니 곧 미륵봉이요, 아랫사람들이 감히 올라가지 못할 만길 층암(層岩) 위에 한 굴이 있으니 금강굴(金剛窟)이라고도 하고 비발라굴(毘鉢羅窟)이라고도 한다.
『화엄경』에는 ‘가섭 존자가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옥기발(碧玉奇鉢)을 가지고 비발라굴에서 미륵 보살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 굴의 모양새를 자세히 살펴보면 음식을 끊은 승려가 머물고 있는 모습이요, 선정을 얻어 말이 없는 승려가 계율을 지키는 모습이며, 고요히 벽을 보고 앉은 승려가 소림사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부처와 부처, 조사와 조사들이 심인(心印)을 주고받은 그 아름다운 곳이 이곳 아니겠는가.”
이 절이 이미 설산의 미륵봉 비발라굴 아래에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신흥사라 한 것이다. 곧 이곳은 석가모니불이 성불하여 이미 신이로움을 보였던 곳이요, 장차는 미륵불이 성불하여 신이로움을 일으킬 곳이기에 신흥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신흥사에는 수많은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1647년에는 대웅전을 건립하였고, 1661년(현종 2)에는 해장전(海藏殿)을 짓고 ≪법화경 法華經≫ 등의 판본을 두었으며, 1715년(숙종 41)에 설선당(說禪堂)이 불에 타 버리자 1717년에 취진(就眞)·익성(益成)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1725년(영조 1)에는 해장전을 중수하였고, 1737년에는 명부전을 창건하고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였으며, 1801년(순조 1)에는 벽파(碧波)·창오(暢悟) 등이 용선전(龍船殿)을 짓고 열성조(列聖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13년에는 주운(周雲) 등이 불이문(不二門)과 단속문(斷俗門)을 세웠고, 벽파 등은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하였다.
1821년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벽하(碧河)·명성(明成) 등이 16나한을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서 해장전으로 옮기고 해장전의 이름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 고쳤다. 그 뒤 1909년에는 용선전이 헐렸고, 1910년에는 응진전이 불탔으며, 1912년에는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설선당 후각(後閣) 32칸을 중수하였다. 1965년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가 되어 양광·속초·강릉 등지의 사암을 관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절의 주지를 지냈던 성원(聲源)이 대소의 당우들을 거의 모두 중건 또는 중수하였고, 범종을 새로 만들었다. 최근 절이름을 ‘神興寺’에서 ‘新興寺’로 고쳐 부르고 있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명부전·영산전·보제루·천왕문·일주문·불이문·적묵당(寂默堂)·설선당 등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된 보제루가 있다. 이 가운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1644년에 세운 건물로 중앙의 공포(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맞추어 댄 나무쪽들)와 단청이 지극히 아름답다.
현재 봉안된 삼존불은 의상이 중건할 때 조성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보제루는 휴정(休靜) 등 고승 60여 인의 진영(眞影)이 안치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효종이 하사한 향로와 김정희(金正喜)의 진필(眞筆)이 있다. 절 일원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43호의 향성사지삼층석탑과 청동시루·범종,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인 경판 277매(枚), 사천왕상 등이 있다.
청동시루는 순조의 하사품으로 벽파가 역대 왕조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것이고, 경판은 효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한자·한글·범어(梵語)가 혼합되어 있는 희귀한 것으로 가치가 크다. 경판의 종류로는 ≪은중경 恩重經≫ 전질과 ≪법화경≫ 일부 등이 소장되어 있다.
범종은 경내 보제루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종은 1400여년 전 향성사의 종이라고 전한다. 향성사가 불탈 때 깨졌던 것을 1748년에 원각(圓覺)이 개주했으나 소리가 완전하지 못하여 1758년에 홍안(弘眼)이 다시 개주하였다. 이 종의 무게는 600㎏으로 6·25전쟁 때 총상을 입은 뒤 1963년에 수리하여 보존중이다. 사천왕상은 인도산 마디가원목을 사용하여 1981년에 조성, 봉안한 것이다.
최근에는 1997년 10월 높이 14.6m로 세계 최대의 청동불좌상이 조성한 지 10년 만에 일주문 앞에 봉안되었다. 이 청동대불은 통일을 염원하며 세운 것으로, 일명 ‘통일대불’로도 부른다.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속초신흥사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및복장유물[강원 유형 143]
〔산내암자〕
부속 암자로는 선정사의 옛터에 세워진 내원암(內院庵)과 655년에 건립한 계조암, 1785년(정조 9)에 창건한 안양암(安養庵) 등이 있다.
계조암
설악산 흔들바위 옆에 계조암(繼祖庵)이 자리한다.
창건은 신흥사와 함께 652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지금처럼 처음부터 굴법당으로 창건되었는데, 자장·동산·봉정 등의 세 고승이 수도하였고 한다. 그 뒤 원효와 의상 스님이 머물며 세 스님의 법을 이었다고 하여 계조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굴법당은 극락전으로, 바위면을 안으로 깎아서 만들었는데, 설악산의 여러 바위 가운데 가장 둥글게 생겨 마치 목탁같은 바위 안에 조성되었다.
그 밖에 최근에 지은 삼성각과 요사가 있다.
내원암
신흥사에서 북쪽으로 울산바위를 향하여 약 1.5㎞ 가서 계곡을 건너면 왼쪽 언덕 위에 내원암(內院庵)이 자리 잡고 있다.
내원암은 652년(진덕여왕 6)에 창건되었다. 자장율사(慈藏律師)가 향성사(香城寺)의 창건과 더불어 지금의 내원암터에 능인암(能仁庵)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698년(효소왕 7) 능인암은 향성사와 함께 불타버렸고, 701년 이곳으로 온 의상 스님은 능인암의 자리에 선정사(禪定寺)를 창건하고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상을 조성하였다. 이 때부터 이곳은 설악산 내의 대표적인 미타도량이 되어 수많은 기도객들이 찾아들어 그 명맥이 천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1642년(인조 20) 선정사가 불타고 그 후신으로 현재의 신흥사를 짓자, 1644년(인조 22) 용암(龍巖) 스님이 선정사의 옛터에 암자를 짓고 내원암이라 하였다.
1860년(철종 11)이 암자가 불타버리자 혜봉(慧峰) 스님이 중건하였고 1882년(고종 19)에는 경봉(勁峯) 스님이 독성전을 건립하고 산신탱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 내원암은 다시 불타고, 경봉 스님은 곧바로 중건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6년 뒤인 1891년에 후불탱을 비롯하여 칠성탱·신중탱을 봉안하였다.
1914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서 수도하다가 이곳을 찾은 비구니 김수영(金壽永) 스님은 내원암이 고승들의 참선수도성지임을 자각하고, 개인 재산을 헌납하여 선원을 짓자 전국의 참선수행자들이 모였다.
현재의 내원암은 1936년의 화재로 전소된 뒤에 중건한 것으로, 인법당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만을 갖춘 조그마한 규모이다. 그러나 인법당 내부에 봉안된 아미타여래좌상은 영험이 크다고 하여 많은 기도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이곳에 걸려 있던 「내원암(內院菴)」 편액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성지순례길에 들러 남긴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신흥사 보제루 안에 보관되어 있다.
안양암
신흥사 사천왕문을 나와 좌회전하여 등산로를 따라 3분가량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신흥사 암자 안양암이 나온다.
안양암은 지장율사가 652년(신라 진덕여왕 6)에 향성사를 세울 때, 동시에 현재의 안양암 자리에 해운암을 세웠고 그 후 화재로 소실되자, 1785년(정조 9)에 준경(俊鏡) 선사가 백운동의 백운암을 해운암 자리에 이건하여, 안양암이라고 이름하였다. 안양암이라고 한 것은, 혜원법사의 백련결사에 동참하여 안양국에 왕생하자는 의미라고 한다.
현재의 안양암은 1949년에 비구니 이대덕(李大德) 스님이 중창한 것을, 다시 1969년에 비구니 임법지(林法知) 스님이 보수한 것이다.
〔가람배치〕
청동 대불이 자리한 일주문을 지나서 약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사천왕문으로 시작하는 경내에 닿게 된다.
사천왕문은 설악산 계곡과 사역을 구분짓기도 하는데, 사천왕문 맞은 편에 커다란 규모의 보제루가 있고, 그 앞이 대웅보전, 명부전, 삼성각 등이 자리한 예배공간이다. 대웅보전 구역 왼쪽으로는 운적당과 청하당, 그리고 요사 및 종무소 등이 자리하는 생활수행공간이 있다. 운적당 맞은 편에도 적묵당 요사가 있으며, 그 아래에 전통찻집이 있다. 적묵당 뒤쪽으로 설악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나 있는데, 왼쪽에 부도와 탑비가 있다. 여기에서 설악산으로 가는 길목 오른쪽에는 법당이 있어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다.
설악산 등산로로 올라가면 왼쪽에 내원암이 있고, 흔들바위 옆에 계조암이 자리한다.
〔교통정보〕
승용차
서울 방면에서 출발한다면 우선 6번 국도를 탄다. 양평에서 44번 국도로 바꾼 뒤, 홍천 → 인제 → 한계령휴게소를 지나 양양에서 7번 국도로 진입한다. 여기에서 11.4㎞ 가면 낙산이다. 곧이어 설악동 입구인 물치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좌회전하여 10.9㎞ 가면 설악산 입구 주차장에 닿는다. 여기에서는 걸어서 가야 하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혹은 인제에서 한계령휴게소로 가지 않고 미시령과 한계령 분기점을 지나 미시령방면으로 가도 된다. 이 길은 46번 국도인데, 여기에서 16.2㎞ 가면 용대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우회전 하여 466번 지방도로를 탄 다음 13.6㎞ 가면 미시령이다. 부근에 「대명설악 레져타운」안내비가 있는 삼거리가 있고, 여기에서 속초 방면으로 향하여 4.6㎞ 가면 설악프라자리조텔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 하면 척산온천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설악동 숙박단지와 설악산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대중교통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속초로 가는 고속버스가 수시로 있고, 혹은 설악산 소공원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탈 수도 있다. 속초 속초시내에서는 설악동까지 7번 시내 버스가 10분마다 운행하는데, 30분 정도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