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풍물,생활

내륙의 아름다운 정자 기행

문성식 2015. 7. 5. 01:37

내륙의 아름다운 정자 기행

 

 

 

 

선비들의 고장 청풍 속에 깃든 멋, 한벽루


바닷가에 서 있는 정자가 절경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면, 내륙에 있는 정자들은 그와는 또 다른 멋을 느끼게 해준다.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바닷가에 서 있는 정자들이 여성스러움이 있다면, 내륙에 있는 정자들은 호탕하고 남성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바닷가에 정자들이 아름다운 경치에 묻혀 있다면, 내륙에 있는 정자들은 그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난 바닷가뿐이 아니라 내륙의 정자도 늘 즐겨 찾는다.


보물 제528호 청풍 한벽루는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다. 청풍 한벽루는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승격이 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 위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다. 한벽루는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 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청풍문화재단지를 찾아 간 것은 벚꽃이 만개를 할 때였다. 마침 문화재 단지 안에는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몰려다니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한편에서는 나들이를 만끽하려는 듯 판을 벌리고 있다. 한벽루 위에 오르니 저 밑으로 긴 꼬리를 끌며 흐르는 내가, 마치 한 마리의 용이 틀임을 하고 있는 듯하다. 금수강산이라 했던가. 이곳이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마 이곳에 한벽루를 짓고 신선놀음을 했는가보다.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

 

‘관동에 죽서루가 있으면, 호남에는 피향정(披香亭)이 있다.’

3월 20일, 태인면 고천리에 소재한 옥천사를 보러가는 길에 발길을 멈추게 한 피향정. 첫눈에 그 자태에 매료되어 갈 길을 못가고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피향정은 태인면 큰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정읍 칠보 쪽에서 태인면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시가지가 시작되는 사거리 좌측에 서 있어,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몇 번이고 이 길을 지나쳤으면서도 왜 그동안은 피향정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정자 기행을 하면서 논 가운데 서있는 그늘 막도 정자로 보이는 버릇이 생긴 덕분에, 오늘 피향정을 만날 수 있었다. 피향정을 보는 순간 관동 죽서루에 버금간다는 생각을 한 것도 많은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처음으로 ‘아~’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자가 이곳에 있었다니. 아마 시가지 안에 자리하고 있어 그동안 암 생각 없이 지나쳤는가 보다.


급히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꺼내들고 피향정 앞으로 다가섰다. 한편에는 하마석(下馬石)이 있고 피향정을 두른 낮은 담이 있다. 담은 최근에 둘러 친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289호인 피향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른 것인가 보다. 낮은 담 밖에서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피향정의 모습은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지나는 행인들이 그저 웬 정자 하나 서있거니 하고 바라보는 모습들이다. 좀 더 가까이 가서 그 운치를 느끼고 싶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문이 잠겨있다. 저쪽 한편 터진 곳으로는 들어갈 수가 있겠으나, 약속을 한 시간이 있어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낮은 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정자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들은 둥그런 돌기둥을 이용하여 마치 누의 형태처럼 축조하였다. 돌계단을 이용해 오르게 되어있는 정자는 그 자태 하나만으로도 지나는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다. 정자 한편에 줄지어 선 많은 비석군들은 또 다른 멋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기암과 절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한 암서재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계곡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이 되어있고, 흙 한 점 없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이다. 아홉 구비를 돌아내리는 맑은 물은 기암괴석과 아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화양계곡 안에 정자가 있다는 이야길 듣고, 5월의 이른 더위를 이겨가며 달려간 화양계곡. 충북에는 절경이 열 곳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답다. 계곡 안으로 들어가니 이른 철인데도 몇 쌍의 남녀가 물놀이를 하느라 첨벙거리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화양계곡의 중간에 솟아 오른 바위 하나. 몇 층으로 만들어진 기암은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듯 산허리에 불쑥 솟아 있다.


한눈에 보아도 아름다운 정자다. 내를 건너 암서재를 자세히 보고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내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전날 내린 비로인해 물이 불어났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비가와 물이 불으면 어떻게 건너갔을까?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처럼 옷을 벗고 건넜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옷을 다 적셔가며 건넜을 수도 없었을 텐데. 아쉽긴 해도 길 건너편에서 바라다만 보는 수밖에 없다. 한참이나 암서재에 넋을 빼앗기고 있는데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물놀이를 하던 사람이 미끄러지기라도 했는지 첨벙거리고, 한편에선 일행들이 좋다고 난리들이다. 올 여름 더위를 피해 이곳을 온다면 나도 저들처럼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내를 건너 암서재에 올라 그 풍광을 느껴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단아한 선비의 자태를 연상케 하는 전주 한벽당

 

전주 한벽당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던 월당 최담 선생이 태종 4년에 별장으로 건립한 정자이다.한벽당이란 이름은 월당선생유허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처음에는<월당루>라고 불렸다가 후에 <벽옥한류>라는 글귀가 합해져 한벽루, 혹은 한벽당이란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짐작된다.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에서 뻗어 내린 물줄기가 지나는 절벽 위에 덩그러니 서 있다. 예부터 전주뿐만 아니라 호남의 명승지로 소문이 나,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을 유혹해 시심을 부추겼던 한벽당. 『호남읍지』를 보면 한벽당을 제목으로 이경전과 이경여 등 저명인사들의 시문들이 즐비한 것을 보면 한벽당이 풍류와 예술의 중심 무대였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한벽당은 전주를 찾을 때마다 꼭 한번 씩은 둘려보는 곳이다. 그 위에 올라 내를 바라다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아련한 기억 때문이다. 1979년이니 참 오래도 되었다. 그 해에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가 열렸고, 전주에 거주하시는 춤꾼 최선 선생이 ‘가잿골의 전설’이라는 무용극으로 무용제에 참가를 하였다. 그 음악을 맡아 작곡을 한 인연으로 전주에 가서 오래 묵어야했는데, 저녁이면 나의 유일한 벗이 바로 전주천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오목한 질그릇에 넣고 끓이는, 오목가리 탕과 술 한 잔이었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전주천 옆에 그런 집들이 즐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마다 술이 오르면 찾아간 곳이 한벽당이었으니, 아마 나에게도 조금은 시인의 기질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믿거나 말거나지만.


춘향이가 이몽룡을 눈물로 떠나보낸 한 맺힌 오리정

 

광한루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던 이몽룡과 춘향이가 이곳에서 한양으로 떠나는 이몽룡과 통한의 이별을 했다는 곳이다.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나오는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국도 곁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 이곳이 지난 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기에, 이몽룡도 바로 남원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이 길을 거쳤을 것이다. 비록 판소리의 한 대목이지만 이곳은 남원에서 족히 20여 리나 떨어져 있다. 그 먼 길까지 배웅을 나온 춘향이는 이곳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목이 메어 이도령과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니 그 사랑하는 마음이 오죽하였으랴.


오리정에서 이별을 한 춘향이는 전주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서 있는 춘향이고개 위에서 멀어져가는 이몽룡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곳을 춘향이버선발이라고 하는데 아마 춘향이가 이몽룡의 뒤를 ?다가 신이 벗겨진지도 모르고 ?아갔는가 보다. 오리정은 그런 이야기를 간직한 채 남원에서 전주로 가는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의 오리정은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층 목조건물로 축조된 오리정은 1953년이 지어진 것이다. 오리정 맞은편에는 오리정 휴게소가 있고, 오리정은 노송 한 그루를 품안에 안고 당당히 서 있다.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아직은 철이 일러서인가 수련 두 송이가 수줍은 듯 피어있다. 정자는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이층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은 없어지고 출입을 할 수 있는 공간만 입을 벌리고 있다. 정자는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운치가 있는데, 이곳이 춘향이와 이몽룡이 이별을 나누며 통곡을 했던 곳이라고 생각을 하니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듯하다. 춘향가 오리정 대목을 알게되면 이 오리정의 이별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실감이 난다.


온갖 시름을 낚시로 떨치던 남한산성 내 지수당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내에 있는 지수당. 경기도문화재 자료 제14호인 지수당은 조선 현종 13년(1672)에 이세화(1630∼1701)가 지은 건물로, 당시 고관들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이세화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 폐위 시, 상소를 올렸다가 문초를 당하고 귀양을 가게 된다. 그 뒤 복직되어 공조·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현재 산성 내에 있는 지수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뒤로는 세 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하나는 매몰되어 지금은 두 개의 연못만 남아 있다. 기록에는 연못 가운데에 ‘관어정’이라는 연못의 물고기를 바라다본다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빈 터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은 오래전부터 경기도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그곳에는 취재할 일이 생겨 자주 찾아가고는 한다. 더욱 예전 광주군지(지금은 당연히 시가 되었지만)를 집필할 때 남한산성을 수 십 차례나 찾아갔던 곳이라서 항상 지수당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다시 찾아갔더니 지수당과 주변이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우리 문화재를 찾다가 보면 더럽고, 낙서가 되고, 보수가 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만남을 갖기도 한다.  

 

신선이 탐을 낼만한 절경에 자리한 운서정

 

운서정을 찾아 간 날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차로 운서정 앞에까지 올라가 가정문을 보면서부터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날렵하게 서 있는 솟을대문에 가정문(嘉貞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좌측 벽에는 <사선대 사선사>라 쓴 현판이 부착이 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운치 있는 돌계단 위에 운서정이 자태를 뽐낸다. 하늘 닿게 높다라니 솟아 뒤로 구름을 배경삼은 운서정.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우측을 보니 인법당이 있고, 좌측 편으로는 요사채로 사용하는 듯한 건물이 있다. 동, 서재가 있다고 했는데 이 건물들이 동, 서재인 듯하다. 그러나 동서재의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듯 그 자태를 찾아볼 수가 없다. 운서정은 돌계단을 올라 자리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보면 거대한 돌로 주추를 놓았는데, 주추에도 조각을 해 놓았다.


운서정은 정말 운치가 있는 정자다. 아래로는 오원천이 흐르고 있어 절경에 자리 잡고 있다. 운서정을 보니 지금은 문이 없으나, 문을 올려 걸어놓을 수 있도록 전각을 빙 둘러 고리가 달려있다. 전각의 단청이나 조각 등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듯하다. 중앙에는 두 마리 용이 양편에서 전각의 천정을 휘감고 있다. 밖으로도 입을 딱 벌린 용두(龍頭)를 조각해 그 멋을 더하고 있다. 어디서 바라보아도 흐트러짐이 없는 정자의 모습에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올 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자가 절집으로 변하면서, 정자 아래편에는 각종 기물들로 가득하다.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정자인데 이런 점은 조금 신경을 써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운서정를 나와 사선문 쪽으로 가니 산책로 주변에는 각종 꽃들이 봄을 알리고 있다. 많은 정자를 보았지만 운서정 역시 빼어난 경관에 운치가 있는 정자다. 봄날 찾은 운서정은 그렇게 절집으로 변해버렸지만, 그 멋진 자태를 자랑하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누가 감히 영남루(嶺南樓)를 젖히고 제일이라 할 수 있는가?

 

밀양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이다.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742∼765, 재위)때 이 자리에 세워졌던 영남사(嶺南寺)가 폐사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당시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한 것이다. 그 후 조선조 세조 5년(1459)에 밀양부사 강숙경이 규모를 크게 하였고, 중종 37년(1542)에는 밀양부사 박세후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타버렸다. 그 뒤 인조 15년(1637)에 밀양부사 심흥이 다시 중건하였고, 헌종 8년(1842)에 실화로 불에 탄 것을 이인재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현종 10년(1844) 다시 개창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본루는 조선 후반기의 우리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부속 건물로는 능파당과 침류각의 양익루를 비롯하여 사주문, 일주문, 객사인 천진궁이 있으며 뜰에는 유명한 석화가 깔려 있다. 영남루를 찾은 것은 밀양 표충사와 표충비, 그리고 사명대사의 유적지 등 밀양 일대의 유적을 찾아 나선 길에 들렸다. 처음 영남루를 보고는 그 장대함에 감탄을 하였다. 영남루를 찾기 전에 들린 무봉사의 보물 제493호 석조여래좌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흡사 도솔천을 오른 듯한 기분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영남루를 바라보고는 ‘과연 영남 제일루다’라고 감탕을 하였다. 솔직히 영남루를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그 멋스러움과 장관은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영남루를 찾아갈 때는 하필이면 영남루를 보수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은 휘장으로 가려 놓고, 그 남은 부분도 이리저리 고정을 시켜 놓아 휘장을 친 나머지 부분만 촬영을 하였다. 사진을 찍고 나서 얼른 강 건너 편으로 가서보니 도저히 사진을 담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사진을 담아 보았자 색이 든 휘장이 반 넘게 가려 오히려 볼썽사나울 것 같아서다. 후일을 기약하고 돌아서면서도 그 장대함에 몇 번인가 아쉬움을 달래야 했던 영남 제일의 정자다.   


무릉동원이 예 아니냐? 금란정은 어디멘고?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고려 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의 한 분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1,500여 평의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무릉반석이 있는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는 무릉반석 곁에 노송 몇 그루와 바위들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란정은 조선조 말 향교인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고 향교가 폐지되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한 유생들이 모여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란정을 이곳에 짓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관헌들에 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해 당시 유림선비들의 자손들이 모여 선대의 뜻을 기리고자 이 정각을 세우고 금란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 계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누가 같이 동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반석의 넓이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장관에 취해 잠시 정자는 잊었다.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해가 간다. 이 절경을 보고 시 한수 읊지 않는다면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움에 취해 흥얼거리지 않는다면 어찌 묵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잃은 울분을 이곳에 와 정자를 지어 풀어버리려고 했던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니 그분들도 그런 심정이지나 않았을까.


산 절로 수 절로 살아가는 곳 송정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 동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송정은 7광, 10현들이 모여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지어 읊으며 즐기던 곳이다. 광해군(재위 1608∼1623) 시절 왕의 폭정이 극에 이르러 세상이 어지러웠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송정에 모여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이들을 가르켜 7광·10현이라 일컬었다. 7광은 김대립·김응창·김감·안치중·송민고·이상향·이탁을 가리키며 10현은 깅응찬·김광·안치중·송민고·이탁·김관·김렴·김급·김우직·양몽우를 가리킨다.


칠보면에 있는 무성서원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곳 송정. 낮은 산 중턱에 자리잡은 송정은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니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이곳에서 광해군의 폭정에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도 이리 무심하게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변 새소리에 들으며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초봄이라고 하지만 더운 날인데도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시원하다. 7광 10현이라. 아마도 세상을 버린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인적이 끊긴 작은 정자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이리도 편하게 만들 수가 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