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9.jpg 이조(李朝) 세종(世宗) 13년(年) (1431년(年)) 경남밀양(慶南密陽)에서 태어나셨고 도덕(道德) 문장(文章)이 일대(一代)의 수표(帥表)가 되어 영남학고(嶺南學고)의 숭조(崇祖)로 그의 문하(門下)에서 많은 도학문장(道學文章)의 제자(弟子)를 배출(輩出)한 고필제(고필畢)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이 돌아가신지 6년(年), 연산(燕山) 4년(年) 년사화(年史禍)로 인(因)하여 화급천양(禍及泉壤)의 참화를 입었고, 그의 외아들 숭년(嵩年)은 당(當) 13세(歲)로 년미만(年未滿)으로 형(刑)을 면(免)하고 현천(川) 치(治)료에 안치(安置)되었고 그 후(後) 3세(世)를 지나 고(高)령(靈)용(龍)당으로 전(轉) 하여 선생(先生))의 6세손(世孫)인 수(受)양대(代)에 정착(定着)하였으며(1651년 효종(孝宗)2년)이래(以來) 직계후손(直系後孫) 들이 330여년간(餘年間) 세거(世居)하고 있다.

본(本) 가옥(家屋)은 일선김씨(一善金氏) 문충공고종댁(文忠公 宗宅)으로 선생(先生)의 부천위(不遷位) 신주(神主)를 모신 사자(祠字)가 있다.

동리 어구에서 CONCRETE 포장한 골목길을 따라 북쪽으로 들어가면 5간(年) 소슬대문이 노단경(路端景)을 이루었고 야산(野山)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대지(垈地)에 건물(建物)이 자리잡았다. 대문(大門)채와 사랑마당을 격하여 사랑채가 높은 축대위에 놓이고 이 사랑체의 뒤쪽의 앞마당을 중심(中心)으로 북측(北側)에 한층더 높은 축대를 쌓아 정침(正寢)을 놓았고 그 앞쪽 좌우(左右)에 고방채와 중사랑채를 벌여 놓아 전체(全體)로서 튼ㅁ자형(字形)을 이루었으며, 동북측(東北側)의 한층더 높은터에 사당(祠堂)을 배치(配置)하였다.

정침(正寢)은 2단(段)의 높은 기단(基壇)을 쌓았는데 표면(表面)을 세멘몰탈 로 마감하였고, 네모난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위에 방주(方柱)세웠는데 대청(大廳)의 중앙주(中央柱)만 두리기둥을 사용(使用)하였다. 대청상부(大廳上部)는 삼량가(三樑架)로 굴곡이 심한 대들보위에 제형(梯形)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았다.

평면형태(平面形態)는 일자 (一字) 남부형계(南部型系)에 속하며 2간대청(間大廳)의 서측(西側)에 통간(通間) 온돌방(큰방)과 2간(間)부엌이 연접(連接)하였고, 동측(東側)에는 작은방을 뒤로 반간(半間) 물려 돌출(突出)시키고 앞쪽에는 반간(半間)깊이의 툇마루를 설치(設置) 하였고, 그 곁에 좁고 긴 간(間)살의 골방을 꾸미고 지붕은 측면(側面)의 박공면에서 내림지붕을 달아 처리하였다.

확실(確實)한 건축연대(建築年代)를 가름할 자료(資料)는 없으나 사랑채(1812년건(年建)) 보다는 앞선 건축물(建築物)로 보이며 1878년(年)에 (12세종손상도대(世宗孫相度代) 묘우(廟宇)와 함께 중건(重建)하였다는 주장이 과히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舍廊)채는 자연석(自然石) 축대 상면(上面)을 몰탈도(途)하였고 메모난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 위에 방주(方柱)세웠는데 대청(大廳)의 전면중앙주(前面中央柱)만 원주(圓柱)다. 상부가구 (上部架構)는 삼량가(三樑架)로 굴곡이 있는 대들보 위에 제형(梯形)발이 달린 원형판대공(圓形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았다.

평면구성(平面構成)은 전면(前面) 5간(間)의 우측(右側)(동측(東側)) 2간(間)은 전면(前面)이 개방(開放)된 우물마루고, 마루의 좌측(左側)(서측(西側) 2간(間)은 앞쪽에 중반간(中半間)의 툇마루 놓고 뒤로는 통간(通間)의 사랑방을 꾸몄다. 좌측(左側)(서(西)쪽) 끝간은 전면(前面)에 온돌방 1간(間), 뒤쪽에 개방(開放)된 아궁이 부엌간으로 쓰이며 상부(上部)에는 다락을 꾸며서 사랑방에서 출입(出入)케 하였다.

대청상부(大廳上部)의 상량문(上樑文)에 「숭정기원후사임신사월초......(崇禎紀元後四壬申四月初......)라 기록(記錄)되어 있어 1812년(年)에 건축(建築)된 것을 알 수 있겠고, 기둥재(材)의 대부분(大部分)이 중간(中間)에서 이음하여 사용(使用)한 것으로 보아 구재(舊材)를 사용(使用)하여 건축(建築)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사랑(中舍廊)채는 세멘몰탈 기단상(基壇上)에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놓고 빈약(貧弱)한 각주(角柱)세웠는데 삼량가(三樑架)로 짜여져 있다.

정면(正面)은 동향(東向)하여 안마당쪽이 배면(背面)이 되었으며 남향(南向)한 좌측간(左側間)을 개방(開放)하여 마루 놓았고, 어간전면(御間前面)의 반간중(半間中) 툇마루 뒤쪽에 온돌 중사랑방을 꾸몄고 우측간(右側間)은 앞뒤로 온돌방과 마루간(間) 광을 각간(各間)씩 설치하였다.

고방채는 가운데 2간(間)은 광으로 사용(使用)되며 우측간(右側間)은 방앗간이었다하며 좌측(左側)의 마구간 뒤에 내즉(內則)이 설치되어 있다.

사당(祠堂)은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부천위신주(不遷位神主)를 모신 사우(祠宇)로 자연석(自然石) 기단(基壇)을 몰탈로 포장(鋪裝)하였고,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위에 방주(方柱)세웠으며 상부가구(上部架構)는 오량가(五梁架)로 용자주(龍子柱) 세워 이중량(二重樑) 받고 그위에 제형동자주(梯形童子柱) 놓아 종(宗)도리 받았다.

전면삼간(前面三間)을 반간(半間) 퇴(退)물림하였고 어간(御間)에는 쌍여닫이 양측간(兩側間)에는 각각(各各)의 여닫이 문(問)을 달았으며 당내(堂內) 바닥은 우물마루 깔았다.

대문간(大門間)채는 솟을 대문(大門)으로 좌우간(左右間)은 변형(變形)이 되었는데 원래 대문좌측(大門左側)(동측(東側))에는 하인방 1간(間)과 부엌이 설치되어 있었고 우측(右側)에는 지금의 창고 자리에 마구간이 놓여져 있었다 한다.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역사적(歷史的)인 사실(事實)에 대(對)해서는 권령철(權寧徹) 위원(委員)이 조사요약(調査要約)한 자료(資料)를 아래에 인용(引用)한다.

1431(세종(世宗) 13)∼1492 (성종(成宗) 23), 자(字)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점畢齋), 본관(本貫)은 선산(善山),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 숙자(叔滋)의 자(子)로서 그에게서 수업(受業), 세조(世祖) 5년(年)(145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한 이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름했다.

정치사적(政治史的) 역할(役割) 및 의의(意義)는 세조조(世祖朝) 이래 훈구파일당(勳舊派一黨) 독주(獨走)의 시대적(時代的) 상황(狀況)속에서 영남(嶺南) 및 기호(畿湖) 사림(士林)을 결속(結束)하여 사림파(士林派)란 새로운 정치세력(政治勢力)을 구축(構築)하는데 구심점(求心點)의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성종(成宗)의 비호하(庇護下)에 훈구파(勳舊派)를 견제하면서 성리학적(性理學的) 정혁정치(政革政治)를 추진한 중추적(中樞的) 역할을 하였다.

유학사적(儒學史的) 역할(役割) 및 의의(意義)를 살려보면 한국유교사(韓國儒敎史)의 정맥(正脈)을 그의 부(父) 숙자(叔玆)로부터 이어 받아, 이를 김굉필(金宏弼)에게 물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일생(一生)을 통하여 70명(名)에 가까운 많은 문인(門人)들을 길러내었는데, 그중 학문으로 이름난 이로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유호인(兪好仁) 등을 들 수 있고, 문장(文章)으로 이름난 이로는 김일손(金馹孫), 남효온(南孝溫), 조위(曺위), 강혼(姜渾), 김소(金訴)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조목(趙穆), 허반(許磐) 등은 무오사화시(戊午士禍時) 준지처참(준遲處斬)될 만큼 사림파(士林派)의 절의(節義)를 지켰던 이들이다.

저술(著述)은 점필(점畢) 집(集) 23권(卷) 점필재문집(점畢齋文集) 2권(卷) 년보(年譜) 이준록(彛尊錄) 등을 남겼다. 그는 경학(經學)으로서는 성리학계(性理學界)의 종장(宗匠)이었고, 문장(文章)으로도 당대(當代)에 최고봉(最高峰)을 이루었다. 그것은 중종조(中宗朝)에 편찬(編纂)된「속동문선(續東文選)」에 그의 작품(作品) (문한(文翰))이 143편(篇)에 달하는 다수(多數)가 수록(手錄) 되어 있음에서 확인(確認)되는 사실이다.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 및 조선초기(朝鮮初期) 정치사상(政治史上)에서 끼친 그의 공헌(貢獻)이나 역사적(歷史的) 기능(機能) (역할(役割)을 감안할 때, 그와 관련된 유물(遺物), 유적(遺蹟)이 국가적(國家的)인 차원(次元)에서 어떤 형태로든 보존(保存)되고, 보호(保護) 받지 못하고 있음은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12.gif 안채(안채):경북민속자료 제62-1호9089.jpg

본(本) 가옥(家屋)은 일선김씨(一善金氏) 문충공고종댁(文忠公 宗宅)으로 선생(先生)의 부천위(不遷位) 신주(神主)를 모신 사자(祠字)가 있다.

동리 어구에서 CONCRETE 포장한 골목길을 따라 북쪽으로 들어가면 5간(年) 소슬대문이 노단경(路端景)을 이루었고 야산(野山)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대지(垈地)에 건물(建物)이 자리잡았다. 대문(大門)채와 사랑마당을 격하여 사랑채가 높은 축대위에 놓이고 이 사랑체의 뒤쪽의 앞마당을 중심(中心)으로 북측(北側)에 한층더 높은 축대를 쌓아 정침(正寢)을 놓았고 그 앞쪽 좌우(左右)에 고방채와 중사랑채를 벌여 놓아 전체(全體)로서 튼ㅁ자형(字形)을 이루었으며, 동북측(東北側)의 한층더 높은터에 사당(祠堂)을 배치(配置)하였다.

정침(正寢)은 2단(段)의 높은 기단(基壇)을 쌓았는데 표면(表面)을 세멘몰탈 로 마감하였고, 네모난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위에 방주(方柱)세웠는데 대청(大廳)의 중앙주(中央柱)만 두리기둥을 사용(使用)하였다. 대청상부(大廳上部)는 삼량가(三樑架)로 굴곡이 심한 대들보위에 제형(梯形)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았다.

평면형태(平面形態)는 일자 (一字) 남부형계(南部型系)에 속하며 2간대청(間大廳)의 서측(西側)에 통간(通間) 온돌방(큰방)과 2간(間)부엌이 연접(連接)하였고, 동측(東側)에는 작은방을 뒤로 반간(半間) 물려 돌출(突出)시키고 앞쪽에는 반간(半間)깊이의 툇마루를 설치(設置) 하였고, 그 곁에 좁고 긴 간(間)살의 골방을 꾸미고 지붕은 측면(側面)의 박공면에서 내림지붕을 달아 처리하였다.

확실(確實)한 건축연대(建築年代)를 가름할 자료(資料)는 없으나 사랑채(1812년건(年建)) 보다는 앞선 건축물(建築物)로 보이며 1878년(年)에 (12세종손상도대(世宗孫相度代) 묘우(廟宇)와 함께 중건(重建)하였다는 주장이 과히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20.gif 사랑채(사랑채) : 경북민속자료 제62-2호

사랑(舍廊)채는 자연석(自然石) 축대 상면(上面)을 몰탈도(途)하였고 메모난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 위에 방주(方柱)세웠는데 대청(大廳)의 전면중앙주(前面中央柱)만 원주(圓柱)다. 상부가구 (上部架構)는 삼량가(三樑架)로 굴곡이 있는 대들보 위에 제형(梯形)발이 달린 원형판대공(圓形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았다.

평면구성(平面構成)은 전면(前面) 5간(間)의 우측(右側)(동측(東側)) 2간(間)은 전면(前面)이 개방(開放)된 우물마루고, 마루의 좌측(左側)(서측(西側) 2간(間)은 앞쪽에 중반간(中半間)의 툇마루 놓고 뒤로는 통간(通間)의 사랑방을 꾸몄다. 좌측(左側)(서(西)쪽) 끝간은 전면(前面)에 온돌방 1간(間), 뒤쪽에 개방(開放)된 아궁이 부엌간으로 쓰이며 상부(上部)에는 다락을 꾸며서 사랑방에서 출입(出入)케 하였다.

대청상부(大廳上部)의 상량문(上樑文)에 「숭정기원후사임신사월초......(崇禎紀元後四壬申四月初......)라 기록(記錄)되어 있어 1812년(年)에 건축(建築)된 것을 알 수 있겠고, 기둥재(材)의 대부분(大部分)이 중간(中間)에서 이음하여 사용(使用)한 것으로 보아 구재(舊材)를 사용(使用)하여 건축(建築)한 것으로 생각된다.

 

12.gif 사랑채(중사랑채)  경북민속자료 제62-3호9090.jpg

중사랑(中舍廊)채는 세멘몰탈 기단상(基壇上)에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놓고 빈약(貧弱)한 각주(角柱)세웠는데 삼량가(三樑架)로 짜여져 있다.

정면(正面)은 동향(東向)하여 안마당쪽이 배면(背面)이 되었으며 남향(南向)한 좌측간(左側間)을 개방(開放)하여 마루 놓았고, 어간전면(御間前面)의 반간중(半間中) 툇마루 뒤쪽에 온돌 중사랑방을 꾸몄고 우측간(右側間)은 앞뒤로 온돌방과 마루간(間) 광을 각간(各間)씩 설치하였다.

 

 

 

 

 

12.gif 고방채(고방채) : 경북민속자료 제62-4호9091.jpg

고방채는 가운데 2간(間)은 광으로 사용(使用)되며 우측간(右側間)은 방앗간이었다하며 좌측(左側)의 마구간 뒤에 내즉(內則)이 설치되어 있다.

 

 

 

 

 

 

 

 

 

 

 

12.gif 사당(사당) : 경북민속자료 제62-5호9092.jpg

사당(祠堂)은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부천위신주(不遷位神主)를 모신 사우(祠宇)로 자연석(自然石) 기단(基壇)을 몰탈로 포장(鋪裝)하였고,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위에 방주(方柱)세웠으며 상부가구(上部架構)는 오량가(五梁架)로 용자주(龍子柱) 세워 이중량(二重樑) 받고 그위에 제형동자주(梯形童子柱) 놓아 종(宗)도리 받았다.

전면삼간(前面三間)을 반간(半間) 퇴(退)물림하였고 어간(御間)에는 쌍여닫이 양측간(兩側間)에는 각각(各各)의 여닫이 문(問)을 달았으며 당내(堂內) 바닥은 우물마루 깔았다.

 

 

 

12.gif 대문간채(대문간채) : 경북민속자료 제62-6호

대문간(大門間)채는 솟을 대문(大門)으로 좌우간(左右間)은 변형(變形)이 되었는데 원래 대문좌측(大門左側)(동측(東側))에는 하인방 1간(間)과 부엌이 설치되어 있었고 우측(右側)에는 지금의 창고 자리에 마구간이 놓여져 있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