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5.jpg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 개선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높이 3.5m.

 

석등(石燈)은 불전(佛殿)이나 탑(塔) 앞에 세웠던 것이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 있어 우리나라 석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랫동안 그 하부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최근에 바닥을 파내고 흩어진 석재를 정리하여 시멘트로 방형의 지대를 구축하였다. 8각의 하대기석(下臺基石)에도 균열부분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각 측면에 장식문양이 있었는지는 식별하기 어렵다.

 

그 위의 연화대석(蓮華臺石)에는 복엽8판(複葉八瓣)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었고, 그 판단(瓣端) 중앙에 귀꽃이 조식되어 있었던 듯하나, 현재는 모두 파손되어 문양의 형태를 알 수가 없다.

 

연화대 상면에는 한 묶음의 원대를 돌리고 그 위에 원호(圓弧)의 높은 굄대를 마련하여 간주(竿柱)를 받치고 있는데, 원형의 간석(竿石 : 밑돌과 가운뎃돌 사이에 있는 받침대모양의 돌)은 짤막하며 중간은 고복(鼓腹)을 이루고 있다.

 

고복부는 두 줄의 선과 연화문을 조식한 것 등 다른 석등과 같은 수법인데, 간주가 유난히 짧아서 혹시 상하부에 별조의 받침이나 굄돌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될 정도여서, 전체적인 조화는 균형을 잃은 형식화된 느낌을 주고 있다.

 

8각의 상대연화석도 앙련(仰蓮)이 복엽8판으로 하대와 같은 양식이며, 그 상면에는 8각의 높은 굄대를 마련하여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을 받치고 있다.

 

이 굄은 기단의 형식과도 같이 측면 상하연에 돌대(突帶)를 만들어 마치 임실용암리석등(任實龍巖里石燈, 보물 제267호)의 화사석 굄대와 같은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8각화사석은 각 면마다 장방형의 화창(火窓)을 뚫었다.

 

옥개석은 하면에 낮고 널찍한 굄이 조출되었고, 8각의 각 전각(轉角)에는 화사한 화문조식(花紋彫飾)의 귀꽃이 입상(立狀)으로 원각(圓刻)되었는데, 각 변마다 중간에 얕은 전각을 마련하여 뚜렷한 반전(反轉)을 표현하였으므로 옥개석은 16각형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은 평박하고 각 합각(合角)이 뚜렷하며 정면(頂面)에 밑이 넓은 연화대가 있는데, 원형으로서 하부에는 넓게 복련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두 단의 높은 받침을 새겨서 한 단의 높은 복련좌(覆蓮座)를 받치고 있다.

 

그 위에도 소형의 석재가 놓여 있는데 모두 상륜부재임은 틀림없으나 파손으로 각 형태와 문양을 식별할 수 없다. 특이한 점은 각을 이룬 옥개인데, 이러한 양식은 신라 하대에 이루어진 각 석조물의 부재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한편, 이 석등의 각 창구의 양쪽 간지(間地)에는 136자의 해서(楷書)로 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경문왕과 문의왕후, 그리고 공주의 발원으로 승 영판(靈判)이 석등을 조성하여 868년 첫불을 밝히고, 용기3년(龍紀三年: 891) 승 입운(入雲)의 뜻으로 명문을 새겨넣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서체는 북위(北魏)와 초당(初唐)의 글씨가 융합된 것으로서, 서풍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매우 조화를 이루어 우리 나라 서체의 변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석등은 신라의 석등 가운데 유일하게 명문을 남기고 있는 작품으로서, 그와 비슷한 다른 석등의 연대를 추정하고 각 부의 양식 및 조식(彫飾)을 비교 연구하는 데 표준이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