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묵 | 보물 제10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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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
소재지 | |
지정일 | 1963.01.21 |
수량/면적 | 1구 |
시대 | 고려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부여군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시대의 불상. 높이 562㎝.
정림사(定林寺)는 부여천도(扶餘遷都) 즈음인 6세기 중엽(中葉)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百濟)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었고, 그후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때의 번창을 알려주는 것이 석탑(石塔)이라면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 석불상(石佛像)이다. 현재의 머리와 갓은 후대(後代)의 것이며,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상(毘盧舍那佛像)인 것이 확실하다.
이 불상과 대좌는 강당(講堂)의 주존(主尊)으로 생각되는데, 명문(銘文)기와로 보아 1025년경의 중창 때 조성된 불상으로 11세기 중엽의 만복사(萬福寺) 대좌(臺座)나 불상과 함께 11세기 고려(高麗) 불상양식(佛像樣式)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불상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화재와 심한 마멸로 불신은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은 전혀 알 수 없다. 머리에 얹어 놓은 둥근 갓은 후대의 것으로 보이며, 오른쪽 팔과 왼쪽 무릎 등은 완전히 없어졌다.
얼굴은 원반형의 평판적인 모습으로, 이목구비는 매우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다. 넓적한 얼굴에 비하여 어깨는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이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 위로 올린 왼팔의 윤곽으로 보아 아마도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신체 형태나 옷주름 등 세부 표현은 거의 알아볼 수 없으나, 평판적인 신체에 어색한 비례, 치졸한 표현 등이 괴체감(塊體感)만 느끼게 하고 있다.
팔각대좌는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 형식은 알아볼 수 있는데 불상보다 더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상대는 앙련(仰蓮)이 일부 남아 있으나 파손이 심하다. 8각의 중대석에는 2중선으로 안상(眼象)이 크게 조각되어 있다. 안상 내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다.
하대는 2단으로 복잡한 구성을 보인다. 상단의 윗부분에는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여덟 잎 새겨 있는데, 대좌 중에서 가장 양감 표현이 두드러진 부분이다. 하단에는 각 면마다 3개씩의 안상을 새겼다.
안에는 고려시대 특유의 양식인 화형(花形)이 아래에서 솟은 듯 표현되어 있다. 그 아래로 층단을 마련하였으며 하단의 윗면 역시 각 면마다 3개씩의 안상을 새겨 복잡하고 특이한 대좌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불상이 놓여 있던 곳은 강당이 있던 곳이라는 것이 발굴에 의하여 확인되었고, 부근에서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대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정림사라는 절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대평 8년은 1028년(현종 19년)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석불좌상은 사찰 중수 때 제작된 불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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