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jpg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 한 개의 너비 0.53m, 두께 0.36m, 두 지주 사이의 거리 0.59m. 높이 3.65m.

숙수사지는 현재는 조선시대의 사설교육기관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사적 제55호(지정면적 7,504㎡)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찰경내에 있었던 숙수사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보물 제5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숙수사가 언제 법통이 끊어졌는지 알길은 없으나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향(安珦)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더구나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여 이것이 조선 건국의 정신적인 이념이 되었으므로,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 안향의 고향이며, 또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의 옛터에 사우(祠宇)와 강당을 세우고 유생(儒生)들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이로 보아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어오다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에 법통이 끊기고 터만 남아오다 1543년에 이 절터에 서원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1953년 현재의 소수서원 후편으로 소수중학교 운동장을 마련하다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밝혀졌다. 또 서원경내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석조물이 남아 있어 사찰의 규모와 존폐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절에서 의식(儀式)을 행할 때 절마당에 부처와 보살(菩薩)의 행적을 그린 당번(幢幡)을 높은 깃대에 다는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는 지줏돌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원 위치에 원 모습대로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 면은 중앙에 세로띠를 새겼다. 이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또한 꼭대기 안쪽 면에 장방형(長方形)의 간구(杆溝)를 파 놓았으며, 바깥 면은 둥글게 경사졌다. 원래는 당간을 받치는 지대석(地臺石)이 있었으나 현재는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초기(初期)의 창건(創建)으로 추정되는 숙수사의 터로 각종 석물부재(石物部材)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1953년에 이 당간지주의 북쪽 150m 지점에서 금동불상(金銅佛像) 25구(軀)가 출토(出土)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서원 경내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대좌(石造佛像臺座)와 주춧돌 등도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며, 지금 위치가 원래의 자리로 생각된다. 서로 마주 보는 안쪽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았고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띠선을 새겼다.

안쪽면 상단부, 즉 지상 1. 7m 위에 장방형의 넓은 홈을 얕게 음각(陰刻)하였는데 이는 당간을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또 당간지주의 앞뒷면에 너비 7㎝인 테두리선을 파고, 그 가운데에 다시 능선(稜線) 모양의 띠를 새겼다.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서 약간 가늘어지고 맨 끝은 둥그렇게 만들었다.

이 지주의 당간을 받쳤던 지대석(地臺石)은 거의 다 없어졌고 원호(圓弧)를 1단 도드라지게 새긴 긴 댓돌이 남아 있다. 받침돌은 고르게 다듬지 않은 부분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형식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시대에 흔히 있는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