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jpg 서산대사의 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속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1534년(중종 29)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錄)》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15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대흥사서산대사부도는 대흥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구비한 석조부도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부도의 전체 높이는 2.7m이다.

인근에는 서산대사부도의 탑비가 있는데, 귀부·비신·이수를 구비하고 있다. 그렇지만, 귀부 상면에 배치된 비공(碑空)이 장방형임에 반해 비신 및 이수는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원형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1647년(조선 인조 25)에 건립되었다.

이처럼 탑비가 1647년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부도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중대석과 상대석의 동물장식, 옥개석의 전각에 표현된 용과 상륜부의 장엄이 주목된다.

이 부도는 임진왜란시 승병활동으로 알려진 서산대사의 부도라는 점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특수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첫째,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석조부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 부등변팔각형의 평면을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특히 옥개석에 표현된 기와골, 내림마루, 암·수막새기와, 겹처마 등의 목조건축의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같은 양식의 부도와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둘째, 중대석 및 상대석에 표현된 각종 동물상의 표현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볼 때 중대석에는 주로 팔부신중 및 공양상이 부조되고, 상대석에는 앙련이 모각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이 부도의 중대석 네 면에는 화문이, 나머지 면에는 각각 동물을 양각했는데, 아마도 사자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대석에도 통식의 연화문과 함께 거북과 연꽃·게를 양각했는데, 이같은 조형은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일례이다. 특히 게와 조개로도 볼 수 있는 연화문이 표현된 것은 바다가 가깝다는 지역적 특수성이 조형물에 표현된 것이다. 셋째, 옥개석의 전각에 표현된 용두(龍頭)이다.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옥개석 전각에는 귀꽃이 배치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이 부도에서는 1면에는 추정 다람쥐를 나머지 7면에는 용두(龍頭)가 표현되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각에 용두가 배치되는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같은 구도는 단순한 양식의 변화가 아니라 교리적인 배경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완전한 상륜부를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부도의 상륜부는 통식의 부도와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방형과 원형의 조화를 통해 안정감을 유지했고, 특히 매우 사실적인 용을 조각함으로써 다른 부도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다. 다섯째, 서산대사가 입적한(1647년 1월) 해에 탑비가 건립된 점으로 보아 부도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서도 가장 선두에 놓일 수 있는 예가 확인됨으로써 이 시기 석조부도 연구에 또 하나의 자료를 보태주고 있다. 더욱이 보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곡사서부도(1650년) 보다 양식적으로 우수한 면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어 이 계통의 부도는 9세기 중반에 건립된 이래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건립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산대사부도는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계보를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부에 표현된 다양한 조식은 다른 부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수한 일면을 지니고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