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중요민속자료 제15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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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288 |
소재지 | |
지정일 | 1984.01.10 |
수량/면적 | 일곽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심해섭 |
관리자 | .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제월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군지촌정사는 사랑채의 당호이며, 안채와 대문간채가 더 있어 전체를 이루고 있다. 가전(家傳)하는 바로는 18세기 중엽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섬진강이 반달꼴로 끼고 돌며 멀리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까지 백리가 거침 없이 바라보이는, 풍수지리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자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안채는 건축년대를 19세기 초 정도로 추정하며 (구전으로는 18세기까지 올라감) 군지촌 정사(精舍)와 행랑채는 당시의 건물이 약간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4칸 一자형 모양인데 전후퇴를 두면서도 평면은 겹집방식으로 짰다. 평면의 구성은 서쪽으로부터 상하 2칸부엌, 다음은 복판에 큰방, 앞뒤 퇴에는 툇마루를 깔고 다음은 전면에 좌우 2칸대청을 두며 후면에는 도장과 작은방을 차례로 배열했다. 특이한 점은 툇마루 안방과 도장 앞은 문 시설 없이 개방되었는데 작은방 앞은 머름 넣고 판장문을 달아 동선을 차단한 점이다. 또한 양측면은 기둥을 중앙에 놓으면서도 사이 뼈대는 전후퇴로 처리해서 대청 복판에 내진주 하나가 서있다.
집은 높은 축대위에 세워졌다. 축대는 자연석 바른층 쌓기이며 네벌대 높이이다. 초석은 넓적한 화강암(팡돌)인 덤벙주초이다. 기둥은 전후면과 동쪽 복판기둥은 두리기둥으로 하고 기타 내진주 기둥은 네모꼴로서 특이하며 또한 심한 면흘림을 갖는다. 도리는 장혀를 받친 납도리인데 면을 약간 접었을 뿐 딱딱할 정도로 네모꼴이다. 그러나 종도리만은 굴도리로 처리해서 남도 지주계층의 자유분방함을 알겠다. 처마도리와 중상도리를 받치는 장혀와는 보 밑에 단이를 끼워 보강했다. 역시 밖쪽은 직절(直絶), 안쪽은 사절(斜絶)이다. 내진주는 고주로 하지 않고 외진주보다 약간 큰 평주로 만들어서 갓 보가 내진주 머리에 장혀와 짜여졌다. 그 끝은 보아지처럼 사절하여 마감했는데 중하도리는 직접 서까래를 받지 않고 뜬도리로 처리했다. 곧 전후퇴를 갖는데도 2고주7량 뼈대가 아니고 4평주5량으로 된 점이 특이하다. 대공은 둥근꼴의 판대공이다. 측면처리에 있어서도 고식기법을 보인다. 충량을 복판기둥에 맞춰서 구부정하게 대들보 위에 걸친 대신 중하도리는 생략해버리고 중상도리를 돌려 외기를 중량위에 얹었다. 추녀는 외기 맞춤점에 올리는데 커다란 산지를 끼워서 중도리부재와 연결시켰으며 안채의 지붕은 합각으로 처리되었다.
안채에 축을 맞춘 마당 앞에는 행랑채가 배치되고 이것의 동쪽에 약간 안쪽으로 디밀어 이 집의 사랑채이면서 동네 사랑인 군지정사가 자리했다. 평면은 3칸 전후퇴집으로서 서쪽으로부터 복판에 사랑 아래 ·웃방이 배치되고 맨끝에 대청이 놓였다. 전후퇴에는 모두 마루가 깔리고 대청은 3면으로 개방되었다. 예전에는 동네 서당으로 쓰였다고 하며 앞뒤로 담장이 없어서 아무데서나 접근하기 쉽게 계획되었다. 자연석 기단, 덤벙주초, 두리기둥으로 되었으며 집 앞의 커다란 자연석은 정원시설물 처럼 인상적이다.
대문채는 5칸맞걸이 一자형집으로서 건축년대가 안채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복판에 대문칸을 두고 동쪽에 2칸구들, 서쪽에 외양간, 잿간의 차례로 놓였는데 예전에는 초가집이었다.
집 앞 둔덕에는 꼭대기에 아담한 정자(亭子)가 세워졌다. 구전으로는 18세기에 지어졌다고 하나 연대가 조금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면 4칸, 측면 2칸 전후퇴집으로서 남북으로 길게 놓이고 북쪽 복판에 구들을 시설했으며 합각 골기와 지붕이다.
안채는 건축년대를 19세기 초 정도로 추정하며 (구전으로는 18세기까지 올라감) 군지촌 정사(精舍)와 행랑채는 당시의 건물이 약간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4칸 一자형 모양인데 전후퇴를 두면서도 평면은 겹집방식으로 짰다. 평면의 구성은 서쪽으로부터 상하 2칸부엌, 다음은 복판에 큰방, 앞뒤 퇴에는 툇마루를 깔고 다음은 전면에 좌우 2칸대청을 두며 후면에는 도장과 작은방을 차례로 배열했다. 특이한 점은 툇마루 안방과 도장 앞은 문 시설 없이 개방되었는데 작은방 앞은 머름 넣고 판장문을 달아 동선을 차단한 점이다. 또한 양측면은 기둥을 중앙에 놓으면서도 사이 뼈대는 전후퇴로 처리해서 대청 복판에 내진주 하나가 서있다.
집은 높은 축대위에 세워졌다. 축대는 자연석 바른층 쌓기이며 네벌대 높이이다. 초석은 넓적한 화강암(팡돌)인 덤벙주초이다. 기둥은 전후면과 동쪽 복판기둥은 두리기둥으로 하고 기타 내진주 기둥은 네모꼴로서 특이하며 또한 심한 면흘림을 갖는다. 도리는 장혀를 받친 납도리인데 면을 약간 접었을 뿐 딱딱할 정도로 네모꼴이다. 그러나 종도리만은 굴도리로 처리해서 남도 지주계층의 자유분방함을 알겠다. 처마도리와 중상도리를 받치는 장혀와는 보 밑에 단이를 끼워 보강했다. 역시 밖쪽은 직절(直絶), 안쪽은 사절(斜絶)이다. 내진주는 고주로 하지 않고 외진주보다 약간 큰 평주로 만들어서 갓 보가 내진주 머리에 장혀와 짜여졌다. 그 끝은 보아지처럼 사절하여 마감했는데 중하도리는 직접 서까래를 받지 않고 뜬도리로 처리했다. 곧 전후퇴를 갖는데도 2고주7량 뼈대가 아니고 4평주5량으로 된 점이 특이하다. 대공은 둥근꼴의 판대공이다. 측면처리에 있어서도 고식기법을 보인다. 충량을 복판기둥에 맞춰서 구부정하게 대들보 위에 걸친 대신 중하도리는 생략해버리고 중상도리를 돌려 외기를 중량위에 얹었다. 추녀는 외기 맞춤점에 올리는데 커다란 산지를 끼워서 중도리부재와 연결시켰으며 안채의 지붕은 합각으로 처리되었다.
안채에 축을 맞춘 마당 앞에는 행랑채가 배치되고 이것의 동쪽에 약간 안쪽으로 디밀어 이 집의 사랑채이면서 동네 사랑인 군지정사가 자리했다. 평면은 3칸 전후퇴집으로서 서쪽으로부터 복판에 사랑 아래 ·웃방이 배치되고 맨끝에 대청이 놓였다. 전후퇴에는 모두 마루가 깔리고 대청은 3면으로 개방되었다. 예전에는 동네 서당으로 쓰였다고 하며 앞뒤로 담장이 없어서 아무데서나 접근하기 쉽게 계획되었다. 자연석 기단, 덤벙주초, 두리기둥으로 되었으며 집 앞의 커다란 자연석은 정원시설물 처럼 인상적이다.
대문채는 5칸맞걸이 一자형집으로서 건축년대가 안채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복판에 대문칸을 두고 동쪽에 2칸구들, 서쪽에 외양간, 잿간의 차례로 놓였는데 예전에는 초가집이었다.
집 앞 둔덕에는 꼭대기에 아담한 정자(亭子)가 세워졌다. 구전으로는 18세기에 지어졌다고 하나 연대가 조금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면 4칸, 측면 2칸 전후퇴집으로서 남북으로 길게 놓이고 북쪽 복판에 구들을 시설했으며 합각 골기와 지붕이다.
안채뒤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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