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32.jpg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선생이 친 양부 슬하에서 소년시절 성장하던 집으로 주목되어 오고 있다. 부통령을 지낸 바 있는 당대 걸출한 인물이 소년시절을 지내던 집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평가되고 있다.

인촌의 양부는 치재(治財)에 능하여 당대의 거부이어서 사는 집도 제택(第宅)답게 지었으련만 그렇지 않고 1895년에 지은 스물세평 가량의 안채와 열세평 정도의 사랑채, 일곱평이 채 안되는 헛간채를 이엉 이은 초가로 만들었다.

초가이긴 하지만 방주(方柱)를 세워 당당히 주간(柱間)을 결성하고 넉넉한 부재(部材)를 써서 가구(架構)한 점등은 기와집 못지 않는 구성을 하였다. 이런 구조에 초가를 이룩하였다는 것도 이집 특색의 하나가 된다.

초창한 이 집만으로는 쓰임에 부족하였다. 1903년에 열여덟평 가량의 안사랑채를 짓고 열평이 넘는 곳간채를 결구(結構)하였으며 1984년에 문간채(9.8평)을 중건하여 전체적인 배설(排設)은 ㅁ형이다. 이른 바 길상형(吉祥形)의 명가에서 채택한다는 법식에 따르고 있는데 여기에 바깥행랑채가 더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배산(背山)하는 형국에 따라 안채는 서향하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앞퇴가 있는 구조이다. 평야의 살림집답게 주간이 넓어 안정된 맛이 있고 댓돌이 높지 않아 평활(平滑)한 느낌이 감돈다.

이 집은 목수가 같은 사람이거나 동문(同門)의 대목(大木)이 축조했다고 생각되는데 기와집 짓듯이 법식(法式)에 따라 건실하게 지었으며 그 기법은 부안, 고창지방의 특색을 잘 간직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 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결구법(結構法)이 채택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1982년경에 보수의 역사(役事)가 있었으나 현대식 감각이 너무 부여되었다. 사벽(砂壁)이 분벽(粉壁)으로 바뀌고 변형되었던 부분의 교정에서 형상은 예스럽게 되었으되 감각은 현대적이어서 매우 어설픈 맛이 짙게 되었다. 더구나 억새로 이은 지붕은 종래의 이엉이었던 지붕에 비하여 현저하게 달라지게 되고 말았다. 이들은 다시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전대의 작품을 후대인들이 보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케 해주는 예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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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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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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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