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중요민속자료 제14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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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6 |
소재지 | 청천면 |
지정일 | 1984.01.10 |
수량 | 일곽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충북양로원 |
관리자 | 안경원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 중요민속자료 제147호. 대규모의 살림집을 지금은 양로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대부의 제택(第宅)으로 창건된 집이라 하는데, 경영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대략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건물로 추측한다.
원래는 여러 채의 집이 일곽 안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안채·사랑채·곳간채·사당채만이 남아 있다. 안채는 {{#074}}형이고 앞쪽에 一자형의 곳간채가 있어 트인 ㅁ자형이 되었다. 안채의 {{#074}}형 앞에도 一자형의 안행랑채가 있었을법한데 지금은 없다.
청천면(靑川面) 소재의 시가화(市街化)된 곳이어서 전통적인 자연경관을 찾아 볼 수 없을뿐만 아니라 현재 양로원으로 이용되고 있어서 전체적인 면모를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안채와 사랑채의 몸채와 안마당 앞의 광채 및 뒤안에 배치된 사랑채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동남향하며 ㅁ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었다. 서쪽 안채 앞에는 입마개를 해서 一자형 광채를 두고 사랑채 앞에는 행랑채가 있었음직하나 지금은 없다. 사랑채 역시 같은 향이며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에 축을 맞추었다.
안채는 7간 전후퇴의 몸체에 3간 맞배의 양날개를 달았다. 평면구성은 남도방식을 보여서 몸채 서쪽에 좌우 2간에 부엌을 시설하고 다음 2간은 안방, 웃방이며 다음 2간은 대청, 머리에 건넌방(현재는 광)이 배치되었다. 안방에서 건넌방 앞까지는 전퇴에 툇마루를 깔며 뒷퇴는 각기의 방을 크게 쓴다. 대청 앞은 툇마루와 사이에 분합문(分閤門)이 달리고 웃방과 대청 사이에도 분합문이 시설되었다. 서쪽 날개에는 뒤로부터 부엌을 1간 더 두고 아랫방을 상하로 배열했으며 동쪽 날개는 뒤로부터 상하 2간의 상하 건넌방과 맨 끝에 작은부엌이 놓였다. 통상 쓰이는 평면구성이다.
구조는 2고주5량인데 대청 중앙만 1고주5량으로 처리했다. 양날개는 물론 맞걸이3량이다. 댓돌은 지금 보이지 않으며 높은 네모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올렸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종도리에만 장혀를 받쳤으며 대들보 밑에 단이(보아지-받침목)를 받쳤다. 대공은 사다리꼴 판대공이다. 특이한 것은 대들보와 종보 사이에 커다란 접시받침을 끼운 점인데 아마도 후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합각인데 날개 끝은 맞배로 처리했다.
사랑채는 역시 몸채를 6간 전후퇴로 하고 날개는 2간맞배집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몸채는 복판이 특히 커서 간반의 길이이다. 평면구성은 몸채 서쪽부터 앞은 부엌(상부는 다락시설), 뒤는 골방, 다음은 뒷퇴를 터서 상하 2간크기의 안사랑, 동(同) 윗사랑, 가운데는 뒷퇴를 제외하고 좌우 2간의 사랑대청 맨 끝이 상하 2간의 건넌사랑방이다. 안사랑과 대청 앞퇴까지는 툇마루가 놓이며 아래대청의 뒷퇴는 토방이, 윗대청의 뒷퇴에는 벽장이 만들어졌다. 동쪽 날개에는 전퇴간에서부터 시작해서 누마루가 시설되고 서쪽 날개에는 같은 크기로 작은 사랑방이 놓였다. 작은사랑 서쪽 벽에는 헛기둥을 세워서 벽장을 달아냈다.
구조는 전체적으로 2고주7량이지만 복판간이 특별히 크므로 특이하게 처리했다. 댓돌은 화강암 두벌대 장석이며 높은 네모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장혀를 받쳤으며 당초무늬가 초각(草刻)된 보아지를 보강했다. 종도리 아래는 장혀로 받고 당초무늬가 새겨진 화반을 끼워서 헛창방을 보냈다. 물론 소로가 화반머리에 놓이며 사다리꼴 판대공으로부터 당초무늬가 새겨진 보아지가 내밀어 창방을 떠받쳤다. 지붕은 합각인데 몸채의 길이가 특히 크며 전돌로 희자(囍字) 문양이 만들어졌다. 날개 끝도 합각으로 처리했으나 합각은 작고 숫기와로 덮어서 얼른 보기에 모임지붕처럼 보인다. 사랑채 뒤에는 약간 떨어져서 전돌로 만든 독립된 굴뚝이 있는데 수자(壽字) 무늬가 상긋법으로 새겨졌고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나 좀 둔하게 느껴진다.
사당은 4간 전퇴집으로서 전퇴에 마루를 깔고 양쪽에 구들을 두었으며 가운데는 대청으로 되었다. 사당으로서는 조금 특수한 평면구성이다.
광채는 안채 맞은편에 배치된 7간 맞걸이 3량 맞배집이다. 맨 서쪽에 대문간이 놓이고 나머지는 광으로 이루어졌다. 가운데 광간은 안벽을 빈지널로 하였으며 하방과 기둥의 맞춤을 뺄목(메뚜기)산지로 처리해서 특별히 주목을 끈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사대부집의 우수한 작품으로 추측되나 전체적 분위기를 알 수 없고 퇴락된 부분과 개조된 부분이 많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연대가 조금 앞서며 사랑채는 19세기 후반의 건축물로 우수한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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