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탱화

금당사 金塘寺

문성식 2014. 11. 10. 18:12
소재지 : 진안군 마령면 
원문참조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1151.jpg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馬耳山)에 있는 절.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창건 및 연혁〕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 스님의 제자 무상(無上)  스님과 그의 제자 금취(金趣)가 함께 창건한 절이다. 보덕스님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및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보덕스님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의 개조(開祖)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이 중국의 도교에 심취하여 도교를 받들 뿐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650년(보장왕 9)에 제자 11명과 함께 백제의 완산주(完山州)로 내려와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열반경』을 강의하며 백제지역에 불교를 포교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 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그 후 함께 온 11명의 제자 역시 스님의 가르침을 이어 옛 백제지역에 가람을 창건하였는데, 무상(無上)은 진안의 금당사를,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임실의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數)는 문경의 대승사(大乘寺)를, 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에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淨)은 정읍에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제자인 계육(契育)과 함께 진안에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단양에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지어 창건하였다고 한다.

 

다른 하나의 창건설은 814년(헌덕왕 6) 중국승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경복사(景福寺)를 근본도량으로 한 열반종의 사찰로 법맥을 이었고, 이후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懶翁) 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오도(悟道)의 수행처로서 이름을 높였으며, 조선초기에는 태조 이성계가 이곳 도장골에서 백일기도 후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金尺)을 받아 조선을 개국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현재의 위치에서 약 1.5㎞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아 그곳을 고금당(古金堂)이라 불렀으며,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다고 하여 혈암사(穴巖寺)라고도 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침체와 함께 임진ㆍ병자의 양 난을 거치면서 피폐화되었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는 승군 사령부로서 대가람의 위용을 자랑하였으나 이후 승군이 전멸하면서 사찰도 전소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국란을 겪으며 표출된 승병의 국가적 공헌이 어느 정도 인정되면서 1675년(숙종 1) 혈암에서 현재의 터로 자리를 옮겨 중건되었다.

 

근대에는 동학혁명의 주도자인 전봉준장군의 딸이 10년간 고금당에서 숨어 지낸 곳으로 알려졌으며, 1906년 4월에는 호남 최초의 자생적 항일의병 결사체의 구심체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금당사는 호남지역에서 몰려드는 의병들의 진원지로서, 금당사 주지 대완(大完) 스님은 호남항일의병창의(湖南抗日義兵倡義)의 뜻을 세워 호남항일창의격문(湖南倡義檄文)을 판각한 뒤 격문 200부를 순창ㆍ낙안ㆍ흥양ㆍ여수ㆍ돌산ㆍ장흥ㆍ보성ㆍ강진ㆍ해남ㆍ임실 등지로 배포하였으며, 최익현(崔益鉉) 선생과 함께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금당사에서 행해졌던 일련의 항일운동은 1895년의 을미의병 이래, 1905년 을사의병의 정신을 이은 대중적인 의병운동으로서, 위로는 동학농민운동과 맥이 닿고 아래로는 일제하에서 강렬하게 전개됐던 소작항쟁의 운동과도 이어졌다. 이러한 의병창의의 진원지로 지목된 금당사는 일제강점기에 또 한번 대대적인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피폐화하여 명맥만 유지해온 금당사는 1976년 금당을 비롯한 대웅전 등 모든 전각이 쇄락하고 붕괴됨에 따라, 사부대중들이 힘을 합쳐 중건불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1978년 명부전과 산신각, 1990년에 극락전을 새로 지었으며, 1985년에는 절이름 그대로 금당(金塘) 앞에 미륵불입상을 조성하여 현재의 가람 틀을 마련하였다.

 

〔당우와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지장전·삼성각·대방(大房) 등이 있다.

대웅전은 약 300여년 전에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나한전에 봉안된 6척의 목불좌상(木佛坐像)은 동구나무로 만든 것으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고, 너비 5m, 길이 9m의 괘불(掛佛)은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대웅전 앞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탑 1기가 있는데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마이탑사(馬耳塔寺)와 단군을 받드는 이산묘(이山廟)가 있다.

 

12.gif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금당사괘불탱[보물 1266]

금당사목불좌상[전북 유형 18]

금당사석탑[전북 문화재자료 122] 

 

〔가람배치〕

마이산 남부 진입로에서 마이산을 오르다보면 매표소를 조금 지난 왼쪽에 금당사가 있다. 고금당터가 올려다 보이는 이곳은 금당(金塘)을 축으로 옛 가람의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가람은 드넓은 중정(中庭)을 축으로 중심법당인 극락전과 삼성각이 한단 높은 곳에서 남향하고 있으며, 그 맞은편에 현재 신축중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ㆍ요사채 2채가 자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ㄷ자형의 가람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신축 중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극락전, 삼성각ㆍ지장전, 요사채가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외 경내에는 1985년에 봉안된 미륵불입상과 미륵불 조성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미륵불조성방명비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괘불을 비롯하여 오층석탑 등 다양한 석조물이 봉안되어 있다.

 

〔사찰풍경〕

봄날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龍角峯), 가을에는 마이봉(馬耳峯), 겨울에는 문필봉(文筆峯)이라 불리는 신비스러운 마이산 기슭에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금당사가 자리하고 있다. 옛 선비 김종직(金宗直)은, 두 봉우리가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는 마이산의 신이한 모습을 아래와 같이 읊었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빗한 모양이 말의 귀와 같구나
높이는 몇 천길이 되는데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고구려의 보덕(普德) 스님은 보장왕이 중국의 도교에 심취하여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650년에 제자 11명과 함께 완산주(完山州)로 내려와 백제지역에 불교를 포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자 중 적멸(寂滅)ㆍ의융(義融)은 임실에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數)는 문경에 대승사(大乘寺)를, 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에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淨)은 정읍에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진안에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단양에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창건하였고, 무상(無上)은 그의 제자 금취(金趣)와 함께 진안에 세운 것이 바로 금당사(金堂寺)이다.


금당사는 1천300년의 전통을 지닌 백제의 고찰로서 호남 동부권의 대가람일 뿐만 아니라 고려말에는 나옹화상이 수행하며 도를 이룬 곳으로도 유명하여, 금당사 옛터인 천연동굴은 나옹굴(懶翁窟)이라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금당사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일제의 주권침탈에 맞서 싸우던 호남지역 항일운동의 진원지로 역할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시 주지 대완(大完) 스님은 몸소 격문을 새겨 각지에 배포하고 최익현(崔益鉉)과 동맹록을 작성하는 등 호남 항일의병창의(湖南抗日義兵倡義)의 뜻을 펼쳤는데, 금당사에서 행해진 일련의 항일운동은 위로는 동학농민운동을 잇고 아래로는 일제하에서 맹렬히 전개된 소작항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대대적인 수난을 겪어 사찰은 피폐화되었지만, 옛 고찰의 면모를 일신하는 대대적인 중창이 이어지고 있어 짙은 안개 속에 뚜렷이 떠오르는 마이산의 쌍봉처럼 백제의 고찰이요, 호남 항일운동의 진원지인 금당사의 역사는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설 화〕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천상에서 쫓겨난 산신 부부가 이 세상에 내려와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천상세계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다. 


이때 남편 산신이 말하였다.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을 누가 보면 절대 안 되니 밤에 떠나기로 합시다.” 그러나 여신은 밤에 떠나는 것은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고 남편을 설득하였다. 이에 남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되었지만 여신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오랜 속죄의 날들이 허사가 될세라 불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이튿날 새벽 날이 밝자마자 산신 부부는 승천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새벽에 우물을 찾았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여인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신은 여신으로부터 두 아이를 빼앗고 발로 차 버린 뒤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우뚝 서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는 냥, 마이산은 진안의 북쪽에서 바라보면 동편 수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서편 암마이봉(667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고개를 떨군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교통정보〕

자가용

전주ㆍ무주ㆍ김제 등에서 들어가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으나, 호남고속도로 전주 IC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빠르고 찾기도 쉽다.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금당사로 접어드는 지름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호남고속도로 전주IC에서 1번 국도를 따라 전주 시가지로 진입하다가 26번 국도(7.8km)를 따라 봉동로타리에서 전주방면으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소양교 앞에서 좌회전하면 명덕교가 나오며, 여기서 다시 좌회전하면 26번국도인 부귀방면으로 접어든다. 정비가 잘된 26번 국도를 따라 진안읍 시가지로 들어서면 진안로터리에서 마령방면(7km)의 마이산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5분여 정도 들어서면 마이산 남부주차장 표지판이 보이며, 그곳에서 우회전하여 3.5km를 들어가면 마이산 남부주차장이 나타난다.

 

둘째, 대전ㆍ통영간 고속도로 무주IC에서 진안방면 30번 국도를 따라 진안읍 시가지로 들어서거나 서상목 나들목에서 장계방면 26번 국도를 따라 진안읍으로 들어서는 길이 있다. 진안로터리에서 남부주차장 표지판을 따라 마령방면으로 7km 정도 들어서면 여기저기서 마이산의 풍광을 엿볼 수 있으며, 주차장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금당사가 자리하고 있다.


마이산은 도립공원이라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의 왕래로 차량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소형차는 절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대형버스는 남부주차장에 주차해야 한다.

 

버스편

진안까지 오는 대중교통은 서울 남부터미널ㆍ전주ㆍ대구ㆍ대전ㆍ부산 등지에서 직행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진안에서 마이산 및 죽도 입구까지는 완행버스가 운행된다.

  

진안 공용버스터미널에서 남부 마이산행은 군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하루 4번 운행된다. 전주에서는 하루 6회 정도 운행되는 마령면행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전주에서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30분까지 15분마다 운행되고 있다. 이외 진안에서 남부 마이산까지는 약 12km의 거리로, 택시를 타면 만원 정도의 요금이 나온다. 진안시외버스터미널(전화:063-433-250)

 

〔도움전화〕

금당사 063-432-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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